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야영의 백미는 아마도 담력 시험이 아닐까 합니다. 안그래도 널린 게 학교 괴담인데 자정을 기해 교내의 모든 불을 끄고 담력시험을 행하니 왠만큼 담 큰 아이들도 머리카락이 쭈빗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뭐 일단 기준은 제 경험상 초등학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색한 분장에 유치한 효과임에도 불구하고 그땐 기절한 아이도 있었지요.

저 역시 겁이 많은 편이지만, 참으로 우연하게도 가장 겁없는 여자아이로 뽑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시험은 2명씩 1층 오른쪽 계단을 올라가 5층 복도를 지나 왼쪽 계단으로 1층까지 내려오는 것.

그런데 먼저 운동장 야영을 경험했던 다른 반 친구의 말과 달리 제가 할 땐 계단에 귀신도 도깨비도 없더군요. 저랑 짝은 매번 똑같으면 놀라는 애가 없으니 구성이 달라지는 건 줄 알았습니다.

5층에도 별 게 없다고 방심한 찰나... 이런... 짝이랑 제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짝이랑 나랑 한참을 더듬거려보니 또래 친구인 거 같더라구요. 우린 전조 애중에 기절한 애가 있었나 싶어 열심히 흔들어 깨웠습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길래 나중에 뺨을 찰싹 찰싹 때리고 꼬집었는데, 갑자기 그 애가 버럭 일어나 신경질을 내더군요. "야, 나 귀신역이야. 얼른 가버려."

짝과 나는 너무 놀라 왼쪽 계단까지 줄행랑을 쳤고, 그 애는 도로 바닥에 눕는 거 같았습니다. 우린 치마를 입어 여자애인줄 알았는데 목소리 들어보니 남자애다, 과연 어느 반 누구일까, 여자애들이 남자애를 막 만졌다고 소문나면 어떡하지,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우려와 달리 남사스러운 소문은 안 나고, 여자애들이 겁도 없이 귀신역을 놀려댔으며, 아무리 귀신을 많이 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라는 식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연인즉... 전 시력은 좋은데 밤눈이 심하게 나쁩니다. 맨땅인줄 알고 걷다가 밤길에 하수도에 빠진 적도 있고, 축대에서 떨어진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제 짝은 심하게 눈이 나빠 1센티도 넘는 두께의 안경을 쓰고도 책을 코앞에 대고서야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당연히 칠판필기가 불가능해 매일 방과후 제 공책을 베끼는 게 참 큰일이었죠.) 둘 다 그렇게 뵈는 게 없다 보니, 여기 저기 귀신이 나타나봤자 눈에 뵈지 않았던 거죠. 같은 반 친구들 말에 따르면 층계 손잡이에도 귀신이 앉아있었고, 층계참 천장에 사람 목이 대롱거렸다고 하고, 5층 복도에도 창문귀신, 교실 귀신이 넘쳐났다고 하나... 우리로선 발에 걸린 귀신 외에는 목격한 게 없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는데, 도깨비집을 가봤자 하도 캄캄하니 음향효과 외에는 무서운 게 보이질 않습니다.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우맘 2004-06-1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거...안 보이는게 더 무서운 거 아녜요? -.-;;;;
올드보이의 대사가 생각나는군요. 상상력이 없으면, 두렵지도 않다 했던가?^^

조선인 2004-06-1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으... 정곡을 찌르시군요. 맞아요. 제가 상상력이 좀 부족해요. ^^;;

물만두 2004-06-1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적 무서움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라 도깨비집에서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 사람들이 오히려 싫어하더군요. 하지만 상상적 무서움은 극에 달해 공포물을 밤에 못 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