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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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호 작가의 신작 성장소설인가 했더니, 30년 전에 출간된 작품을 리라이팅(Rewriting : 다시 쓰기)한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요즘 나오는 성장소설이 발칙한 데 비해 다소 건전하다 싶더니만. 게다가 왠지 제목도 <우리들의 시대>가 더 어울린다 싶었다. 알고 보니 1973년에 원제인 <우리들의 시대>로 출간하였으나, 같은 해에 출간한 <별들의 고향>에 비해 별다른 이목을 받지 못하고 묻혀 버렸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어떻게든 재발견된다든가. 개정판과 축약본을 거듭하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원작에 가장 가깝게 재탄생되었다고 한다. 출판사에서 아깝게 묻힌 '진흙 속의 진주' 같은 작품을 재발굴한 것이다.

 독자로써는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고, 작가로써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부모세대에게는 '지난 날의 추억'을 되새기고, 나처럼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이에게는 '지난 날의 낭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앞에서 건전하다고 투덜댔지만 그것은 불만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한없이 맑고 투명한 그 시대를 날것 그대로, 어떠한 꾸밈이나 포장없이 펼쳐지는 것에 눈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전학생 영민과 주인공을 포함한 다섯 명의 악동이 친구가 되는 모습도, 짝사랑의 실패로 방황하던 모습도 순수함을 간직한 채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스스로 그 상처를 이겨낸다.

 그때의 수치심은 이상하게도 훗날 내가 자라났을 때에도 두고두고 잊히지 않은 상흔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라날 때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접목할 때 나뭇가지를 꺾어 상처를 내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 상처를 그어 내린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접목이 아니겠는가. 

 이후 주인공은 친구들에게 '개똥철학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만, 시를 읊으면서 친구들의 상담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 '머저리 클럽'은 후에 Y여고 학생들과 영합해 '샛별 클럽'이 되고, 그곳에서 한 여학생을 만난다. 그녀와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가는 사이에 3학년이 된 그들은 학업에 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되고, 주인공의 친구는 그 압박감에 가출을 감행한다. 무엇보다 친구를 걱정하던 '머저리 클럽' 멤버들은 방황을 마치고 키가 한 뼘 큰 친구를 기쁘게 맞아준다. 친구의 성장을 바라보며 주인공은 다시금 자신들의 성장을 인식한다. 아직은 그것이 무언지 모르지만 자신의 가슴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새에 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밤중에 호박덩굴이 움썩움썩 크듯 그리하여 우리가 잠든 새에 호박덩굴이 수수깡 울타리를 타고 넘듯 우리의 심장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이루어져서 우리의 키를 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계의 시침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와 만날 때면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그러는 한편, 주인공의 다짐처럼 그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후회와 그로 인해 생생하게 기억할 수 없는 아쉬움이 공존한다. 그러나 그러한 학창시절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하던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때의 우정 또한 지금의 나를 지탱시켜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교가에 흔히 등장하는 정기를 이어받을 학교 뒷산이 없어서 아쉽지만 장미로 이뤄진 작은 정원이 있었고, 교내에 혼자만의 공간은 없지만 삼삼오오 둘러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돌탁자가 있었다.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 지금도 추억은 내 가슴 어딘가에 숨쉬고 자라고 있겠지?

인상 깊은 구절
 "아냐. 그렇지 않을 거야. 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할 거야. 난 세월이 지나간다 해도 우리의 일들, 그리고 내가 지금 느끼는 이런 감정 모두를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을 테야. 설사 어른들이야 늘, 너희 나이 땐 모른단다, 좀 더 나이를 먹어 봐야 한단다, 그런 말을 하지만 난 우리 때의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믿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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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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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첫 소개되는 일본의 젊은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森見登美彦. '숲에서 보다'라는 이름의 뜻만큼이나 작품 전체를 총괄하는 눈이 탁월하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은 꽤 재미나게 읽으실 듯하다. 작가를 소개하기에는 내가 지닌 정보가 부족한지라 소설 속에 보여지는 작가의 특성을 알려드리겠다. 작가는 고풍스러우며 독특한 의고체擬古體 문장과 무냐무냐, 후냐후냐같은 귀여운 의성의태어를 개발하여 자신만의 문체를 완성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의 새로운 재능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일본 문단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많은 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다.

