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렇게 종가라느니 전통,제사,권위,유교 같은 말이 나오면 굉장히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워낙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어린 시절을 보낸 터라(그렇다고 기독교 집안이었던 건 아니다) 전통이 인간을 얽어매는 것, 제사행위의 요식성 이런 것들이 나는 SF소설 속의 이해 못할 외계인의 풍습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결혼해서 제사란 것에 처음 참여했을 때 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 무슨 연극같은 짓이냐....'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 우리의 제례문화를 보존한다는 것 자체는 내가 그것을 아무리 싫어한다 할지라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듯이 여인들의 삶을 파괴시키면서까지, 그래서 결국은 그 여인들에게 끈대고 있는 남자들을 파멸시키면서까지는 아니리라. 그건 그냥 박물관에, 혹은 무형문화재로 보존되어야 한다. 내 생각엔.
그들이 말하는 소위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 그걸 발가벗겨보면 말 그대로 종족 보존의 욕구가 아닌가. 그걸 무슨무슨 유교의 어떤어떤 논리로 포장하여 아주 엄숙한 것으로 꾸며 자신의 삶을 거기 그러매고 여자들의 얼굴에 종주먹을 들이대며 '아들이 아니면 죽음'을 강요하는 그것들이, 짐승보다 나을게 무엇일까?(아, 난 또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말았다) 아들을 사랑하는 여자와 떼어놓기 위해 돈과 권력을 휘두르고, 손자의 핏줄을 임신한 여자의 배를 짓밟고, 며느리가 낳은 손녀를 사내아이와 바꿔치기 위해 갓난아이의 뼈를 부수는 그들에게 '한마리 단정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느니, '꼿꼿함과 유연함이라는 대비되는 양면성이 원래 하나였던 듯 천연하게 어우러져 있었다'는 표현을 난 도저히 아까워서 못하겠다.
물론 이 책은 그런 여성수난사에 대한 처절한 고찰이며 옛전통을 옹호하기 위한 책이 전혀 아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등장하는 저런 표현조차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난 그런 것들이 밉다. 그들에게 저런 우아한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이 겉으로 아무리 학처럼 고고해 보인다 할지라도, '딸을 낳아 대가 끊기면 그길로 자진하여 마지막 열행을 삼도록 하라' 고 말하는 자는 야수에 불과하다.
이 책에 나오는 꼿꼿한 척하고, 고귀한 척 하며, 잔인무도한 어르신들의 말잔치의 마지막에, 남편을 잃고 딸을 낳아 죽어야만 하는 한 여인의 할머니의 처연한 부르짖음만이 우리가 아직 인간임을 증명해준다.
일지성심을 잃지 말 것이며 계집 아해 낳더라도 자진하지 말지라. 소산 팔십 칸 집 어느 그늘에 네 모녀 쉴 자리 없으랴. 계집 아해 낳거든 밤을 도와 기별하면 내 아모제나 업을 아비 보내리니 자진하지 말지라. 애고 내 아해야, 자진하지 말지라
<앞으로 8만 8천 번 윤회하더라도 나무나 돌로 다시 태어날지언정 비잠주복 무엇이든지 암수 나뉘고 어미가 새끼 낳는 것으로는 다시 나지 않고자 하나이다> 여인의 입에서 이런 유언이 나오도록 만든 그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이더냐. 이 책이 픽션이니 현실에서는 그럴리 없다 하지 마라. 요즘도 갓쓴 어르신들이 자식이 어미 성을 따르면 인륜이 무너지는 줄 알고 피켓 들고 모여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