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고전 다시 꺼내보기]저 멀리 그리고 다시 바로 곁에 <어린 왕자>


“언제고 여러분이 아프리카의 사막을 여행하게 되면 그 풍경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혹시 그리로 지나가게 되거든 제발 부탁이니 서두르지 말고 바로 그 별 밑에서 조금 기다려보기 바란다! 그때 만약 어떤 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온다면, 만약 그가 웃는다면, 만약 그 아이의 머리칼이 금발이라면, 만약 묻는 말에 그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가 누군지 곧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거든 제발 부탁이니 나를 이토록 슬퍼하게 버려두지 말고 그가 돌아왔다고 빨리 편지해주기를….”(<어린 왕자>의 마지막 대목)

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어린 왕자들
인터넷에서 ‘어린 왕자’를 검색해 본다. 당장 우리 사회 곳곳의 어린 왕자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같은 이름의 영화와 펜션, 극단, 카페, 치과, 캠프 등등. 심지어 연인들이 함께 끼는 커플 반지까지 각 분야에 무수히 핀 어린 왕자들. 어린 왕자는 어느새 우리 일상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사라지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늘 함께 하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바로 어린 왕자다.

<어린 왕자>는 프랑스 작가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의 작품. 20세기가 낳은 최대의 고전으로서 전세계 160여 개국에서 번역돼 1억 부 이상 판매되었다. 이를테면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다수 언어인 영어와 독일어, 아랍어, 인도어, 중국어, 일본어 등의 번역본이 이 시간에도 계속 팔리고 있다.

여기에 소수 민족 언어인 필리핀 섬의 타갈로그어, 쿠라사오의 파리아멘토어, 페로에섬의 패뢰스크어, 옛 유고슬라비아 땅의 시페테르어, 이탈리아 땅의 프리울랑어, 스페인 땅의 아라곤어, 스위스 땅의 쉬르실방어, 에콰도르의 치쿠아어, 여기에 인도의 수많은 토착어들인 테루구어, 마라티어, 펜자비어, 타물어, 말라야람어 등, 최근에는 남부 아프리카의 쇼사어 번역까지 나왔단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진작부터 번역본이 나왔다. 대략 지금까지 200군데가 넘는 출판사들에서 중복 출판하여 어느 출판사의 번역본이 정확하고 문학성이 높은지 따지기 곤란할 정도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나온 문학동네 출판사의 번역본을 기본서로 삼는다. 옮긴이는 미려한 우리말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원로 불문학자 고려대 김화영 교수다.

<어린 왕자>의 줄거리는 너무나 간단하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가 어린 왕자를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동화라고 종종 불린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종잡을 수 없도록 다양하고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함축적인 텍스트다. 아주 편안하게 읽을 수도 있지만 절대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상징적인 언어 예술이다. 세계 곳곳에서 <어린 왕자>가 끊임없이 읽히는 지금, <어린 왕자>는 이제 뛰어난 한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넘어서서 전세계 독자들의 귀중한 보물이 된 것이다.

어린 왕자가 환갑을 맞이했다고?
지난해 프랑스 전역은 <어린 왕자> 출간 60주년 행사들로 떠들썩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올해는 <어린 왕자>가 ‘환갑(還甲)’ 되는 해다. 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나? 서로 다른 탄성이 나올 수 있지만 결국은 그 우수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이전에 이미 세상에 나왔다. 정확히 말해서 <어린 왕자>는 1943년 3월 뉴욕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3년 전에 발간된 영어판 제목은 ‘The Little Prince.’ 하지만 미국 출판사와 원래 계약 출판사인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 사이의 저작권 협의가 쉽지 않았던 데다가 전시 중에 종이품귀 현상까지 겹쳐서 결국 프랑스에서는 1946년 4월에야 <어린 왕자>가 서점에 배포되었다.

결국 <어린 왕자>는 1946년 아니 1943년, 그것도 프랑스가 아닌 미국의 뉴욕에서 먼저 발표된 작품이다. 다시 말해 작가 생텍쥐페리가 프랑스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린 왕자>를 발표한 장소는 프랑스가 아닌 미국의 뉴욕이요, 사용한 언어 또한 영어였던 것이다. 처음 나온 프랑스어 판본과 다시 3년 뒤 프랑스에서 나온 판본(물론 프랑스어)은 내용과 장정 등이 약간씩 다르다. 물론 영어본 또한 이들과 다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린 왕자>는 무엇이 정본인지, 그리고 환갑을 지났는지, 아직 지나지 못했는지 다시 따져보아야 하리라.

