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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를 읽고


 

p. 138 - 이 책 역시 헌 책으로 산 건데, 책 앞 장에 군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전 주인이 군대에서 이 소설을 읽은 모양이다. 그런데 138페이지에는 밑 줄을 그어 놓았다. 나 역시 납덩어리를 녹인다는 표현이 너무 멋져서 몇 번이고 읽었다. 이 책 왜 팔았을까. 군대에서 읽은거면 의미 있는 책 아닌가. 


  p. 196 - 여기에서 파울이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는 '그런 일' 이란 바로 오줌이 마렵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그게 뭐라고. 결국 옆에 있던 친구 알베르트가 대신 말해주는데 간호사가 큰 거냐 작은거냐 묻고 그 질문을 들은 파울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된다. 모든 장면이 절망적이고 우울한 이 책을 통틀어 유일하게 귀여운 장면이다. 결국 파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은 거라고 대답하고, 간호사가 그럼 침대 밑으로 내려올 필요도 없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병 하나를 건내 준다.


P.S 1. 이 책은 전쟁영화 같은데서 보이는 허세나 미화가 전혀 없어서 좋았다. 가끔 전쟁 영화에서 그런 거 있지 않나. 만든 이가 남성성에 취해 흡사 '어때 이렇게 싸우는 우리 강하고 멋지지 폼나지?' 라고 말하는 듯한 장면이나 대사. 이 책은 그런 거 전혀 없다. 역시 진짜 전쟁을 경험한 자는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 법이다. 2018년에 이거 영화화 되는 거 같은데 (이미 아주 오래전 영화화 된 적 있지만) 궁금하다. 어떨지.


P.S 2. 이 책 교정 교열 엉망인 걸로 악명 높던데, 난 번역이 왜이러지 좀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막 화날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다시 읽어보긴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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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을 읽고


P.S 1. 단편 소설집 독후감 제대로 쓰려고 맘 먹은 건 처음인데 너무나 어렵다.. 7월에 읽어놓고 이제서 쓰는 이유도 도저히 어떻게 써야할 지 감이 안잡혔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구려 구려.


P.S 2. 요즘 구글에서 작가들의 실제 삶에 대해 찾아보고, 사진 보는 데 재미가 들렸다. '벨중족의 혈통' 을 읽고 너무나 큰 충격에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 대해 찾아봤는데, 토마스 만의 누나 둘은 자살했고, 토마스 만의 첫째, 둘째 아들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건 동성애자에 가까운 양성애자였던 토마스 만이 자기의 첫째 아들을 보며 느꼈던 감정을 적은 일기였다. 그의 일기에는 14살된 자기의 첫째 아들이 끔찍할 정도로 잘 생겼고, 수영복을 입은 클라우스의 몸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아아... 자기 아들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다니.


P.S 3. 어떻게 생겼길래 토마스 만이 Terribly handsome 이라고 썼을까 궁금하여 클라우스 만의 사진을 찾아봤는데, 과연 잘생기긴 했더라..

P.S 4. 토마스 만 사진을 보면 옷을 참 잘입는 양반이었단 생각이 든다.


P.S 5. 내가 산 헌책에서 담배냄새가 너무 너무 많이 나서, 나중에는 결국 전자책 사서 전자책으로 읽었다. 겉보기에만 새책이고 냄새는 새책이 아니었다. 아니 전주인은 대체 이 책 보면서 담배를 얼마나 많이 핀건지!


P.S 6. 이탈리아 감독 '루치노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에서 타지오역을 맡은 '비요른 안데르센' 사진을 찾아보며 소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그의 외모에 놀랐다. 소설에서 타지오의 치열이 고르지 않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세상에... 그것까지 똑같다!!! 감독이 이 소년을 봤을 때 얼마나 좋았을까!!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닌 듯 비현실적이면서 심술기 있는 표정에 관능미까지. 정말.. 전설적인 외모다. 비요른 안데르센이 없었다면 영화를 완성할 수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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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를 읽고



