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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조프스키의 책은 처음 접하기 때문인지 서술 방식이 우선 약간은 낯설다. 역자의 말대로 조프스키의 스타일이 논의의 배경이나 개요 없이 바로 주제로 파고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폭력이라는 눈살찌푸리고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주제를 사회적, 문화사적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역자에 의하면 저자의 낯선 문체 스타일은 <리바이어던>을 쓴 토마스 홉스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지금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특이하고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인 폭력과 함께 폭력과 연관된, 아마 모든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현상들을 포괄하여 저자의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폭력과 관련하여 연상할 수 있는 것들은 “무기, 학살, 고문, 불안, 파괴, 도주” 등으로 이는 목차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또한 저자는 폭력과 관련한 현상을 폭력의 주체의 시각 뿐 아니라 객체 혹은 대상의 시각에서도 동시에 분석하고 있다. 물론 폭력의 대상이 사물일 경우(사물들의 파괴 장)에는 이러한 분석이 불가능하다.
<목차>
질서와 폭력/ 무기/ 폭력과 격정/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 사물들의 파괴/ 문화와 폭력
저자는 폭력의 발생과정과 배경을 저자의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우선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거나 단합하려는 이유는 신체상의 고통 또는 폭력의 경험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은 타인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끝임없이 규정과 규칙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러 질서나 지배가 “괴수의 촉수처럼” 삶과 자유를 억압하는 또다른 폭력이 된다. 아마 이는 질서나 안전에 대한 대가로 개인의 자유를 일부 희생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닮고 있다는 저자의 다른 저서 <안전의 원칙>의 시각과도 일관성이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질서는 다시 소요와 학살자들의 축제 속에 종언을 고했다. 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폭력은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지배했다. 폭력은 혼돈을 마들고, (혼돈을 어렵사리 극복하고 만들어낸) 질서는 폭력을 만든다. 이런 딜레마는 풀어낼 길이 없다. 질서는 폭력에 대한 불안에 기초하여 스스로 새로운 불안과 폭력을 만든다.”(p.13)
질서와 폭력을 정의한 후에 저자는 각 장별로 폭력과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후 장을 읽으면서 나타나는 특이한 점은 첬째, 저자의 폭력 사회에 대한 분석방식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익숙함은 <감시와 처벌> 등과 같은 미셸 푸코의 저작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푸코를 제대로 읽지는 않았지만 그의 논의 주제인 감시, 처벌, 감옥, 통제(지배) 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근대사회를 감금사회, 관리사회, 처벌사회, 감시사회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그런 세계에서는 지배적인 사상이 곧 지배의 사상이다. 칼은 말할 것도 없고 책과 성서 그리고 성직자 계급도 질서의 힘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p.25) 같은 문장은 푸코에게서도 발견함직 하지 않은가?
둘째는 고문, 학살, 사형집행, 파괴 등의 현상들이 일상에 또는 언론이나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많이 노출된 때문인지 장별로 읽어 나갈 때마다 다양한 이미지나 책들이 끊임없이 연상되어 머리를 어지럽힌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건 한 권의 책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다양하게 접목시키고 반추해보는 행복한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무기”라는 장에서는 총, 칼, 대포 등의 도구 뿐 아니라 인간의 몸 자체도 무기로서 분석하고 있는데, 몸 자체가 무기인 가장 극한 상황으로는 영화 “진주만”에 등장하는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의 모습이나 아랍지역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자살 폭탄테러가 자연히 연상된다.
“폭력과 격정”의 장에서 질 드레의 기사도의 시대의 최후의 노(老기)사를 언급할 때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된다.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과 “학살”이라는 장을 지날 때는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과 80년 광주의 학살현장이, “고문” 장에서는 역시 80년대 정치적 고문의 숱한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이 끝없이 떠오른다. 물론 저자는 “고문이란 총체적인 상황이다. 폭력은 희생자의 육체뿐만 그의 자아와 정신세계까지도 점령한다.”(p.139)고 우아하게 사회학적으로 정의한다. 또한 “구경꾼” 장에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결투장면이 읽는 내내 본문과 겹친다. “구경꾼은 역겨움과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격렬함에 사로 잡힌다. 폭력의 격렬함은 감각과 귀, 눈, 영혼을 단번에 점령한다.”(p.147)에서도 그렇지만 러셀 크로우가 거인과의 대결후 관중들의 죽이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그를 살려주자 그를 칭송하는 관중들의 눈치를 보며 거인을 살려주기로 하는 장면은 본문과 그대로 겹친다. “환호하는 다중 자체가 파괴하는 힘이다. 처음에는 폭력이 관객을 만들어냈지만, 이제는 관객이 새로운 폭력을 만들어 낸다. ....... 행위자는 구경꾼과 닮았고, 구경꾼도 행위자와 닮았다. 행위자는 구경꾼의 집단의지를 구현하고 있으며 그들이 원하는 바를 실행에 옮긴다. 이제 진정한 살인 집행자는 개별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구경꾼 집단이다.”(p.167) “그러나 결투장의 진정한 주권자는 황제가 아니라 관중이었다. 황제라 하더라도 다중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p.170) 물론 영화에서는 크로우가 다중의 요구에 역행함으로써 다중의 마음을 더 강하게 사로잡는다.
셋째는, 저자의 개념 정의나 설명은 때로는 특별한 세부 설명없이 다양한 비유로 압축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역자의 말과 같이 “시적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사물들의 파괴”란 장이 특히 그렇다.
“파괴는 특별한 형태의 행동 양식이다.
사람들은 자기 앞을 가로막는 사물을 부수고 없앤다.
파괴란 빈(혹은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앞뒤고 접근 통로를 열어준다.
파괴는 반동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바로 한계를 뛰어넘는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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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는 일체의 주어진 것을 무력화한다.
파괴는 무엇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다.
파괴 앞에서는 존재했던 것이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된다.
파괴는 생산과 산출을 철저하게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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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파괴란 대립 자체이다.
그것은 세상을 인위적인 변형물로 만들고자 한다.
파괴의 입장에서는 사물의 속성보다는 실체와 실존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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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는 교체를 빚어낸다.
파괴는 시간의 지속에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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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의 눈으로 보자면 사멸이야말로 가치있는 일이다.
파괴자들은 세상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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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란 불안전한 파괴의 산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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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는 역사에 대항하는 행위이다.
파괴는 미래나 새로운 시작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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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는 본성상 자신을 총체화하려고 애쓴다. .....
총체적 파괴란 사물을, 그것의 물질적 실체는 말할 것도 없고 의미까지도 가차없이 부수는 것을 말한다. ......
총체적 파괴란 하나의 행동을 공허나 무 속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pp.282-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