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바다 건너기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참 특이한 소설이다. 이 말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시간 여행'을 하고, 그렇게나 많은 '나'를 만나다니. 사실 '시간 여행'이란 소재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먼 훗날, 시간 여행이 가능하리라는 그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역자의 말처럼 너무 복작대서 머리 쓰는 것은 별로 즐기지 않기에. 그리고 열 일곱 살의 나를 만나는 것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을 보여주며, 그렇게 살지마라 충고해줄 수도 없는 것일진데. 고로, 나는 이 소설을 아무런 선결 지식없이 선택했다.

 그 결과를 말하자면, 그리 유쾌할 것도 없었는데 유쾌했고, 결말이 만족스럽진 않지만 잘 읽었다 싶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런 감상을 설명할 길이 없지만서도 말이다. 그래도 비교적 만족스런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조너선 캐럴'의 이름을 어찌 듣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을 듣게 된 경위는 그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웃음의 나라The land of laughs> 출간 당시. 그때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기에 관심두고 있지 않았지만, '캐럴'이란 성 때문에 '루이스 캐럴'을 연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 작가를 꼭 만나보리라 결심한 것은 <벌집에서 키스하기Kissing the Beehive>덕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무바다 건너기The Wooden Sea>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럼, 다음으로 이 작품에 대한 소개에 들어간다. 이 작품은 조너선 캐럴의 '크레인스뷰 3부작' 중 마지막 편에 해당한다고 한다. 시리즈 명인 '크레인스뷰'에 괜히 겁 먹지 마라. 그냥 동네 이름이다. 각각의 시리즈도 주인공이 모두 다르니 안심하라. '크레인스뷰 3부작'의 순서는 <벌집에서 키스하기Kissing the Beehive>, <The Marriage of Sticks(미번역)>, <나무바다 건너기The Wooden Sea>이다.

 <벌집에서 키스하기Kissing the Beehive>에서는 <나무바다 건너기The Wooden Sea>의 주인공이자 히어로인 맥케이브가 조연으로 나온다고 한다니 벌써부터 기대된다. 미번역작인 <The Marriage of Sticks>에서는 맥케이브의 아내인 마그다가 주인공이 아닐까하는 예상을 했다(헛소리). 독자들이 <나무바다 건너기The Wooden Sea>란 제목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에 제목의 출처를 밝힌다. 그 제목은 본문에 나온 "나무로 된 바다를 어떻게 노 저어 가시겠습니까?"란 문장에서 나온 것이다.

 당신이라면 이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나무로 된 바다'같은 건 없으니까 걸어서 가겠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의 맥케이브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동일인인 소년 맥케이브는 자신만만하게 "숟가락으로." 건너겠다고 한다. 이것의 의미를 알겠는가? 우리의 맥케이브는 열 일곱 살의 자기 자신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내 가슴에 사무친 원숭이'라고 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도 바로 나 자신이고, '미래의 나'도 곧 내가 될 나 자신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덕분에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된 '자아'란 단어를 조너선 캐럴은 '자아들'이라고 명명한다.

"우리의 모든 자아를 살려두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
그들 모두의 말을 경청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
(…중략…)
내 인생을 정말로 이해하려면 그들 모두가 얼마나 필요한지 이제 나는 안다.
나무로 된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그들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그들의 서로 다른 대답을 주의깊게 들어보라."

 그리고 그가 자신의 수양딸인 폴린에게 해주는 말이 참 가슴에 와닿는다. 우리는 평범함과 안전함을 구분짓지 못하고 '평범함'에 자신의 정체성까지 억누르고 살진 않는지 생각하고 반성하게 한다.

"평범해지지 마, 폴린. 절대로 평범해지려고 하지 마.
왜냐하면 그건 치명적인 병의 증상이거든.
평범해지고 싶은 욕구가 찾아오는 걸 느끼면 해독제를 찾아.
네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 봐, 폴린.
평범함이 너인 척 가장하고 살아가지 않도록 해."

 그리고 마지막만큼이나 멋진 명대사. 코란에 나오는 말이라는데 본문에서 두 번이나 등장한다.