마지막 지은이 E.M 포스터 의 후기에서




이때부터 클라이브는 점차 타락의 길을 걷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도 차가워진다. 그는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괴롭히고, 그의 메마름과 정치인 같은 태도와 벗겨지는 머리를 강조했다.
p. 316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혼자 깔깔깔 웃고 말았다. 외국에서도 남자가 대머리 되는 건 최악의 저주 중 하나인가보다. 지은이의 말을 보고 E.M 포스터 작가의 사진을 찾아보니 머리카락이 아주 까맣고, 숱도 많으신 편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말씀도 하셨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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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모리스'에 감명받아 읽게 된 E.M 포스터 '모리스'는 무척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E.M 포스터의 책은 처음이지만, 앞으로 그의 소설을 시간 되는대로 많이 읽고 싶다. 모리스가 대학 시절 E.M 포스터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작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한데, 결과적으로 난 작가 포스터도, 인간 포스터도 좋아하게 되었다.

  또 영화에서는 모리스를 버리는 클라이브가 원망스럽고 미웠지만 책을 읽으니 클라이브에게도 동정심이 생겼다. 특히 아래 구절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무도 반듯해서 난 너의 평범한 우정을 오해했지. 네가 나한테 아주 다정하게 대했을 때, 특히 내가 학교로 돌아왔던 날...... 난 그게 뭔가 다른 것인 줄 알았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해. 난 역시 책과 음악 밖으로 걸어나올 권리가 없었어. 널 만나기 전까지 난 그렇게 살았거든. 사과든 뭐든 내게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겠지만, 홀, 진심으로 사과한다. 네게 모욕감을 준 일은 영원토록 나를 슬프게 할거야.」

p. 90


  내가 이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찢어졌던 건, 밑줄을 그은 클라이브의 말에서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난 아직도 책과 음악 밖으로 걸어나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클라이브가 타고난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자를 택하는데 소설에서는 갑자기 남자가 아닌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모리스와 헤어진다는 점이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클라이브의 모델이자 대학시절 포스터가 사랑했던 실존 인물 '휴 매러디스' 도 실제로 이성애자가 되어 여성과 결혼했던건지 궁금하다. 


  남들과 다른 사람들을 흔히 '특별한' 사람 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특별함'이 거대한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모리스 역시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로 인한 두려움에 학창시절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괴로워하며,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혼자 발버둥 친다. 남들처럼 혹은 남들만큼 살고 싶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여 좌절하고 때때로 자신에게 실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모리스의 외로운 분투에 공감하며 진심으로 그를 응원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모리스가 마침내 진정한 사랑인 '알렉 스커더'로 인해 스스로 특별함을 인정하며 누구도 속이지 않고 살기로 다짐하는 결말은  나에게 그 어떤 연애 소설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벅차게 다가왔다.


「클라이브, 넌 참 바보구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난 너야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에 아름다운 사람은 너뿐이야. 나는 네 목소리를 사랑하고, 너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 사랑해. 네가 입은 옷, 네가 있는 방까지, 나는 너를 흠모해」

p. 113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건 어떨까?」

이런 말을 내뱉은 뒤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도 없었고, 죽음 너머의 세계도 알지 못했으며, 집안 망신 같은 것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의 독기에 취해 나날이 더 불행해질 뿐 아니라 더 깊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죽어도 되지 않을까? 그는 자살하는 방법들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고, 실제로 뜻밖의 사건만 없었다면 권총 자살을 감행했을 것이다.

p. 171

그러나 모리스한테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주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철저히 혼자인데, 왜 살아가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아무 데도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은 암울한 예감이 들었다. 죽음도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음도 사랑처럼 그를 힐끗 한 번 바라보고는 그가 <분투하도록> 남겨 두고 돌아섰다. 그는 어쩌면 할아버지만큼이나 오래 분투하고, 또 그만큼 우스꽝스럽게 은퇴해야 할지도 몰랐다.

