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쿠스 카토(대 카토, 234~149)의 일생은 검소함과 절제, 독설과 자화자찬, 고발과 심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일평생 자력으로 일했고, 검소하게 식사했으며, 수수한 의복을 입었으며, 초라한 집에 살았다. 이러한 모습이 로마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일절 국고에 부담을 지우지 않고, 속주를 통치할 때는 걸어서 여러 도시를 순회하기도 했다. 따라서 속주를 수탈할 필요가 없었고, 그때문에 그곳의 주민들이 이때만큼 로마의 통치를 무서워하고 좋아했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예들이 너무 늙어 쓸모가 없어지면 내다파는 모습을 보고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고결한 정신'보다는 '옹졸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의 연설은 "우아하면서도 힘 있고, 쾌적하면서도 충격적이고, 기지가 넘치면서도 준엄하고, 경구적이면서도 논쟁적이었다." 특히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독설이 그의 특기였다. 수치스러운 삶을 사는 정적에게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보다 더 오래살기를 원한다고 누가 말하면 당신의 어머니는 그것을 기도가 아니라 저주로 여길 것이오."라고 비판했다. 식도락가가 친해지기를 원하자 "나는 마음보다 입천장이 더 민감한 사람과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자화자찬으로 유명했다. 히스파니아 속주를 담당했을 때 야만족 군대에 로마군이 공격당했을 때 켈트이베리족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보상을 약속한 적이 있었다. 정적들이 야만족에게 구원을 요청한 행위를 비판하자, "로마인들이 승리하면 자신들의 돈이 아니라 적군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패배하면 대가를 지불하거나 요구할 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 말하고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내가 히스파니아에서 보낸 날짜보다 많은 도시들을 함락해다오"라고 자찬했다. 테르모퓔라이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격퇴하고는 "내가 적군을 추격하여 베어 눕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내가 로마 국민에게 신세진 것보다 로마 국민이 나에게 신세진 것이 더 크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자랑했다.

그는 범법자들을 고발하고 심판하는 일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정적인 대 스키피우스를 고발하는데 실패하자 그의 동생인 루키우스 파울루스를 고발해 유죄선고를 받게한 후 거액의 벌금을 내게 만들었다. 184년(50세)에 타락한 로마를 대대적으로 정화하겠다는 공약으로 감찰관에 취임한 후에는 많은 원로원 의원을 제명하기도 했다. 그 자신도 44번이나 고발당했는데, "한 세대의 사람들 사이에 살던 사람이 다른 세대의 사람들 앞에서 자기변호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고발은 카르타고에 대한 것이었다. 153년(81세)에 누미디아와의 전쟁을 중재하러 카르타고에 간 카토는 "건장한 전사가 득실대고 엄청난 부가 넘치고 각종 무기와 군수품이 가득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생각에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합니다."라고 연설했다. 그는 카르타고를 몰락시킬 영웅을 예언하고 149년(85세)에 눈을 감는다.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은 소 스키피오(185~129)였고 카토가 예언한 그대로였다. 카토의 차남인 살로니우스는 아들 마르쿠스를 낳았고, 마르쿠스가 소 카토(95~46)의 할아버지다. 소 카토는 카이사르(100~44)에 맞서 마지막까지 공화정을 옹호하다 자살한다. 호랑이는 개를 낳지 않는 법이다.

* 본문에 등장하는 연도는 모든 기원전이다.

