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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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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신간소개란을 통해서 "번역의 탄생"을 처음 접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처음 각인한 것은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의 번역자로서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가 여자라고 확신했다. "희재"라는 이름이 더 여성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쨌든 그의 프로필을 좀더 세심히 살펴보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나서야 그가 선비풍의 멋진 남자라는 걸 확인했다. 특히 한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과 어쩌면 번역에 관한 철학을 갖추고 있는 전문번역가라는 걸. 

영어로 된 자료를 볼 일이 많은 나는 항상 우리말로 번역할 때 좀더 한국적으로 또는 한국어답게 표현하는 법에 목말라 있었다.  이 책은 이런 내 욕구를 100% 완벽하게 채워주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알게 모르게 영어식 표현에 물들어 있는 우리 글쓰기를 영어와 비교함으로써 한국어의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번역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기술(아니 이말은 이희재에게는 실례일 것 같다. 따라서 "예술"로 정정)을 통해 우리 글쓰기를 더 완벽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게다가 영어를 조금하는 딸 녀석이 영어와 한글을 번갈아가며 사고해야 할 때 둘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우리 말을 더 능숙하고 아름답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아주 유용한 지침이 될 것 같다. 따라서 최소한 한 권의 값으로 두명의 독자는 확보함으로써 책값은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이 책을 주저없이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혼자만 읽어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지만. 

이 책은 영어사전처럼 책상 위 손닿는 곳에 꽂아두고 두고두고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영어를 한글로 번역 요약하는 것이 업무의 일부분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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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쾌한 성서마저 제각각 해석하여 사이비가 나온다. 그런 고로 허섭스레기 내 글이 오독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지 모른다. 김은정 시인의 <해변의 엘레지>에 나오는 싯구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건 참으로 희망 아닌가'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글의 한계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

나는 고종석, 박노자를 통해 우리문장의 교과서격인 그들도 잘못된 문장을 쓴다는 것을 어설프게나마 들추어내고 싶었다. 으레 꾸지람이 뒤따랐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내 생각에 동조를 하지 않는 건 중요하지 않다. 계속해서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평행선을 달려 보겠다.

김소연 기자가 그래도 '나는 자유롭게' 쓰겠다고 했을 때는 안도했는데, 고종석을 위한 변론으로 가득찬 홍재우 기자의 반론문을 보고는 내가 글을 한참 잘못 썼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역가 이희재 선생이 게시판에다, '함량미달'의 우리말 운동가들이라고 힐난했을 때는, 어떻게 번역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이희재 선생께서 집단화할 수 없는 사람들을 특정집단으로 만들어 함량미달이라고 매도할 수 있는지, 그 의식의 밑바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는 말이야기 글이야기가 호락하지 않을 줄 익히 알고 있다. 몸둘 바 모를 추궁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했지만, 정말이지 게시판에서 업자 티내는 사람들 보면 도처에 창궐한 '마초의지' 앞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무서워라. 업자의식!)

[관련기사]


  • '감염된 언어'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홍재우)

  •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와 박노자의 '오염된' 문장 (서태영)

    "출판사 편집부에는 서태영 기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제법 있다. 이들은 <-적>, <...하고 있다> 같은 표현은 일본식 투니까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맹신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글을 보는 안목이 굉장히 낮다는 거다. 그래서 글을 너무 못 쓴다. 함량 미달이다. 그러면서 주장은 강하다."

    나는 이희재 선생처럼 <-적>이 일본투니까 절대로 써서는 안된다고 맹신한 적이 없다. 나는 <-적>이 불분명한 문장을 만든다고 했지 일본투라서 안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의 공통점이 도출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번역투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제발이지 자기 이름 걸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근거없이 넘겨짚는 버릇은 좀 삼가주기 바란다. 설사 내가 함량미달의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야박하게 나무라서는 안된다. 나는 한글에 관해 족보도 계보도 없고 식견도 부족해서 스스로 '무허가한글악당'이라고 칭하고 다닌다.