P. 177

그들의 과거의 책은 책장으로 돌아가야 했고, 여기, 어둠과 죽어 가는 꽃들에 감싸인 여기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렉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는 새것과 옛것이 섞이는 고통을 겪을 수 없었다. 모든 타협은 속임수고 그러므로 위험하다.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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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리스」 잡담
    from 케이의 가지 못한 길 2017-09-06 15:45 
    마지막 지은이 E.M 포스터 의 후기에서 이때부터 클라이브는 점차 타락의 길을 걷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도 차가워진다. 그는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괴롭히고, 그의 메마름과 정치인 같은 태도와 벗겨지는 머리를 강조했다. p. 316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혼자 깔깔깔 웃고 말았다. 외국에서도 남자가 대머리 되는 건 최악의 저주 중 하나인가보다. 지은이의 말을 보고 E.M 포스터 작가의 사진을 찾아보니 머리카락이 아주 까맣고, 숱도 많으
 
 
 


  10년 전 졸업을 앞두었음에도 정규직 취업에 실패한 나는 2007년 2월 1일부터 어느 은행 소속의 연구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아직 비정규직법이 발의 되기 전이라 연구소 내에는 많은 계약직들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는 연구소의 계약직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약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관계가 비좁았던 난 누군가에게 조언 한마디 듣지 못하고 갑자기 사무직 근로자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몰라서 저지른 황당한 일도 꽤 많았던 거 같다. 그 사람들은 날 보면서 아마 '역시 쟤는 여기 있는 우리들보다 질이 떨어지는구나..'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안했는데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연구소의 사람들은 듣기만 하고 실제 접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저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그 곳의 사람들은 다들 악의 없고 친절하긴 했지만 매일 느끼는 그들과 나 사이의 어마어마한 괴리 때문에 난 별안간 슬퍼지기도 했고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향했다. 

  내 업무는 높으신 연구소 분들이 하지 않는 일이었다. 감히 그 분들 손에 더러운 토너가 묻으면 안되니 토너도 갈아주고, 수고롭게 무거운 다과와 음료수를 직접 구매할 수 없으니 지하 매점가서 다과랑 음료수도 사놓고, 우편물도 분류하고, 도서관에 책 반납하고 뭐 그런 일들 말이다. (당시 경험 때문에 난 지금도 복사기, 프린터의 웬만한 고장은 혼자 뚝딱 고치는 편이다.) 난 초등학교 5학년 짜리도 아무 문제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별 불만도 없었다. 말했다시피 자존감이 워낙 바닥을 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지금 하는 일이 나한테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집단에 좀 오래 있다보면 그 곳에 속한 사람들을 분류하게 되고 나름대로 각 집단의 사람들을 정의하며 심지어 가치판단까지 하게 되는 법이다. 나쁜 버릇이지만,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리 된다. 몇 개월 정도 지나니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발견했고,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책상 위에는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피규어가 주르륵 세워져 있었고, 그 사람이 제출하는 직원 복지비로 청구할 도서 구입비 영수증은 대부분 일본 현지에서 산 만화책의 영수증 이었다. 그 직원은 남한테 자기 일을 시키는 법이 없었는데, 워낙 책임감이 투철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남에게 쉽게 부탁을 못하여 결국 자기 혼자 모든 일을 하고 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어떤 종이와 칼을 들고 내 책상에 왔다. 그는 엄청 망설이며 이 프린트물은 자기가 쓴 보고서 설명회 초대권인데 자기는 아무리 해도 똑바로 못 자르겠다며 시간나면 잘 좀 잘라달라고 했다. 종이와 칼을 든 그의 손을 보니 너무 크고 손가락이 둔해보여 예리한 칼질을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시위대를 뚫고 퀵서비스 기사가 건내주는 서류를 들고 오라는 심부름도 아무 문제 없이 수행하던 내가 그 정도 칼질을 못할 리가 없었다. 받자마자 다 해서 가져다주니 그 사람은 너무 황송해 하며 고마워했다. 썩 잘 잘리지도 않았건만 어떻게 이렇게 똑바로 칼질을 할 수 있느냐며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고 나의 칼질 실력에 대해 거듭 칭찬했다.

  그렇게 안면을 튼 뒤로 그 사람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는 그 사람은 다른 연구소 직원들과는 달리 인천 어딘가에서 장사하는 부모님을 두었다는 것과 (그 연구소 근무하는 사람들 아버지는 대학 총장이거나, 국회의원, 어떤 회사 사장이거나, 뭐 기타 등등 이었음) 두번째는 서울대 모과를 수석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지속하지 않고 그 사람 기준으로는 매우 누추한 그 곳에 취업을 한 괴짜라는 것 이었다.