<연보>
234년(0세)  투스쿨룸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남.
217년(17세) 한니발이 로마를 침략해 왔을 때 처음으로 군복무를 시작.
214년(20세) 카푸아 전투 참가.
209년(25세) 파비우스 막시무스 휘하(285~203) 타렌툼 전투 참가.
204년(30세) 재정관 취임.
202년(32세) 대 스키피오(236~183)의 재정관으로 북아프리카 파견.
195년(39세) 집정관 취임, 히스파니아 군대 파견.
194년(40세) 티투스 셈프로니우스의 사절로 파견, 트라케, 히스테르 유역 정복.
192년(42세)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휘하 참모장교로 테르모퓔라이에서 안티오코스 3세(241~187)를 격퇴.
184년(50세) 감찰관 취임.
169년(65세) 보크니우스 법안(여성이 상속할 수 있는 재산 제한) 지지.
154년(80세) 카토 차남 살로니우스 태어남.
153년(81세) 현지조사단 일원으로 카르타고 방문시 번화한 모습에 충격,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라는 연설을 반복.
152년(82세) 카토 장남 리키아누스 사망.
149년(85세) 카토 사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M.T. 키케로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이란 드라마의 다른 막들을 훌륭하게 구상했던 자연이 서투른 작가처럼 마지막 막을 소홀히 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네."(5절)

아내와 이혼하고 딸까지 잃은 만년의 키케로(106~43, 63세)는 카이사르의 집권 후 공화국 회복에 대한 희망마저 버린다. 그의 곁에 남은 건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앗티쿠스(110~32, 78세) 뿐이다. B.C.44년(당시 키케로 62세, 앗티쿠스 65세) 노인이 된 친구에게 노년의 즐거움을 알려주고자 책을 헌정한다.

원제는 '대 카토(Cato maior de senectute)'다. 키케로가 존경하는 대 카토(234~149, 85세)의 입을 빌어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노년이 힘겹지 않냐는 소 스키피오(185~129, 56세)와 라일리우스의 질문에 카토는 노년을 불평하는 사람은 노년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추어야할 것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힘든 것이라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카토가 생각하기에 노년에 힘든 것처럼 보이는 것는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만든다. 둘째, 노년은 우리의 몸을 허약하게 한다. 셋째, 노년은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넷째, 노년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며 반박한다. 첫째, 노년에라도 육체적 활동은 둔화될 수 있지만 대신 정치활동과 정신활동은 물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둘째, 노년에 체력이 저하되기는 하지만 절도있는 생활로 늦출 수도 있고 정신활동으로 체력에서 잃은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 셋째, 노년에 감각적 쾌락이 줄어드는 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축복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쾌락에서 해방되어 절제있는 생활을 통해 좀 더 심오한 정신적 쾌락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는 노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있다. 오히려 노년은 젊음이들이 부러워하는 장수를 이미 누렸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 또한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노년은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처럼 바람직한 것이다.

위 내용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장수했던 철학자들과 위인들의 삶을 예로 들며 거침없이 전개된다. 대표적으로 소포클레스(496~406, 90세), 고르기아스(485~380, 105세), 소크라테스(469~399, 70세), 데모크리토스(460~357, 103세), 이소크라테스(436~338, 98세), 플라톤(427~347, 80세) 등은 지금 기준으로도 장수했고 그 때문에 유명해졌다고도 생각될 정도다.

키케로가 하고 싶은 말은 책 속에 숨겨져 있다. 키케로와 카토는 귀족계급 출신이 아니었지만 로마 최고의 웅변가라고 불릴 정도의 연설 실력을 바탕으로 원로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런 그가 카토를 대변인으로 내세운 것은 납득할만 하다. 작중 카토는 84세다.(32절 참조)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을 쓴 1년 후인 B.C.43년, 키케로도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 살해된 후 포룸 로마눔의 연단에 머리와 손이 효시된다. 이 책은 키케로의 유언장이자 예언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르마니아 범우문고 223
타키투스 지음, 박광순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타키투스(55~120)는 네르바(재위96~98)에서 트라야누스(재위98~117)로  황제가 바뀌던 97~98년(42~43세)에 89년 벨기카 갈리아 속주의 군단장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게르마니아'를 집필했다. 로마의 계속되는 게르마니아 원정의 목표는 갈리아 지역 정복을 완료한 후 라인강과 도나우강 너머 게르마니아 지역까지 정복함으로써 경계선을 공고히 구축하려는 의도와 함께 로마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 다르게 로마의 게르마니아 원정사는 피로 물들어 있다.