 이제 본격적인 작품 소개에 들어가겠다. 우선 주인공이자 화자는 대학 3학년 봄까지 2년간을 실익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하는 대학교 3학년 학생이다. 그의 친구 오즈는 그와 같은 학년으로 야채를 싫어하고 즉석 식품만 먹기 때문에 안색이 어쩐지 달의 이면에서 온 사람 같으며, 타인의 불행을 반찬으로 밥을 세 공기 먹을 수 있는 인간이다. 그는 화자의 꼼짝없이 고착되어 버린 아이덴티티 형성에 관여했다고 비난받아 마땅한 자이며, 무엇보다 타기(唾棄)할 벗이다. 그런 오즈의 첫 인상은 재수 더럽게 없고 소름 끼치게 생긴 남자였으며, 섬세한 자신에게만 보이는 지옥의 사자인가 했다.

 소설 속의 문장을 인용한 화자와 오즈의 소개만 봐도 재밌지 않은가?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환상의 지보(至寶)라 불리는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던 대학 1학년 신입생인 화자는 네 곳의 동아리에 흥미를 느낀다. 그것은 영화 동아리 '계', '제자 구함'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단,  소프트볼 동아리 '포그니', 그리고 비밀 기관 '복묘반점(福猫飯店)'이다. 네 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화자가 각각의 동아리를 선택했을 때 어떤 일이 전개될지 그려나간다. 흡사 이휘재의 인생극장 '그래, 결심했어!'같은 구도로 이뤄졌다. 그런데 우습게도 오즈의 인연설이자, 스승님의 예언이 들어맞으며 재미를 더한다.

 "위로하는 건 아닙니다만,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했든 저를 만났을걸요. 직감으로 압니다. 그리고 저는 어차피 전력을 다해서 당신을 망쳐놨을 거라고요. 운명에 저항해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오즈는 새끼 손가락을 세웠다.
 "우리는 운명의 검은 실로 맺어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전개였으나, 트루 엔딩이라고 하는 마지막 장에서 의외의 결말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그토록 누라리횽(대머리 요괴, 악한 요괴의 두목 같은 존재) 같던 오즈도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여러분에게만 살짝 드리는 팁이지만, 화자가 영화 동아리에서 만든 영화를 잘 살펴보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힌트를 잡을 수 있다. 나는 화자로써는 가장 무익했으나 가장 재밌고 즐거웠던, '히구치 스승'을 모시던 두 번째 이야기 <자학적 대리대리전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어떤 재미난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나요?

 "방금의 팁은 제 나름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더러운 것,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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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블로거 문학 대상] 문학에 관한 10문 10답 트랙백 이벤트

[제1회 블로거 문학 대상 : 트랙백 이벤트 10문 10답]

1. 당신은 어떤 종류의 책을 가장 좋아하세요? 선호하는 장르가 있다면 적어주세요.
 판타지와 환상동화 류를 가장 좋아하고, 본격 미스터리도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곳은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만나려고 노력합니다.
 요즘은 프랑스 스릴러나 일본 SF에도 관심이 생겼답니다. 독서 에세이도 좋아함.

2. 올여름 피서지에서 읽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우선은 표지가 정말 예쁜 브루노니아 배리의 <레이스 읽는 여자>가 있고,
 다음은 역시 표지가 알록달록한 로라 차일즈의 <다질링 살인사건>이 있고,
 마지막으로 호러 로맨스라는 로라 위트컴의 <고스트 인 러브>가 있습니다.


3.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혹은 최근에 가장 눈에 띄는 작가는?
 가장 좋아하는 국내작가는 박민규, 일본작가는 이사카 코타로, 국외작가는 독일의
 발터 뫼르스입니다. 여기에 추가되면 추가되었지, 절대 누락될 염려는 없는 부동의
 리스트인 셈이죠. 최근에 가장 눈에 띈 작가는 두말할 필요없이 조너선 캐럴입니다.

4.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이유와 함께 적어주세요.
 이사카 코타로의 <칠드런>의 히로인이자 제 히어로인 진나이를 가장 좋아합니다.
 
 <칠드런>은 장편을 가장한 단편을 모아둔 연작 단편집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진나이라는 매력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각 이야기의 화자가 다르다 보니
 진나이란 인물도 여러 각도에서 비춰볼 수 있어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매력은 여타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특유의 유쾌함을 무기로, 사회의 틀에 박힌
 통념에 대항하는 자세와 그의 철학을 들 수 있습니다. 저자의 다른 여러 소설에서도
 진나이와 닮은 인물을 찾을 수 있지만, 진나이가 가장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닮았어요.