<어린 왕자>는 어린이 그림책?
<어린 왕자>에는 저자가 직접 그린 삽화들이 가득하다. 이는 어린 왕자의 다양한 행동과 풍요로운 모습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놀라운 것은 이 책을 읽다 보면, 글에서 글로 이어지며 그림이 덧붙는 책이라기보다는 그림에서 그림으로 이어지며 글이 뒷받침해주는 책이라는 점이다.

즉, <어린 왕자>의 삽화들은 보조적인 장식이 아니라 글 전체를 이끌어가는 결정적인 척추와 동력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린이 그림책일까? 일단 <어린 왕자> 집필 당시의 상황과 저자의 말을 따져보면 명백히 어린이용 동화다.

<어린 왕자>는 1942년 미국 어린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주문 생산된 작품이다. 생텍스(생텍쥐페리의 애칭)가 그때 미국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그의 출판사, 에이전트, 번역자가 강권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어린 왕자>는 그림과 함께 일종의 기분 전환과 자신의 생각을 숨겨서 표현할 수 있는 감정발산의 기회였다. (올리비에 다게의 말, 28쪽, <어린 왕자를 찾아서>)

이 어린 녀석 말예요. 이 아이의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요? 어린이용 책으로 말입니다. 1942년 크리스마스이전에 책을 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요. (생텍쥐페리의 말, 32쪽, <어린 왕자를 찾아서>)

무엇보다도 <어린 왕자>의 맨 앞에 붙은 헌사(獻辭)는 가장 손쉽게 들 수 있는 근거다. 헌정 대상은 ‘레옹 베르트에게’라고 밝혀져 있는데, 그는 생텍쥐페리보다 실제로 20살 이상이나 연상이었다. 생텍쥐페리는 계속 말한다. “책을 어떤 어른에게 바치게 된 것을 어린이들이 용서해주었으면 한다.”(5쪽)

이어서 생텍쥐페리는 레옹 베르트가 현재 “춥고 배고픈 처지에 놓여 있다”며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고 밝힌다. 한마디로 어린이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어른에게 바치는 책이 바로 <어린 왕자>다. 결국 이 책은 어린이는 판매 대상이지만 헌정 대상으로 볼 때 어린이가 독자라고 보기 어렵지 않냐는 의문에 이른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의미 담아
실제로 <어린 왕자>는 대단히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대목들을 많이 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린이에 걸맞은 동화와 그림 같지만 사실은 이해하고 공감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학생들에게 읽게해 보아도 대체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 수준에서는 <어린 왕자>를 읽으면서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식의 반응이 많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읽어도 제대로 쉽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 이 책이다.

어린 왕자가 많은 꽃들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난 대목만 해도 그러하다. 작가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묘사한다.

어린 왕자는 자신이 몹시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의 꽃은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고 늘 그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정원 한 곳에만 똑같은 꽃이 오천 송이나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내 꽃이 이걸 보면 무척 속상할 거야…’, ‘아마 기침을마구 해대며 창피한 꼴을 면하려고 죽는 시늉을 할지도 몰라. 그럼 나는 그를 간호해주는 척해야겠지. 그러지 않으면 내게 죄책감을 주려고 정말로 죽어버릴지도몰라…’(95쪽)

<어린 왕자>가 단지 동화라면 이러한 대목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을 몹시 불행하게 느끼는 어린 왕자는 보아뱀에게 먹힌 코끼리를 단박에 알아보는 통찰력 빛나는 작품 초반의 모습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단지 자신의 꽃이 예전에 한 말이 ‘사실’과 다르다고 깨닫게 되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 때문에 자신을 몹시 불행하다고 느낀다니? 다시 말해, 눈에 안 보이는 ‘본질’을 통찰하는 현자가 눈에 보이는 ‘사실’이 다르다고 불행하다고 느낀다니?

그리고 어린 왕자는 이런 생각도 했다. ‘난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진 부자인 줄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가진 꽃은 겨우 평범한 장미꽃이군. 그리고 기껏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화 산 세 개 그중 하나는 영영 꺼져버렸는지도 모른데, 그 정도 가지고는 대단한 왕자가 되긴 틀렸어…’ 그래서 그는 풀밭에 엎드려 울었다.(95 ~96쪽)

한술 더 떠서 어린 왕자는 화가 났는데도 곧바로 이렇게 말하며 걱정한다. 자신의 꽃이 “이걸 보면 무척 속상할 거야”, “창피한 꼴을 면하려고 죽는 시늉을 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자신은 “간호해주는 척 해야 하겠지” 심지어 자신의 꽃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주려고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대목은 사뭇 강박적인 심리의 일단까지 비쳐진다.