B.C.113년 집정관 카르보는 노레이아에서 대패해 추방당한 후 자살했다. B.C.107년 집정관 카시우스는 제네바 호반에서 싸우다 전사했고 전군이  포로가 되었다. B.C.105년 집정관 카이피오, 아우렐리우스, 말리우스는 아라우시오에서 대패해 12만 명이 사망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사로잡혀 보이오릭스에게 살해당했고, 카이피오는 귀환했지만 유죄를 선고받아 처형당했고, 말리우스는 두 명의 자식을 잃고 유죄판결을 받은 후 망명했다. 9년 바루스는 테우토부르크에서 아르미니우스에게 3개군단(18,000명)과 함께 전멸당했다. 물론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가 그 본토에서 그들을 패배시키도 했지만, 로마군도 많은 타격을 입었으니 온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게르마니아가 강한 이유에 대해 관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고 타키투스도 이러한 관심을 충족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 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그는 부와 향락에 물들어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로마를 금전에 물들지 않고 용맹하고 자연에 순응하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여러 게르만 부족들과 비교하면서 로마의 현재를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책은 게르마니아의 기원, 영토, 습속, 여러 부족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게르마니아인이 어떤 부족과도 닮지 않은 순수한 혈통이라는 부분에서는 히틀러의 아리아인 찬양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여러 유럽 지역의 기원이 되는 부족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서로마제국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수에비족, 고토네스족(고트족), 랑고르바디족, 보헤미아의 기원이 되는 보이족, 에스토니아의 기원이 되는 아이스티족, 스웨덴의 기원이 되는 수이오네스족 등이 그들이다.

그렇다면 대체 게르마니아인들이 로마만큼 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의 군대는 가족이나 씨족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부모, 여자, 아이들이 곁에서 지켜보며 한탄하거나 응원하는 가운데서 싸웠기 때문에 가장 용감한 군대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군대를 만들면 서로에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싸우기 때문에 용감한 군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게르마니아의 군대가 바로 그런 군대였으며 로마는 그들을 끝까지 굴복시킬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성서 시공 아크로 총서 8
존 보커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성서 공부를 풍부한 도판과 충실한 해설로 도와주는 성서입문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왕실의 탄생 살림지식총서 86
김현수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유럽 왕실의 탄생 과정을 세 나라의 경우를 통해 보여준다. 유럽왕실 성립의 전제조건으로 '봉건제'와 '로마가톨릭'을 들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프랑크 왕국을 통해, 잉글랜드는 헤이스팅스 전투를 통한 노르망디 대공 윌리엄을 통해서 이들 제도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간략하게 다루어지고 후자에 많은 부분을 할당하여 잉글랜드 왕실의 뿌리찾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삼분되었던 프랑크 왕국은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서프랑크(프랑스), 동프랑크(독일)로 양분된다. 프랑스는 권력 투쟁 끝에 루이 5세(재위986~987)로 카롤링거 왕조가 막을 내리고 갈리아계 귀족인 위그 르 그랑의 아들 위그 카페(재위987~996)가 즉위하면서 카페 왕조(987~1328)가 시작된다. 독일은 카롤링거 왕조의 루트비히(재위899~911)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자 게르만 부족들이 회의를 통해 왕을 선출한다. 프랑켄 부족 대공인 콘라트 1세(재위911~919)를 거쳐 작센 부족 대공인 하인리히 1세(재위919~936)가 즉위함으로써 작센 왕조가 성립한다. 뒤를 이은 오토 1세(재위936~962, 962~973)는 교황 요한 12세(재임955~963)를 도와 서로마 황제가 되면서 동프랑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성로마제국 시대가 시작된다.

