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나와 동갑이다.
자연히 회사의 다른 동료보다 좀 더 친했다.
안타깝게도 H는 일머리가 좀 떨어지는데 친하다 보니 내가 도와준 경우가 꽤 있고,
간혹 지나치게 많은 부탁과 의존을 해오는 경우가 있어 좀 불편했던 적도 있지만,
어쨌든 친구니까 꽤 많은 부분을 그냥저냥 넘겨왔다.

그러다 지난해 봄...
당시 아버지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고 의식도 잘 잃으시고
우리 형제들은 병원 의사의 조언이 없었더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필 그 무렵 H는 새로운 일을 맡아 나에게 조언(?)을 심하게 많이 구하곤 했다.
업무 성격상 낮밤 가리지 않는 그의 전화는 하루 십여 통씩 이어졌고,
난 회사나 집에서 전화를 받을 때는 참을 만 했는데,
아버지의 병실이나, 응급실 또는 중환자집중치료실에서 받을 때면 좀 많이 짜증냈다.
어쨌든 업무상 내가 그의 사수에 해당하니 참고 지냈는데...
어느 토요일 아침, 중학교 동창의 결혼식이 있던 날...
전날 난 동창에게 전화해 아버지 때문에 결혼식에 못 갈 수도 있다고 미리 사과했고,
당일엔 아침을 차리며 옆지기에게 결혼식을 갈까 말까 의논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고,
마로는 TV를 보며 히히덕거리고 있었고, 해람이는 늦잠을 자고 있었고...
그 아침, 병원에 있던 작은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나만 허겁지겁 먼저 병원으로 출발했고, 이미 아버지의 의식은 없었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귀에 대고 '저 왔어요.' 끊임없이 말을 걸어봤건만
미처 다른 식구는 도착하기도 전 전 작은오빠와 나만 임종을 지켰더랬다.
모든 식구들이 도착하면 그때 장례식장에 옮겨야 하나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그 때 H가 전화하여 난 황급히 집중치료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H는 그 전에도 내가 열번쯤 가르쳐줬던 일을 또 물었고,
난 나한테 전화할 일이 아니라 C사에 직접 통화하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H는 나도 그 사실은 알지만 C사가 자기 말을 잘 안 듣는다는둥 사설을 늘어놓았고
참다 못해 난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막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거든. 그만 끊어!"

아... 그러나 H는 H였다.
그는 내게 다시 전화를 했다.
미안하다, 몰랐다, 한참을 사과를 하고 다시 끊는 거다.
그리고 2시간쯤 있다 다른 동기 L한테 전화가 왔다.
H에게 우연히 들었다며,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장례식장과 장례일을 물었고,
경조휴가가 1주일이라는 걸 내게 알려줬고, 다시 위로의 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후 1년하고도 반 년이 지났건만 난 여전히 H를 피하고 있는데,
H는 여전히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모르는 일이 있으면 나에게 제일 먼저 묻고,
부탁할 일이 있으면 내게 제일 먼저 부탁하고,
시시때때로 이직이나 결혼 상담을 구하고 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1년전 3월 27일 토요일 아침으로 돌아가는데,
그는 왜 일머리만 없는 게 아니라 눈치도 죽어라 없을까...
난 정말 H가 이직에 성공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래서 송별식날 나는 말하고자 한다.
부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게 전화하지 말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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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1-10-0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ㅜㅜ

머큐리 2011-10-0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2...

bookJourney 2011-10-0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에도 격하게 공감하고 있어요. 어느 직장에나 H 같은 인물이 한 명씩은 있는 걸까요? ㅠㅠ

조선인 2011-10-04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머큐리님, 공감이라고 믿겠습니다.
책세상님, 지난주에도 H는 저를 붙잡고 이력서 내는 이야기를 한참 상담하더이다. 정말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꾸욱 참았습니다. 그저 H가 꼭 합격하길 바란다는 말만 거듭해줬어요.

2011-10-0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정말.. ㅠㅠ

눈치 없는 사람들은 콕 찝어서 얘기해줘야 해요.

무스탕 2011-10-0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사람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라고 딱딱 잡아줘야 알아먹어요.
(그렇게 해서 제대로 알아먹는다는 100% 보장은 없습니다만;;;)
만약 다른곳으로 가서 조선인님처럼 대해주는 사람 없으면 그곳에서도 조선인님께 전화할걸요?

조선인 2011-10-05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귄, 같이 울어줘서 고마워.
무스탕님, 그러니 대놓고 말하려구요. 절대 전화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