    잘난척 할 생각도, 한적도 없으니 괘념치 말기 바란다. 먼저 오해를 덜어내기 위해서 내가 문제삼은 것은 고종석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겠다. 나는 고종석을 우리시대 하나의 문장교본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면서 잘못된 문장교본이라고도 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정확하지 못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홍재우 기자의 글은 시종일관 고종석을 변론하는 글로, 애초에 내가 제기하고자 했던 의도를 비틀어놓았다. 그는 고종석이 옳다는 식으로 반론을 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우리문장의 교과서격에 속하는 두 문사의 글이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고종석이 <감염된 언어> '서툰 사랑의 고백'에서 밝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고 해놓고, 오늘날 입버릇처럼 잘못 사용하고 있는 몇가지 문장 본새를 자신의 문장에 불러들이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노자는 잘못된 교과서의 희생양이라는 식으로 썼다. 교과서가 잘못 되어 있으면 선생이나 학생이나 피차 괴로운 법이다.

    그런데 홍기자는 고종석에 대한 애정을 마치 글쓰기의 기준인양, "고종석에 대한 애정이 엿보임에도 불구하고, 고종석의 책 [언문세설]에 대한 부분적 이해와 불완전한 독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전제를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고종석의 <언문세설>을 인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을 늘어놓는다.

    홍기자는 "언어순수주의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언어가 가장 좋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겉으로는 비록 일제가 그러했듯이 남에게 우리의 언어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폭력적이며 평화적으로 보이지만 우리 내부의 타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차별과 배타주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며, 그 과정은 당연히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넘겨 짚는다.


    아무래도 이건 과잉해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왜 폭력을 거론하는 것일까? 순화의지는 불관용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잡스렇게 섞어놓았다고 자유라면 나는 혼돈의 과잉을 즐기지 말라고 간섭하고 싶다.


    요즘 지식인 사이에 도지고 있는 민족주의 폄하는 온당치 않다. 타고난 운명과 함께 규정되는 민족성을 학자연하면서 턱없이 깍아내리는 풍조는 우리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망발이나 마찬가지다. 왜 좌파경제학자 정운영 선생은 민족경제론을 배려하고 나섰을까? 세계화시대에 되살아나는 민족주의는 배타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는가?

    민족주의 속에 내재해 있는 세계성을 탐닉하지 않고 파시즘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주의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면 그건 대단한 착각이다.

    그러므로 언어순화는 간단하게 말해 '아름답고 정확한 글을 쓰자'는 이상의 권력의지를 동반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진짜 파시즘은 개체성을 거부하고 집체성을 강요한다. 파시즘은 바로 이런 분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파시즘을 아무데나 갖다 붙인다고 그 의미성을 얻는 건 아니다.


    다음으로 "고종석의 글을 평가하듯이 문장을 구성하는 어떤 단어의 순화 정도나 순수성을 갖고 정확성을 측정하는 일은 곤란하다. 서태영 기자가 전가의 보도인양 빼어드는 '~적(的)'이라는 표현도 그 한 예이다. 이 '~적'의 쓰임은 많은 국어학자와 한글운동가들에 의해서 본래 우리말에서 비롯된 표현이 아닐 뿐 더러 표현을 불명확하게 하는 대표적인 예로서 공격받아 왔다.

