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바로 내 옆에 앉아있는 남자동료가 범인이라서 경찰에게 묘사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것이다.


그는 남자입니다. 안경을 쓰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숱이 적은 편입니다만 정수리탈모인지 M자 탈모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키는 나보다는 확실히 크고, 뚱뚱하다거나 마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어린 편인데, 마흔은 넘었을 거 같습니다. 딱히 두드러진 신체적 특징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억양에 경상도 사투리가 있지만 표준말을 쓰는 편입니다.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있었냐구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다. 난 외모에 대한 관찰력, 기억력이 형편없는 사람이라 목격자 진술을 할 일이 평생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꽤나 쉽게 경찰의 유도심문에 끌려다닐 거 같다. 내 기억의 빈틈은 기억 조작 기술이 파고들 틈이 되고, 교묘한 오정보효과는 나의 형편없는 진술을 상상력으로 메꾸게 될 것이다.


목격자 진술같은 극단적 사례가 아닐지라도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기억조작에 근거하는 인지남용의 또다른 유형으로 '가스라이팅'을 겪는 일이 흔하다. 고객에게 갑질을 당하면서도 이를 정당한 요구사항으로 착각하거나, 연인의 비난을 조언으로 착각하는 일이 과연 내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기억 조작이든, 가스라이팅이든 결국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한 선택인데-비록 수동적인 선택일지라도, 우리는 그 선택을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그 선택을 정당화한다. 저 경찰관은 날 유도한 게 아니야, 내가 곰곰히 잊혀졌던 기억을 떠올린 거야. 혹은 고객(연인)이 날 괴롭힌 게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게 문제였던 거야...  


긍정적인 기억 조작도 있는데, 우리는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함과 친근감을 느끼는 만큼 내가 도와준 사람에게도 감사함과 친근감을 느낀다. 이 프랭클린 효과라는 말은 낯설지만, 명품백 효과 혹은 애플빠 효과라고 치환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1-12-0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 님 이게 한 오백만 년 된 거 같은 느낌
이거 뭔가요 ㅎㅎ 페이퍼 반갑습니다.
뇌는 수시로 거짓말을 한대죠. 착각도 잘하구요.

조선인 2021-12-10 15:29   좋아요 1 | URL
외부인터넷 차단된 고객님이 많아 알라딘에 글쓰는 게 힘들어요. ㅎㅎ
잘 지내시죠?

난티나무 2021-12-09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프레이야님 따라~ 조선인님 잘 지내시죠?^^

조선인 2021-12-10 15:29   좋아요 0 | URL
전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모두 모두 연말연시 건강하게 보내시고 코로나 없는 새해 맞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