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했다.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25년만인 1994년에 완성하였다. 현대문학 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이 있다.   -책 날개에 소개된 작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하여 25년동안 집필하여 완성하였다는 소설 <토지>를 젊은시절(?) 읽다가 그만두었다. 그만두었다기 보다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느라 잠시 접어 두었는데 그 잠시가 너무 길었나보다. 하지만 이제사 다시 21권이나 되는 긴 책을 읽을 엄두는 나지 않아 그분의 유고시집을 집어 들었다. 물흐르듯 고치지 않고 써내려 가셨다는 시를 읽으니 복잡했던 마음이 잔잔해진다. 시집 뒷편에 실린 사진들도 참으로 자연스러워 좋다.

   
 

천성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 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 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메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메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서
이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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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2-26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됨됨이 참 좋아요.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아 저는 인색한가봐요.....
읽어봐야 겠습니다.

같은하늘 2010-02-27 14:09   좋아요 0 | URL
좋은 시가 참 많아요. 꼭 보세요.^^

순오기 2010-02-2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시예요.
이분의 삶도 존경스럽고...원주, 지난 여름에 갔다 왔어요. 바로 저곳에...

같은하늘 2010-02-27 14:11   좋아요 0 | URL
저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공원 꼭 가보고싶어요.^^

꿈꾸는섬 2010-02-2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한지가 벌써 한참이나 되었는데 여직 못봤네요. 너무 좋아요.^^

같은하늘 2010-02-27 14:11   좋아요 0 | URL
저도 마음만 먹고 있다 눈에 띄길래 꺼냈어요.^^
정말 좋은 시가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