집안의 가구나 가전제품의 노후화가 다음달 있을 결혼기념일보다
결혼 12년차를 실감나게 만든다는 건 좀 우스운 일일까.
TV와 세탁기, 청소기의 소소한 고장은 이미 일상인 거고,
이번 여름을 지내며 서랍장의 손잡이가 뚝 부러졌고, 렌지대의 슬라이드 선반이 파손되었으며,
지난 주말에는 냉장고 손잡이가 부러졌다.
마침 2단 렌지대에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이것이 기회다 싶어
밥솥과 오븐렌지와 전자렌지를 모두 놓을 수 있는 3단 렌지대를 후딱 질러 설치를 끝냈는데,
수제 수리가 필요한 서랍장의 손잡이는 아직 방치된 상태이다.
냉장고 손잡이는 지난 월요일 점심시간에 맞춰 AS방문을 요청했건만,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수요일 점심으로 미뤄졌다가 다시 저녁으로 조정되었다.
어쨌든 바로 AS가 될 줄 알았건만 어제는 파손부위만 확인하러 오신 거였다며 그냥 철수하셨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냉장고 문을 아예 여닫지 못하는 건 아닌지라 혼자 투덜대고 말았는데,
애들 다 재워놓고 빨래 널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이 밤에 누구? 화들짝 놀라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의아해 하며 받아보니 아까 왔던 AS기사가 부품을 확보했다며 지금 AS하러 오시겠단다.
애들이 모두 자고 있다고 며칠 더 미뤄져도 좋으니 다음에 AS하러 오시라고 했더니
갑자기 이 분 신세타령이 늘어지신다.
올 여름 폭염으로 인해 에어콘 AS와 설치 작업이 어마어마하게 밀려 평일엔 자정까지 일하고
7월부터 지금까지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한 번도 쉰 적이 없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AS가 늦다고 자꾸 민원만 넣고 있어 정말 힘들단다.
절대 지연 항의 안 할테니까 시간 되실 때 오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배달이나 AS가 빠른 나라가 없다.
배송비나 AS 출장 비용도 가장 저렴한 편이고, 심지어 무료인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고객들은 더 빨리 빨리를 외치고,
단 한 명의 고객이 제보를 넣어도 언론은 팔아만 놓고 늑장 대응이니 어쩌니 성토 기사가 쏟아진다.
AS기사의 신세한탄에 이토록 감정이입이 되는 것도 결혼 12년차만큼 내가 나이를 먹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