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보도사진윤리를 주제로 꽤나 진지하게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비폭력집회 도중 백골단이 쳐들어와 참가자들을 죽일듯이 팰 경우 이를 사진으로 찍어 널리 폭로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일단 학생을 구하는 게 맞는가. 당시 우리는 일단 얼른 사진을 찍은 뒤 학생을 구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렸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라며 냉정하게 따지던 선배의 안경이 지금도 오싹하게 기억난다.

나로선 보도와 인명(혹은 인간존엄)중 무엇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설 기회가 아예 없었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뿐 도저히 해답을 못내겠다. 하지만 수니나라님이 보내준 고마운 공짜표로 세계보도사진전을 가본 소감은 영 씁쓰름하다.

참혹한 전쟁을 고발한다는 명목으로 라이베리아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사체는 곳곳에서 거리낌없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뿐인가. 미국의 이라크 공습으로 부모와 형제는 물론 11명의 친척이 죽고 본인은 상반신만 남은 병신이 되었다는 것을 사진으로 말하기 위해, 어린 알리 이스마일의 가엾은 몸뚱아리를 가리고 있던 모포는 거리낌없이 제쳐졌다. 남편의 학대를 피하기 위해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실패한 마리아의 사진은 또 어떤가. 초점이 흔들린 사진결과를 보건대, 전신화상으로 얼룩진 나체의 몸뚱아리와 얼굴을 가리기 위해 그녀가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충격적인 사진들은 전세계적으로 파장을 불렀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진들 모두가  '보도'를 우선시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과연 누가 사진기자에게 촬영을 거부한 사람의 사진을 전세계에 순회전시할 권한을 주었는가. 보도를 명목으로 초상권 고소의 위험이 없는 사체의 사진을 마음대로 찍어도 되는가?

이는 서방의 사건을 다룬 보도사진의 예와 비교해볼 때 더욱 문제시된다. 가령, 미국에 불어닥친 초거대 허리케인의 피해로 수십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쳐야했던 사건을 보도한 사진을 보자. 단 1명의 사체도, 부상자도 발견할 수 없다. 사진속에는 아름답기까지한, 장엄한 자연의 순간이 담겨있을 뿐이다. 전시회에는 사진이 없었지만, 미국의 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루었던 보도사진을 기억하는가. 교실벽에 박혀있던 총알, 혹은 희생자를 추모하며 흐느끼는 친구의 사진이 실렸었지, 총기난사후 자살한 주범의 사체나 비명횡사한 급우의 현장사진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라이베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이 나라들은 서방세계에 속하지 않는 타자이며, 감히 국제사진기자에게 저항할 힘이 없는 약자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서방기자들은 고소당할 염려없이, 상대적으로 사진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고민을 덜 하면서, 보다 충격적인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지금 난 서방기자들 개개인의 윤리의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수십통의 사진중 단지 한 장만이 보도될 수 있다고 할 때, 그러한 사진이 널리 알려지고, 순회전시되고, 사진집에 수록되고, 상을 받을 수 있는 배경에도 서구우월주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니나라님, 인사가 너무 늦었죠? 님덕에 정말 좋은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전시회에 갔었으나 그동안 바빠서 정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페이퍼에는 전쟁 사진의 참혹함만을 끄적였지만, 스포츠 사진이나 인물사진, 자연사진 등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졌고, 수니나라님 덕분에 참으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09-2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퍼가서 한 번 두고두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당근 추천도 하나^^

sooninara 2004-09-25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그런 이유가 있군요..저야 볼줄도 몰라서..조선인님이 다녀오셔서 이렇게 좋은 페이퍼를 올려주시니 고맙네요...
죽고 나서도..값어치가 다른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네요..
새로운 세상보기를 가르쳐주셔서..감사합니다..^^

호랑녀 2004-09-2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구우월주의... 가장 앞선 의식을 가져야 할 기자들도 어쩔 수 없군요. 아마 뼛속부터 우월주의로 가득 차 있고,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을 테니 달라지기 쉽지 않겠죠.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늘 딜레마였습니다. 사실 지금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게 무엇일까...
학교다녔던 그 때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줄었네요. 가지치기가 되어서 다행이라고만 하기엔 아쉬움도 있습니다.

2004-09-25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짱 2004-09-30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추석 잘 보내라고 글 남겨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솔직히 연휴 내내 사무실에서 먹고 잤습니다. 컵라면과 피자를 먹으면서 보낸 지난 며칠간의 생활은 현재의 몰골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만, 저는 제 일이 좋습니다. 집에서는 쫓겨났지요.^^;; 10월 중순이 지나서 조금 여유가 생기면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우리 이쁜 마로 얼굴을 자주 못봐서 사실 마음이 아프거든요.=.,=;

바람구두 2004-09-30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