 "우리는 모두 자신을 오리지널 인간이라고 생각해. 누구와 닮았다는 소리가 제일 싫어.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놈이라고!" 이사카 코타로의 <칠드런> 중


5.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서 자신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인물 /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이상형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있었다면 적어주세요.
 니시오 이신의 <잘린머리 사이클>에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짱과 제가 닮았다고
 생각했답니다. 이짱은 자학적인 성향과 열등감을 헛소리로 풀어내는 인물로,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지라, 기분 나쁘고 무척이나 불편하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리즈의 다음 편인 <목조르는 로맨티스트>를 읽고 나니 제 생각이 크나큰
 착각이었단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전혀 이짱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상형에 대한 질문은 4번 문항과 중복되는 것 같아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6.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은?
 전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제 취향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책 선물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상대가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좋아하는 작가나 장르의 책을 골라서 선물하는 것이죠.


7. 특정 유명인사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누구에게 어떤 책을 읽히고 싶은가요?
 최근에 읽은 <호란의 다카포>에서 그녀가 읽은 책과 겹치는 책이 많아서 기뻤습니다.
 아무래도 취향이 비슷한 것이겠죠. 팬들에게 책 선물도 많이 받는다고 하던데, 취향을
 강요하지 않는 선에서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제가 좋아하는 조너선 캐럴의 책
   세 권(<웃음의 나라> <벌집에서 키스하기> <나무바다 건너기>)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8. 작품성과 무관하게 재미면에서 만점을 주고 싶었던 책은?
 최근엔 온다 리쿠의 <초콜릿 코스모스>를 굉장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특히 두 번의
 연극 오디션 씬이 단연 압권이더군요.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극에 대한 열정과 <여섯 번째 사요코>의 강당 씬에서 보여준 소름끼치는 흡입력과
 절정으로 치닫는 폭발력을 보여주었어요. 재미면에선 만점을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9. 최근 읽은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충고하는데, 정치가 같은 훌륭하신 분들은 말이야, 중요한 일은 일반인들한테
 설명 한 마디 안 하고 물밑에서 착착 진행시켜.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이사카 코타로의 <골든 슬럼버>

 인간이 그렇게까지 파괴적인 무기들을 비축하면서 말로는 그토록이나 세계적인
 조화를 추구했던 시기가 과거에는 없었다. 앨런 무어의 <왓치맨>

 사람의 행복이나 불행은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낙원>

10. 당신에게 '인생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유와 함께 적어주세요.
 제 인생의 책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책이라 고르기 쉽지
 않았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의 두께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무인도에 떨어졌다면
 하고 상상을 해봤어요. 아무도 없는 무인도 안에서 외로움을 달래줄 책 한 권이 있다면
 365일 읽어도 질리지 않을 <끝없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이요.

 워낙 두꺼운 장정의 책이니 만큼 '똑똑' 노크하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표지의 오솔길이 따라 환상의 세계로 가고 싶기도 하구요. 무인도
 에 떨어졌는데 먹고 살 궁리는 안하고 책만 들여다 보고 있네요. 작가의 대단한 상상력
 은 제가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고, 책을 읽는 동안 꿈같은 시기를 보낸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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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 1 - 투사편, 인간의 운명을 가를 무섭고도 아름다운 괴수 판타 빌리지
우에하시 나호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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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와 일본 시대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썬 '최고의 선택'이자 '운명적 만남'이었던 <야수>를 속속들이 파헤쳐 보자! 우선 소설 속의 소녀 에린은 우리가 여타의 소설 속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천진하고 순수한 소녀가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아료의 딸'이라는 차별을 받고, '투사지기'인 엄마를 잃은 슬픔을 지닌 조숙하고 이성적인 소녀이다. 엄마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에린을 벌치기 사내 조운이 거둬들이면서, 에린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했던 경험'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때까지의 이야기 템포를 '강'이라고 나타낸다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템포는 '약'이다. '강약'의 템포가 어우러져 '약'에 속한 이야기를 잔잔하고 아름답게 들려준다. 조운에게 양봉 기술과 자연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면서 소녀는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린은 '경이롭고 황홀한 아름다움'을 지닌 야생 왕수에 매료되어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녀는 '카자룸 왕수 보호소'에 입학하고 평생 스승과 친구들을 사귀면서, 부상당한 새끼 왕수 리란과 '또 한 번의 운명적인 만남'을 맞게 된다.

