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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명성은 허위다. 내가『파피용』을 읽게된 경위에도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거라 생각된다. 그보다 [뫼비우스의 일러스트]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더 높았을지도 모르지만. 뭐, 소설을 다 읽은 마당에 그렇게라도 [자기 안위]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안그러면 너무 억울하다. 그에게 특별히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데, 이번 작품에서 특히 그의 [문학적 소양]에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기발한 상상력]에 대해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있지만, 그 또한 새롭다고 하기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소설도 과거에 많은 SF소설이 갈고닦은 토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것도 영 어정쩡한 상태로. 이것이 바로 문제다.
인간은 자신들의 요람인 지구를 흔들다가 뒤집어 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지구에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구여, 나의 어머니여, 안녕.] 우주의 존재를 알게된 순간, 인간의 습성 중에 하나인 [이동성의 나침반]은 우주 공간을 가르켰다. 그래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하였다. 현실에서도 인간의 눈은 우주 공간에 향해 있을진데, 현실의 이상을 그린 소설 속에서야 더 무얼 말하랴. 특히 [인간의 지구 탈출]과 [다른 행성으로의 이동]은 우주선 개발 이전의 과거에도 많은 SF소설에서 볼 수 있는 소재였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한 문제는 이번 작품이 전작들과는 달리 과학의 비중이 줄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문제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 관찰력을 동원하여 [개미들의 제국]을 탄생시킨『개미』와 비교했을 때, 이브의 원대한 계획인 광자 추친 에너지를 이용한 우주 범선 <파피용>호의 몸통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과연, 지름 500m의 원통을 세탁기의 원리로 회전하면 [인공 중력]이 발생해서, 사람들이 원둘레의 표면에 붙어 생활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지구의 중력도 지구가 어떤 물체를 잡아당기는 인력과 지구의 자전에 의해 가해지는 원심력에 의해 생기는 것인데, 고작 지름 500m의 원통을 회전시켜 [원심력]만으로 중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싶다. 이론적으론 가능할지 몰라도 지구와 같은 생태 자연 환경까지 만들어내기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혹시나 반지름이 500m라면 몰라도. 총길이는 32km에 달하면서, 왜 지름은 고작 500m인가. 지구라는 공이 워낙 커서 우리는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내 머리의 500m위에 사람이 매달려 있다면 [원통의 회전]을 의식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을까. 머리 위에서 자전거가 돌아 다니고, 호수가 있고, 식물이 자라고, 건물이 건설되어 있는데. 사실, [원심력]이란 단어조차 소설 속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 불친절한 베르베르 씨는 과학보다는 환상을 헤맨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로선, 조금은 [과학]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존재를 의심하지도 않는다. [과학 지상주의]나 뭐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과학]이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리얼리티를 상실했다.
내가『파피용』을 읽으며 나에게 던진 질문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우습게도 [내가 파피용호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는가?]였다. 우선 제외 대상인 [정치인, 군인, 목사]가 아니니까 1단계에서는 무난히 통과할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트가 제시한 [건강]과 맥 나마라가 제시한 [젊음]의 조건에 부합하고, 아드리앵이 제시한 [전문직]에는 조금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 내가 특별히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것도 아니고, <마지막 희망 Dernier Espoir>이란 프로젝트 명에 혹해서, 분명 명확한 [동기 의식]을 갖출 것이고, [성공을 바라는 믿음] 또한 어느 누구보다 클 것이다. 그리고 나름 [열정]도 지니고 있으니 힘들지 않게 파피용호에 올라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과연 파피용호에 올라타면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였다. 이브가 가진 회의만큼이나 이 생각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리라 생각된다. 이제 더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지구를 떠나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다)>라 생각하고 파피용호에 올랐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을까, 지구에 남겨진 다른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비겁한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면, (이제 [하늘]은 사전에만 존재하는 단어가 되겠지.) 형광등처럼 생긴 [인공 태양]과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이 보이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없는 공간에서, [내가 과연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하나. 나는 파피용호에 오르지 않을 것이고, [지구]에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파피용호에 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한 시도가 많을수록 성공의 가능성도 높아질테니,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라 굳게 믿고, <최후의 인간>을 태운 정자라고 여기고, <최초의 인간>을 전파하기 위해 힘쓰면 되는 것이다. 나 또한 나름대로 지구에 남아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보고, <최후니 최초니 따지지 않는 인간>이 되어, 마지막까지 <어머니 지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작가의 마지막 말처럼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지 않는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내가 앞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비판한 이유를 말하겠다. 그는 우리나라에『나무』라는 [유일무이]한 베스트 셀러를 탄생시킨 명실공히 베스트 셀러 작가다. 이 [유일무이]란 단어에 숨겨진 이면에는 [유일무이한] 베스트 셀러이기 때문에, [다시는 나오지 않아야 할] 베스트 셀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베스트 셀러는 무조건 좋은 책]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한 우려도 포함되어 있다. 이번 작품에선 실망이 무척 컸지만, 차기작인『신』3부작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 때문일까. 훗, 나도 어쩔 수 없군.
창시자 5명이 죽고 나서 천 년의 시간은 더이상 희망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했다. 더 끔찍한 것은 그것을 마치 역사 교과서를 요약하는 듯한 서술 방식이다. [인간의 역사]라는게 [전성기]가 있으면 [퇴화기]가 있고, [퇴화기]가 있으면 [전성기]가 있는 하나의 사이클로 구성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을 찍어내듯이, 우리 인간은 언제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이쯤에서 [불량품]이 하나 나와 준다면, 그것이 <마지막 희망>일까. 나는 덜렁대고 소심한 이브를 믿고 그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정신적으로 지지를 아끼지 않은 [맥 나마라]가 가장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