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 우리 문화 바로 찾기 1
조용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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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연말이다. 한 해를 살면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 보기도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의 일들이 더 궁금해지는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까? 책장에서 명리학에 관련된 책을 다시 꺼내들게 되었다. 알수 업기에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시간들이 이미 태어난 연월일시라는 사주와 팔자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생각하는 명리학에 관한 입문서라고나 할까?

조용헌이라는 강호의 명리학자의 내공이 얼마나 되는지는 직접 대면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주는 높이 평가할 만 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내 사주가 어떻게 되는지도 잘 모르면서 앞으로의 일이나 내 사주팔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순이 될 수도 있지만 많은 실증 등을 통해 맞추고 적중하는 일들을 보면 그 이야기가 또한 그렇게 허무맹랑한 얘기로만 들리지도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숨어있는 많은 은둔자들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은 책장을 넘기는 가속도를 붙이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미있게 읽었을뿐더러 명리학분야의 책을 더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 못지 않게 미래의 일들이 특히 나와 관련있는 나의 미래가 궁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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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요리에 담긴 중국
고광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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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밥은 중국에 가서 먹고 잠은 일본에 가서 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만큼 중국음식이 다양하고 먹을 것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물론 자동차와 의자만 빼곤 무엇이든지 음식재료로 쓴다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 3대 음식 중 하나로 평가받는 중국음식문화를 직접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많은 기대를 했고 음식을 먹어보기 전에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한번도 정통 중국음식을 접해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자세히 분류하고 안내해 놓았기에 이해도 쉬운 편이었다. 북경요리, 사천요리, 광동요리, 그리고 산동요리가 중국을 대표하는 4대 음식문화다. 각각의 특색이 있을뿐더러 음식이라는 것이 기후와 토양, 문화와 떼어 놓고서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고 또한 한번쯤 기회가 닿는다면 먹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작년에 북경에 가서 북경요리를 대표하는 베이징덕과 북경에 들어와 있는 소수민족들이 운영하는 중국식당에서 사천과 광동요리를 맛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책에서 소개된 것 만큼 특이한 것은 별로 눈에 띠지 않았다. 만한취엔시 같은 음식은 너무 고가라서 중국 현지인들조차 접할 기회가 없단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중 하나가 그 지방의 고유 음식인데 중국이라는 나라는 문화가 건축물 등 볼거리 외에도 먹거리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여행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좀 무뚝하고 여유가 없는 것이 탈이기는 하지만....

자장면은 중국음식이 아니란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화교들이 춘장을 이용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란다. 아마도 상술이 뛰어나고 현지 적응력이 뛰어난 민족이었기 때문에 만들어 질 수 있었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소도시이상 정도의 규모있는 곳에서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중국요리 음식점. 중국에 가지 않아도 중국음식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풍미각. 주인도 화교고 종업원들도 화교들이다. 음식점안에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거나 의사소통을 할 때는 반드시 중국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음식종류나 맛 또한 중국의 그것과 아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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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평전 - 시대를 거역한 격정과 파란의 생애
허경진 지음 / 돌베개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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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왕왕 조선 초기의 삼봉 정도전과 비교가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 또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삼봉은 권문세족에 맞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혁적인 성향의 구상들을 이성계가 가진 무력을 배경으로 실제로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창하는 형식으로 실현을 했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완전한 결말은 맺지 못했지만 조선 초기 국가의 초석을 세우면서 자신의 개혁적인 구상을 광범위한 부분에 걸쳐 심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허균의 경우엔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의 수준에 비해 권력이나 명예로부터 약간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개혁적인 구상을 세우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출중한 학문과 자질을 갖추고는 있지만 관운은 그다지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을뿐더러 그 형제들 또한 그다지 관운이 없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학문적 수준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더 유명세를 탔다는 사실은 그의 사회적 불만에 대한 개혁적인 구상들을 쏟아내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잦은 유배와 굴곡이 많은 그의 인생유전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되고. 서두에 삼봉과의 비교를 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허균의 구상이나 개혁적인 사상들은 홍길동전 등 일부 문학작품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현된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일게다. 태종이 확립시켰던 서얼차별정책 등이 허균의 구상대로 철폐와 개혁이 되었다면 분명 역사는 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미완의 혁명가이자 불운한 지식인이었던 허균의 삶이 잘 조명된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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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1 (양장) -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학고재신서 31
유홍준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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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추사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審美眼이 없어서 歲寒圖의 眞價에 대해서도 비편을 할 정도의 수준도 못 된다. 하지만 완당평전을 읽고 나서 완당을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교해도 그 격이 높으면 높앗지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완당평전을 덮고 난 후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간송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완당특별전을 힘들게 찾아 갔었고 봉은사 版殿 현판과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 제주도 대정에 있는 추사적거지까지 가급적이면 완당의 발자취를 따라 다녀왔다. 물론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까지도.

완당의 발자취와 숨결을 따라 다닐수록 확실해지는 한 가지는 인간적으로 완당은 참 불행한 사람이었음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문과 금석학에 대한 지식이나 추사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완성할 정도의 일가를 이룬 재주, 임금에 대한 충성 등 그 어느 것 하나 최고가 아닌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은커녕 인생의 절반이상을 유배생활로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서화나 저작들은 그런 불행했던 환경으로 인해 더욱 빛을 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심으로 그 열정에 고개가 숙여진다.

알려진 바로 가장 末年作이라는 판전 현판을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올려다보고 난 후의 느낌은 불행했던 완당이었지만 그 뒷모습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완당은 판전 속에서 살아 있는 듯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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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 푸른역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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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신분사회에서 살지언정 내 출생이 미천하고 어머니의 신분이 평생 족쇄처럼 따라다닌다고 해도, 왕권이라는 권력의 맛이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이는 悖倫을 범하지는 못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사도세자나 영조에 대한 내 생각은 이 정도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前無後無한 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게 된 사건의 顚末을 파헤친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생각하게 됬다.

하늘보다 높다는(?) 지아비를 자신의 親庭을 위해 죽음으로 몰고 간 혜경궁 홍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세자의 목숨도 파리목숨처럼 만드는 신권이 강력했던 나라가 조선이었으며 부자지간의 연도 당파 앞에서는 無用之物이 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역사나 국어시간에 영조는 蕩平策을 써서 정치를 안정시키고 치세기간도 가장 길었던 왕으로, 혜경궁 홍씨는 언문으로 한중록을 지은 賢母良妻로 미화시켜서 가르치고 있지 이복형인 경종을 疑問死시키고 남편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여자라는 사실은 말하고 않고 있다.

역사는 피해자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때 그 상처가 아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릴 적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生父를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정조가 정치적인 보복보다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튼튼히 하는 한편, 아버지의 정적들이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동지였던 신하들 견제하였다. 그것을 기반으로 화성을 축성하고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였으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 수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조 또한 석연치 않은 한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지만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은 조선의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조선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에 의해 차츰 망해갔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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