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니까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로 올리고 싶은데... 어째 올리고 보면 내 얘기는 죄다 코미디인 듯. 그래도 꿋꿋이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그림 이야기를 끄적여볼란다.

지지리도 미술을 못했던 나와 달리 작은오빠는 예술적 감성이 어려서부터 풍부했고 재능도 넘쳤다. 한때는 촉망받던 설치미술가이기도 했던 오빠는 갑작스런 집안 살림 악화로 어쩔 수 없이 입시전문 미술학원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큰오빠나 나나 작은오빠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이다.

각설하고...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오빠가 고등학교 때 유독 좋아했던 화가가 뭉크였다. 그리하여 어느날 사들고 온 것이 "절규" 사진 액자. 한때 락에 미쳤던 큰오빠도 그 감성을 맘에 들어해 두 형제는 작당을 하고 이 그림을 어디 걸 것인가 이 벽에 대봤다가 저 벽에 대봤다가 불을 켜봤다가 껐다가 하며 한참을 의논해댔다. 그리하여 드디어 결정한 장소가 바로 x표한 곳.

큰오빠와 작은오빠가 함께 그림을 공유할 수 있는 중간 위치. 게다가 뭐 그런 그림이 다 있냐 질색하는 어머니 눈에 잘 안 띄는 장소. 그리고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있는 장소... 화장실 앞 벽...

큰오빠 방이 막고 있는 그늘. 거실 베란다에서 햇볕이 달려와도 닿지 않는 곳. 원래는 조그만 미니전등이 있었지만, 별 쓸모가 없다 하여 필라멘트 끊어진 전등을 방치해둔 곳. 그 어두침침한 벽에 뭉크를 걸었다. 더욱 괴기스러운 건 밤에 화장실에서 나올 때. 시꺼먼 어둠 속에 잠겨있던 뭉크는 화장실 문을 열면 주홍빛 백열등에 노출되어 더욱 절규스러웠다. 게다가 작은오빠의 감각적 연출에 의해 액자는 천장 바로 밑에 걸렸는데, 그것도 윗부분은 15센티 대못을 이용해 벽에서 떨어져있었고 아래부분은 철사로 벽에 딱 고정시켜 놨었다. 즉 사람 머리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보며 절규하는 양상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오빠들이랑 5살, 6살 차이),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화장실을 가긴 갔는데, 일을 보고 나올라치면... 절규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까봐 겁이 나, 다른 식구들이 볼일보러 올 때까지 몇 시간씩 화장실에서 끙끙댄 적도 있다. 용기를 내서 화장실에서 나와도 그림속 인물이 다리에서 뛰어내려 내위로 떨어져내릴까봐 무서워, 눈도 못 뜨고 내방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다. 내 친구들도 오빠들의 악취미에 학을 떼며 마루 화장실 이용하는 걸 싫어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오빠들은 그 그림과 그 위치를 워낙 기꺼워했던 터라 떼내지도, 옮기지도 않으려 했고, 결국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 이사를 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덕분에 난 지금까지도 뭉크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한다. 상상해보라. 화장실 앞벽의 비스듬한 절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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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6-15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으.. 정말 섬뜩하셨겠습니다..
저는 밤에 거울 앞에 지나갈 때가 제일 무섭던데... ^^;;

starrysky 2004-06-1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어린 시절에도 저를 늘 악몽에 빠뜨리던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도 모를 화가가 그린 풍경화인데, 그 즈음에 읽었던 무서운 이야기와 그 그림이 오버랩되어 정말 너무너무 끔찍했었죠. 엄마한테 아무리 그림 좀 치워달라고 부탁해도 나의 공포심을 전혀 이해해주지 않던.. ㅠㅠ
저도 밤에 거울 앞이랑 창문 앞 지나가는 거 너무너무 싫어요. 그래서 그런 게 있는 장소에 갈 때는 일단 눈을 꼭 감고 불을 환하게 켠 다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총총총.. 아, 살기 힘듭니다.

반딧불,, 2004-06-1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줄이 올라온 새 글로..
이 페이퍼를 놓쳤군요..
그나저나 그 공포감이라니..저도 그런 것이 있었지요.
정말 무서우셨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