  별 거 아닌 일에 심하게 고마움을 표하고, 내 나름대로 별로라 판단한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그 사람이 계약직 근로자들을 회집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워낙 돈 잘 버는 사람들이고 연구소에 예산이 넘쳐나서 그런 식으로 비싼 밥을 얻어먹는 일은 흔했다. 그런데 그 회식은 다른 때와 달리 마음이 참 편안했다. 내 글쓰기 실력으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연구소의 다른 사람들에게 느꼈던 우리를 향한 은근한 무시 같은 게 없었달까. 기회다 싶어 회집에서 궁금한 걸 물었다.

  "서울대 모과 수석 졸업하셨으면 더 공부해서 교수하거나 재경부나 한국은행도 갈 수 있지 않아요? 왜 여기에 취업하셨어요?"

  "저는 놀고 먹으려고 여기 취업했습니다. 여기 사람들 다 편히 일해요. 한국은행가면 야근하고, 재경부 가면 일 빡세고 공부는 더 하기 싫고, 그래서 전 여기서 놀고 먹으면서 편히 살 거예요."

  연구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국가에 굉장히 중대한 일이며 또 자기네들만이 그런 우아한 일을 할 자격이 있는 듯 행동하고 말할 때가 있었다. 그들은 창구 '애들'이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곤 대출 서류에 도장 찍는 것 밖에 없다며 비웃었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가장 잘난 사람일 수도 있는 사람이 대놓고 연구소 사람들 편히 놀고 먹는다고 하니 어쩐지 통쾌했다. 

  그 해 7월말 난 정규직에 취업했고, 당연하게도 연구소의 사람들 중 그 누구와도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다. 10년 전 연구소 월급 통장으로 만들었던 은행 통장은 현재 엄마 보험금을 관리하는 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며칠 전 보험금으로 가입했던 예금의 만기가 다가와 오랜만에 은행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런데 사이트 게시판에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클릭해서 확인해보니 어떤 보고서였고, 보고서에 적힌 이메일 아이디가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름인 것을 보아 틀림없이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이 쓴 보고서가 맞았다. 이 발견 때문에 그다지 즐겁지 못했던 10년 전을 회상했고, 읽은 지 좀 오래된 체호프의 '바다에서' 라는 단편소설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오히려 가장 고귀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젊은 선원은 를 포함한 동료 선원들이 짐승에 가까운 추악한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배의 선원들은 승객 중 고매해 보이던 영국인 신부나 점잖던 신혼부부의 남편에 비하면 순수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인공인 나는 다른 선원 한명과 함께 신혼부부가 있는 선실을 훔쳐보다 그들의 어떤 행동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엿보기 위해 뚫어놓은 선실 벽의 구멍에서 황급히 눈을 떼버리고 만다. 옆에 있던 선원은 넌 이런 걸 보기엔 너무 어리다며 주인공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간다.


  10년 전 연구소의 그 사람을 보며 느낀 것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는 본인은 지금 놀고 먹고 있으며 나 뿐 아니고 다른 사람도 다 여기서 놀고 먹는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 사람은 보고서를 제일 많이 쓰고 웬만한 일은 혼자서 다 하는 연구소에서 제일 '안'놀고 먹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이트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발견한 뒤 반가운 마음에 10년 전에 연구소에서 잡일을 하던 저에게 친절 배풀어 주신 것 지금이라도 감사드린다고 메일을 보냈다.

  예상했던대로 그 사람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역시 예상대로 너무 친절했다.


사람은 대개 추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이따금 선원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추악하고, 심지어 가장 추잡한 짐승보다도 더 추악해진다. 짐승은 본능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인생을 잘 모르는 내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원들에겐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미워하고 욕할 이유가 많은 것 같다. 언제고 돛대에서 떨어져 파도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 있고, 물속에 빠지거나 거꾸로 떨어질 때만 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뭐가 필요하겠는가?

- p.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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