    사전적 의미로 한자어 뒤에 붙어 '경향'과 '기욺', 그리고 '성질'과 '상태'를 나타내는 이 표현은 사전에 올라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언중에게 폭 넓게 공인 받았다"는 주장은 사전과 교과서도 틀린 부분이 있다는 내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홍재우 기자는 -적을 경향과 기욺, 성질과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언중에게 폭넓게 공인받고 있다고 해놓고선 예를 들어도 통하지 않는 예만 든다. 그런데 지금 남발하고 있는 <-적>이 경향과 기욺, 성질과 상태를 나타내는 뜻으로 모든 문장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전가의 보도로 지적할 수밖에 없는 <-적>마저 "기존의 한국어에서는 불가능했던 문장구조를 외국어의 문투를 빌어 점차 한국어의 표현 방식에 포섭하면서 한국어는 계속해서 풍부해져 가고 있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 황소개구리처럼 문장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바라보는 편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적>자투 문장을 청산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더욱 탄력을 얻어야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적>을 남발하는 문장은 뿌리를 깊숙히 내렸다. 그런 까닭에 글 품새가 상당 부분 볼품 없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 혼란을 경계하자는 것이 언어순화주의라면 옹호할 가치이지 절대로 배격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사 <-적>이 표현상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접미사라 하더라도, 궤도이탈한 표현들이 범람하고 있는 혼돈상태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가령 "세 나라 언어의 차이가 방언적 차이였는가 그 이상이었는가에 대한 논의에도 역사언어학적 논점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논점이 포개져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고종석의 문장은 아름답고도 정확한가? 거듭 주장하지만 <-적>이 들어가 아름답고 정확해진 문장은 없다.

    예를 들면 기형도의 '우리동네 목사님'에 나오는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문장은 얼마나 명징한가. "눈은 가볍다/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내리는 눈은 포근하다"는 김종해의 '눈'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문장인가. '눈'에서 '사랑은 엎어주는 것'임을 갈파한 김화영의 해석은 또 얼마나 근사했던가. 명료함은 지고지선의 문장미학이 아닐 수 없다.

    홍재우 기자도 고종석의 <국어의 풍경들>을 수미일관하게 흐르는 "말의 쓰임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말의 쓰임새에 대한 최종적 심판관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는 것을 동어반복하고 있다.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해도 그냥 괜찮다고 넘어가는 '감염된 언어'는 얼마든지 독소로 작용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러면 천주교 소재 방송극에서 '하나님'이라고 해도 사용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냅둬야 할까? 듣는 사람 처지는 왜 고려하지 않아야 하나? 이렇듯 '감염된 언어'=열린 언어는 불량문장 앞에 속수무책이고 받아들이는 언중을 등한시하는 약점이 있다는 지적을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고종석은 왜 3권의 역저 <감염된 언어>, <국어의 풍경들>, <언문세설>에서 '함량미달의 우리말 운동가들'(?)이 지적한 문제에 대하여 촌평 한번 남기지 않고 지나쳤을까. 고종석의 견해가 무척 궁금해진다.


    한겨레신문 출판사에서 펴낸 우리말글 바로잡이 이수열선생의 <우리글 갈고 닦기>에는 <-의>를 일어직역투라고 조목조목 문제삼고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연구소판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와 신문기사, 방송보도에서 오용 사례를 뽑아 열거하고 있는데, 조선일보 김대중, 한국일보 김승우씨도 올라 있어 그 잘못된 실상을 알만하게 해준다.

    자유 좋아하는 사람들은 귀기울여 주면 좋겠다. 자유는 자유를 구속하는 틀이 있을 때 유의미하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틀이 허술하고 유명무실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지금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방종일 수밖에 없다. 고종석이 말하는 '자유'라고 방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구속이 없는데 무슨 자유의 의미를 부르짖으시나. 홍재우 기자에게는 말의 쓰임새에 대한 최종적 심판관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과 아울러 '그 말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선택권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글을 쓸 때 나름의 원칙은 있어야 한다. 고종석은 한국어를 세겹의 언어라고 나누었다. 나 역시 여진과 몽고, 일본, 중국, 미국의 이름으로 찾아온 말들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 그 원칙은 토박이말을 중심에 놓고 한자말과 외래어를 보완해 쓸 때 '감염된 언어', 차용된 언어는 우리 말글살이에 국적불문하고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감염된 언어'는 해독을 가진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는 <-적>, <-의>, <-등>이 우리문장을 오돌도톨하게 만드는 표현법이라고 꼬집었다.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는 원칙 없이 열렸기 때문에 위험하다. 언중에 의하여 말이 인구에 회자된다는 것도 절반만 맞는 말이다. 오늘날 남발하고 있는 미국말이 과연 언중에 의하여 합의되었기 때문인가? 사정은 그렇지 않다.