영국 왕실의 탄생은 843년 켈트족의 후손인 케니스 1세의 스코틀랜드 왕국 성립 시기와 1066년 노르망디 윌리엄 대공의 잉글랜드 정복 시기 사이에 논란이 있지만, 저자는 봉건제와 로마가톨릭이 공고해진 후자를 영국 왕실 성립 시기로 전제한다. 1066년 잉글랜드 웨섹스 왕실의 에드워드 2세(참회왕, 재위1042~1066)가 후사가 없는 상태로 죽으면서 웨섹스의 실권자인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 2세를 왕위에 지명한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가 생전에 외사촌인 노르망디 대공 윌리엄에게 왕위를 약속한적이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해 손수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윌리엄(1027~1087, 당시 39세)은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장애물들을 모두 정리한다. 먼저 교황 알렉산더 2세(재임 1061~1073)에게 전투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교황의 깃발과 베드로의 머리카락이 담긴 반지를 획득한다.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재위1060~1108)는 윌리엄의 외조카로 지원받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 후 멘, 브르타뉴 지방은 정복하고, 볼로뉴, 신성로마제국, 스칸디나비아 제국과는 동맹관계를 맺어 후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반면에 해럴드(1021~1066, 당시 45세)는 저돌적이며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로 섣부른 공격보다는 적과의 접경지역을 탄탄하게 방어하여 적들을 고사시키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는 방식을 선호했다.

양국의 군사력은 윌리엄의 노르만군은 총 7,500명 정도로 기병 2,000명, 중장보병 4,000명, 궁병, 석궁병 1,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럴드의 잉글랜드군은 총 8,000명 정도로 평민계층인 퓌르드 6,500명, 왕의 직업군이자 용병인 하우스칼, 왕의 직속군인 테인 1,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궁병이 거의 없었는데 화살도 품질이 떨어져 노르만군이 쏜 화살을 주워쓰기도 하였다. 하우스칼과 테인은 기병이었는데 이동중에만 말을 탔고 공격할 때는 말에서 내려 싸웠다.

1066년 해럴드는 대우에 불만을 품고 북쪽으로 칩입한 동생인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인 호르로데 연합군을 막고 있는 사이 남쪽으로 윌리엄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윌리엄은 바다를 건너 런던으로 가는 요충지인 헤이스팅스에 진영을 구축하고 북쪽의 침입을 힘겹게 격퇴한 해럴드와 대치하게 된다. 전투 초기 해럴드는 방패-벽 전술(보병의 방패를 겹칩으로써 탄탄한 인간방벽을 만드는 전술)로 윌리엄의 선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윌리엄이 말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등 노르만군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해럴드의 기병들은 방패-벽을 뚫고 나가 그들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한다. 이 때 윌리엄은 방패-벽을 무너뜨릴 힌트를 얻는다. 거짓으로 공격과 도주를 반복하면서 잉글랜드군을 유인해 섬멸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전투가 계속되는 사이 많은 수의 잉글랜드군이 죽자 방패-벽이 헐거워진다. 헐거워진 방어벽 사이로 궁수들의 공격이 가해지고 마침내 방패-벽이 무너진다. 전투 중에 해럴드는 눈에 화살을 맞고 허벅지에 칼을 맞아 사망한다.

윌리엄은 헤이스팅스의 승리를 발판으로 런던까지 진입해 윌리엄 1세(정복왕, 재위1066~1087)로 즉위한다. 그 후 계속되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노르만 왕조의 잉글랜드 왕국은 안정기에 들어선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실의 탄생과 관련된 의문점은 남아있다. 노르만 왕조가 잉글랜드 왕실의 기틀을 마련했다면 기존의 앵글로-색슨 웨섹스 왕조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따라서 두 왕가가 결합한 플랜태저넷 왕조의 등장을 거쳐 왕실 내에서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주된 언어로 사용하게 된 에드워드 1세(재위1272~1307) 때야말로 명실공히 잉글랜드 왕실의 정통성이 확립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