<어린 왕자>를 번역하고 함께 해설판 <어린 왕자를 찾아서>를 펴낸 김화영 교수는 이 대목을 생텍쥐페리의 ‘화려한 여성 편력’과 연관시키며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어린 왕자가 다른 장미꽃들을 만나게 되는 장면(제20장)은 생텍쥐페리가 결혼한 뒤 많은 다른 여성들과 지속한 애정관계들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저명한 작가요 비행사인 생텍쥐페리의 곁에는 아내 콘수엘로 못지않게 오랜 동안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인 르네 드 소신느, 파리 문단과 재계에 영향력이 큰 넬리 드 보귀에, 미국의 여기자 실비아해밀턴 등 내밀한 친분관계인 여성들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수많은 여성 애독자와 추종자들이 화려한 꽃밭을 이루곤 했다. (48쪽, <어린 왕자를 찾아서>)

그의 부인 콘수엘로 역시 작가였다. 그녀는 중남미의 유명한 문인의 미망인으로서 생텍쥐페리와 결혼하였는데 콘수엘로가 쓴 책 중에 <장미의 기억>은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꽃인 ‘장미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어린 왕자>의 꽃은 아무래도 작가와 작가 부인의 관계, 나아가 작가의 여성 편력이라는 개인사적인 차원에서 따져야 더 공감이 간다.

어린 왕자의 슬픔과 ‘한(恨)’

번역은 반역이라고 한다. 그만큼 제대로 원래의 뜻을 고스란히 전해주기란 어렵다는 한계를 지니는 작업이 바로 번역이다. 하지만 번역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낮춰 보거나 멀리 할 수는 없다. 번역이 없다면 서로 간의 문화가 오고가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16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번역의 의의와 역할을 충분히 깨닫게 해 준다.

번역한 글의 맛이 어떻게 다른지는 물론 해당 외국어들을 능통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잘 알 것이다. 거꾸로 말해 일반인들은 각 나라 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는 의미와 정서의 차이를 쉽게 간파하기 어렵다. 더구나 <어린 왕자> 자체가 이미 판본이 다양하여 의미가 미묘하게 다를 듯싶으니 각 나라 번역본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음미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영어본을 택할지 프랑스어본을 택할지도 선뜻 결정하기 힘들다.

어느 판본이든지 <어린 왕자>를 필자 스스로 직접 번역한다면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정서라는 ‘한(恨)’을 꼭 담아 보고 싶다. <어린 왕자>를 읽다보면 잔잔하게 깔려오는 슬픔, 삶의 굴레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에서 오는 애잔한 슬픔, 통곡할 정도의 처절한 슬픔은 아니지만 우리들 가슴에 시나브로 스며오는 인간 존재의 아득한 숙명 같은 것이 느껴져서다.


여기서 <어린 왕자>의 마지막 삽화를 떠올려보자. 아주 완만하게 둥근 줄 두 개가 살짝 포개지며 사막의 무한 수평선을 그리고, 다시 그 위로 별 하나가 외롭게 떠 있는 풍경. 지상과 천상의 중간에 아무런 존재도 없는 허적(虛寂). 모든 것이 다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는 세계.

이는 바로 전의 삽화에서 어린 왕자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뒷모습이 정지 상태로 나온 장면과 어울려 세계의 한계 속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존재의 비극적 숙명을 암시하는 <어린 왕자>의 최고 삽화다. 나는 두 개의 선과 하나의 별이라는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무한한 정서의 울림으로 다가오는 삽화를 그려보곤 한다.

아, 절대 고독과 인간 숙명의 한계 속에서 끊임없이 방랑하고 모색하는 존재, 작가 생텍쥐페리 아니 우리들 모두의 상징이 바로 어린 왕자가 아닐까. 어리고 순수하며 본질적이며 천상적인 존재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약하면서도 강하고, 사라지면서도 영원한 인간 존재 공통의 바람이 아닐까.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최근에 나온 <사막별 여행자>(무사 앗사리드, 신선영 옮김, 문학의숲)을 적극 권한다. 별과 모래뿐인 사막의 소년, 투아레그족 출신인 저자가 소년 시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우연히 읽고 자신과 같은 어린 왕자들이 아직 사막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생텍쥐페리를 만나러 프랑스에 가는 실화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바꾸는가, 그리고 변화한 그가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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