 에린은 수금을 퉁기며 리란과 '정신적인 소통'을 하고, 리란은 에린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부상에서 회복한다. 리란의 전담 보호자가 된 에린은 자신이 '열어선 안 될 문'을 열었다는 것을 모르고, 왕수를 옭아매던 규범인 '무성피리와 특자수'에서 리란을 풀어준다. 그렇게 에린은 '국가의 운명'과 '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강약'의 템포를 유지하면서 점차적으로 세계관이 넓어지는 이러한 구도는 소녀의 성장과 맞물려, 이 소설의 '성장소설로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준다.

 에린과의 첫 만남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리란의 태도는 <야수>라는 제목과 달리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결코 길들지 않는 왕수와 수금을 퉁기며 대화를 건네는 소녀 에린. 그 둘의 우정은 '결코 길들지 않는'다는 말의 '길들이다'나 원제 <야수를 조종하는 아이>의 '조종하다'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소통하다'와 가장 어울릴 법한 '고차원적인 대화'다. 그들의 대화는 언어를 초월한, 마음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화음'이며, 넓은 평원에 울려 퍼지는 '미지의 가락'과 다름없다.

 그들이 들려주는 연주를 듣다 보니 판타지엔 동·서양의 구분이 없고, '전 세계의 보편적인 감성'이란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하지만, 딱히 일본만의 색채라기 보다는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잘 보여준다. 오히려 이런 보편성에 그들의 고유성을 살짝 덧입힐 수 있는 그들의 문화가 조금 부럽기도 하다. 우리의 판타지도 고유의 전설이나 민담을 덧입히면 우리의 색깔을 잘 드러낸 세계적인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우리 판타지의 미래'를 고민해보게 해준 에린과 왕수 리란은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천천히 활강해서 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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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와 세탁부 프리가 - 아흔아홉 번의 세탁계약과 거울의 세 가지 수수께끼 판타 빌리지
조선희 지음 / 노블마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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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 세계와 8년 간 조우하면서 '국내 판타지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다. 그런데 요즘 심상치 않은 행보가 눈에 띈다. 우선 그 첫 번째로 '국내 장르문학의 기반을 다지려는 출판사의 시도'이다. 그 예로 로크미디어의 '노블레스 클럽'을 들 수 있다. 경계문학을 지향하며 대중문학의 새로운 주류로 발돋움하겠다는 기치도 마음에 들고, 최근 출간한 두 작품도 기존의 양상과는 전혀 다른 탄탄한 텍스트와 흥미진진한 전개, 충격적인 결말로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작년 한 해 장르시장 전반에 나타난 '라이트 노블의 약진'으로 재야에서 무공을 연마한 고수다운 국내 필진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로 '기성 장르문학 작가의 출판사 설립'이다. 그 예로 판타지 작가 홍정훈 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넥스비전 미디어웍스'를 들 수 있다. 대여점에서 유통되는 국내 장르시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취약한 유통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의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메이저 출판사의 장르시장 진출'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노블마인의 신인작가 공모'이다. 재능있는 국내 신인작가 발굴에 힘쓰는 출판사에게 박수를 보내며, 이번에 노블마인에서 처음 선을 보이는 국내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조선희 작가가 이미 '제2회 한국판타지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몇몇 작품을 통해 검증받은 작가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공모 형식으로 출간한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처음 물꼬를 튼 의미있는 작품이기에 필자 또한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기존의 강한 영웅이 등장하는 '검과 마법'의 판타지적 설정에서 벗어나, '세탁부'인 여주인공과 '아흔 아홉 번의 세탁 계약'을 주된 설정으로 삼고, 생동감 넘치고 통통 튀는 캐릭터들과 다양한 동화 속 모티브를 차용하여,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 넣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인명'에 관한 부분이다. 주인공인 '프리가(Frigga)'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이자 오딘의 아내이며 결혼과 출산의 수호신이지만,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말 어감을 살린 '미남 제빵사 꿀빈'이나 '팔랑 부인'같은 이름과 비교했을 때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자가 보여준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물간의 투닥대는 대화를 통해 재미를 한층 가미하고, '아이작 올드턴(Isaac Oldton)'같은 패러디를 이용해서 간간히 웃음을 준다.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악역의 본격적인 활동으로 인해 긴장감이 더해지고, 결말에 이르러서도 무언가 '또 다른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든다. 판타지 세상을 이렇게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지만 인물들의 재치있는 대화와 재기발랄한 행동으로 시종일관 웃음과 재미를 놓치지 않아 어느 순간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쉬워하게 된다. '프리가'가 과연 '마법사와의 계약'을 무사히 완수하고 '야즈다 99번지'를 빠져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신 분은 읽어보시길 바란다. '프리가'가 한 방에 '졸도'시키고 싶다는 '불법 마법사 졸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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