    지식인이 앞장서서 우리말과 문장을 훼손하기 때문에 말과 글을 오염시키고 있다. 오늘날 언어유통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신문과 방송, 또 거기에 글을 내다 파는 글쟁이들을 문제삼지 않으면 우리의 언어유통질서는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지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 말과 글은 감염된 게 아니라 중병 들었다.

    많고 많은 문장을 읽었지만 <-적>, <-의>, <-등>이 들어간 아름다운 문장 못보았고 정확한 문장도 만나지 못했다. 이수열 선생의 <우리글 갈고 닦기> 머리말에 나오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영어는 우리말로 들리기도 했다. 우리 말글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그것은 나쁜 국어에 대항하여 싸워가면서 갈고 닦아야 할 미완의 언어이다.

    "현대 영어에는 모방하는 악습이 가득해서, 그것이 추악하고 불분명해져, 그 결과 우리의 생각이 어리석게 되었다. 우리가 이 악습을 버리고 영어를 깨끗이 하면 우리의 생각도 분명해질 것이다. 생각을 분명하게 하는 일은 정치를 하는데 필요한 첫 단추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쁜 영어에 대항해 싸워야 하며, 이 일은 전문 작가만이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어머니의 입을 통해 배운 모국어 가운데는 "제 버릇 개 안준다"는 말이 있었다. 잘못 배운 말과 글은 절대로 개 안준다. 잘못에 대한 각성없이는 계속 엉뚱한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나무란다. 적반하장격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좋은 국어책'이라도 추천하고 글을 맺어야 겠다. 내가 본 책 가운데 가장 우리말글을 잘 살려 쓴 책은 뜻밖에도 신구교가 합작해서 펴낸 <공동번역성서>였다. 무려 2400쪽이 넘는 문장을 이렇게 깔끔하게 만들어놓은 책이 또 있을까? <공동번역성서>는 우리 말글을 잘 살려 쓴 예수족들의 쾌거였다. 좋은 문장은 하늘나라의 말씀을 닮아 있나 보다. 믿거나 말거나,  글쓰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꼭 섭렵했으면 좋겠다.  

    "오늘날 글을 쓰는 사람은 무엇을 쓰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어떤 말로 쓸까 하는 공부를 정말 정신 바짝 차려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모름지기 글을 쓰는 사람은 살아 있는 우리 말로 써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글의 해독을 덜 입은 지난날의 글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이오덕, 글을 왜 쓰나, [우리문장 쓰기]>

    고종석을 변론하지 않더라도 고종석은 건재하다. 고종석이 안고 있는 '옥의 티'를 살짝 건드렸는데,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내 글의 문제의식을 긍정한다. 물론 내가 말하는 순화된 언어 속에는 감염되고 차용된 언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이라야 하리라.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임하지 말라.

    덧붙이는 말: 우리가 김동리와 이어령 선생처럼 명망가는 아니지만 우리 만남이 꼭 그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당혹스럽다. 자주 우리는 곁다리를 잡고 교사가 되려한다. 홍재우 기자 역시 어쨌거나 거기에 진력한 흔적이 보인다. 홍재우 기자의 문장 해석은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써먹었던 '몸성'이라는 말은 푸코와 함께 여성학과 함께 날아오른 철학말이니 사전에 없다는 이유로 타박하면 안된다. '토종병'은 맥락 속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교양부덕'은 오타가 난 것 같다. 교양부족으로 바로잡는다.

    하니리포터 서태영 기자/ rangkae@hanmir.com


    편집시각 2002년07월29일17시20분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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