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본 성서
이진희 지음 / 쿰란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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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유대 배경에서 쓰여진 유대인들의 책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구화되면서 오랫동안 성경은 서구인의 관점으로만 해석되어왔다. 유대배경을 이해하고 유대인의 관점으로 해석되어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도 말이다.

그동안 이진희 목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노고와 헌신으로 이루어진 '유대적 관점으로 성경읽기'의 도움은 오해와 오역의 무지함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본서는 성서 지리와 고고학의 관점에서 복음서를 본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성서를 실감나게 읽으려면 성서 지리를 알아야 한다. 성서 지리를 모르면 성서를 막연하게 상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는 성서가 실감나게 읽혀지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서의 현장에 가보는 것이다. 본서는 이진희의 안내로 떠나는 복음서 현장학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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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6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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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린.빌 하이벨스 / 두란노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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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자들은 매사에 보수를 외치다가도 교회성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파렴치함은 신앙과 윤리의 불일치로 교회전체를 물들이고 있다.

우리는  "본질엔 일치를, 비본질엔 자유를!"이라고 말했던 리처드 백스터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변치 않는 진리인 복음을, 변화무쌍한 시대에 다양하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원리이자, 정통 기독교의 전통이다. 한 때 맥처치(Mcchurch)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수없이 이단으로 몰렸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가 이제는 전세계 교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사실의 증거이다.

린 하이벨스가 기록한 1부는 '교회의 역사'를 여성스러운 디테일로 설명한다. 수많은 아픔과 눈물과 열정으로  세워져간 교회의 역사는 성장이 갑작스러운 요행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현장의 사역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린의 글을 결코 깊이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빌 하이벨스가 기록한 2부는 역동적이다. 그의 열정과 깊은 헌신은 수많은 장애를 극복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현장감 넘치는 믿음과 헌신은 독자들의 믿음과 헌신을 재점검하게 한다. 전쟁터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은 전쟁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이야기 할 수 없다. 빌은 전쟁터에서 겪은 생생한 전쟁담을 소화된 언어로 독자들에게 생새하게 설명한다.

이제 시대는 교파와 교단과 이해관계를 넘어 복음의 진정성으로 본질을 추구하는 새로운 교회를 원하고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분명코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는 새 부대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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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교회론 - 교회의 DNA를 말한다
박영철 지음 / 요단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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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교회의 본질을 고민하고, 진정한 인간변화로서의 성장을 모색하는 목회자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 단순한 방법론이나,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을 찾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기능을 멈춘다. 혹시 그러한 의도로 이 책을 읽거나, 읽었다면 잘 못 읽은 것이다.

"셀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 회복을 위한 노력이며 하나님께서 창세부터 마음에 품으셨던 교회의 실현을 위한 노력의 결정체다" 저자의 확신은 독자에게 울림을 남긴다. 20년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은 거부하기 힘든 무게로 다가온다.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저자의 목소리는 더 크게 울린다. 방법론으로서 셀교회가 아니라, 본질회복과 진정성 회복으로서 셀교회론은 매우 성경적이며 한편 효과적(?)이다.

"현대 그리스도인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과의 차이는 분명코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 즉 복음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그에 따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의 차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이해의 차이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라이프스타일 뿐 아니라 교회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저자의 지적은 적확하고 적실하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복음의 본질, 그리스도인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제자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역자라는 '전신자사역론'은 더 굵은 목소리로 독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3-4부에서 다루고 있는 셀교회의 실제는 본질은 하나이지만 적용은 다양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다양한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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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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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불신....불만....그리하여 몹시 불편하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은 어느 정도 나를, 내 선배와 친구들을, 내가 아는, 내가 알아온 남성들을 닮아 있다. 그러나 재미있게 읽힌다. 읽고난 후엔 지독하게 슬프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지만 슬프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현실 해석은 솔직하지만 감동적이지 못하다. 기형도의 그로테스크함이 획득한 미학적 가치, 즉 독자가 공감하는 아름다운 슬픔에 비하면, 그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지저분하고 더럽다. 하긴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하는 것도 소설가의 임무이긴 하다.

백지연의 말처럼 김영하의 소설은 일상인의 초월 욕구와, 그것을 기만하는 현실 사이에서 튕겨져나오는 삶의 아이러니컬한 에피소드들을 환각적 탈주의 형식으로 포착한다. 그리하여 그의 주인공들은 비루하다. 현실을 극복할 수 없는 그들의 공간은 불륜과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슬프다. 몹시 슬프다.

한편 김영하의 소설은 매우 회화적이다. 그의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포르노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불륜행각을 벌이는 싸구려 애정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베스트 극장의 코믹한 단편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변혁은 주홍글씨에서 '사진관 살인사건'을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순전히 내 판단이지만 그의 작품들은  어쩌면 우리시대에 유행하는 'B급문화'의연장인지도 모른다. 가볍고 간결하고 흥미로운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것의 영향력은 꽤나 무겁다. 슬프고 무겁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멀미가 난다. 그것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보여주는 현상과 맥이 닿아있다. 그것에 중독된 군상들은 깊이를 상실하고, 허무를 느낄 틈이 없고, 비상구를 찾지도 않는다.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이 구원의 필요성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그것보다 슬픈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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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동생 야고보 유골함의 비밀 - 찬우물 고고학 시리즈 1
허셜 섕크스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찬우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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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특히 초대교회에 대해서 기대보다 훨씬 훌륭한 정보를 많이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의 진실성을 확인하고, 야고보의 역사성과 초대교회의 정황 등을 추적해 보는 흥미를 누릴 수 있었다.

야고보유골함의 발견은 야고보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아울러 야고보서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루터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야고보서를 폄하했지만, 사는 것과 믿는 것의 심각한 불일치를 나타내고 있는 현대 교회에 야고보서의 신행일치는 가장 강하게 선포되어야 할 메시지일 것이다.

1부에 소개된 야고보유물함의 극적인 발견과 그 유물의 진위성 여부를 밝혀가는 과정은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를 주고, 2부의 야고보 이야기는 신약성경의 진정성을 확고히 한다.  예수님의 형제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재자로, 그리고 야고보서의 저자로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야고보의 일대기는 그동안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야고보 이야기를 소상히 밝혀냈다. 천주교나 동방정교의 주장처럼 야고보는 예수님의 사촌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며, 우리가 믿어왔듯 예수님의 동생임이 분명하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야고보유물함의 발견,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  야고보의 재조명에 아울러 야고보서의 메시지도 강하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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