"모든 것의 마지막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 꿈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처음 고른 명대사는 바로 이것이었다. 극 초반에 등장하는 조지 데일럼우드의 대사.

"세상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둘이다.
신과,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맥케이브의 입을 통해서 들여다본 저자는 신을 믿음으로 섬기는 자같은데, 나는 '신'보단 '외계인'의 존재가 더 믿음이 가거든. 그렇다면 '왜 외계인이 우리들 앞에 나타나지 않느냐' 묻는다면 대답할 말도 있어. '인간들도 동물원 우리 밖에서 동물들을 보잖아. 외계인도 다 그런 거야." 이건 '이사카 코타로'의 단편 소설에서 읽은 한 부분ㅋㅋㅋ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구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한 없이 진지한 상황에서 내뱉는 농담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극의 후반으로 가면, 이제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등장한다. 앞에서 한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고, 이제 내가 언급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 화려한 예고편으로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더니 그리 유쾌하지 못한 반전으로 실망감을 안겨줬던 영화 <포가튼The Forgotten>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그래도 소설이 영화보단 훨씬 만족스럽다.

 다른 작품을 어서 만나야지 하는 기대치를 상승시키는 연결고리로썬 미흡했지만, 다른 작품을 만나기에 주저하게 만드는 작품은 아니었다. 우선은 '유머러스한 문체'와 '가공할 만한 상상력'으로 '색다른 작가'를 만나게 된 데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즐겁게 여긴다. <나무바다 건너기The Wooden Sea>가 판타지였다면, <벌집에서 키스하기Kissing the Beehive>는 좀더 미스터리함을 어필하는 작품이니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차기작인 <The Marriage of Sticks>도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아무짝에도 보잘 것 없어 보이던 '똥친 막대기'가 대하소설 <객주>로 잘 알려진 '길 위의 작가' 김주영 씨와 순박하고 서정적인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강산 씨를 만나 단단하게 뿌리내린 '한 그루 나무'로 탄생하였다. 우화 형식이기 때문에 작중 화자는 '똥친 막대기'이다. 그는 어미 백양나무 곁가지로 태어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한 순간에 '똥친 막대기'로 전락하고 만다. 흔히 하찮고 미미한 것을 '똥친 막대기'라고 비유하니, 그의 인생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이 될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화물 열차에서 연달아 울리는 기적 소리만 아니었어도 깜짝 놀란 암소의 '소몰이 회초리'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버림받으면 더 이상의 모험도 끝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를 잊지 않은 농부의 손에 이끌려 소녀 재희의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의 모험이 계속되듯이 그의 고난도 계속 이어진다. 마음속 깊이 짝사랑하던 재희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가 된 것. 암소를 때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던 그는 재희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에 눈물 겨워하다가, 또다시 농부의 손에 이끌려 측간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똥 부수는 일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똥친 막대기'가 된다. 힘든 일이 닥쳐도 기적을 꿈꾸며 이겨내던 그에게 크나큰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구세주는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재희였다. 측간에 놓인 그를 집어들고 동네 개구쟁이를 위협하는 '살상 무기'도 되었다가, 개구리를 낚는 '낚싯대'도 되었다. 그러나 실컷 놀고 재희에게 버림받은 그는 든든한 어미 나무의 품을 그리워한다. 그의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홍수로 불어난 물에 이리 저리 떠내려가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잘 쓴 우화가 탄생하였다는 기쁨을 감출 길이 없다. 이 책은 10권으로 완간될 연작그림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앞으로도 <똥뒷간 생쥐의 기막힌 생애>와 <똥파리의 일주일>(가제)같이 제목에 '똥'이 들어가는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도 극중 지휘자 강마에가 실력이 부족한 단원에게 "똥덩어리"라고 몰아붙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단원이 실제 공연에서 솔로 부분을 멋지게 연주하게 된다. 앞으로는 이처럼 크게 될 '똥'을 쉽고 만만하게 여기지 않아야겠다. :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곡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읽은 연애소설에서 오래된 연인의 경우엔 상대에게 반한 장점이 시간을 지나면 단점이 된다고 하더군요. 이 작품에서도 장점은 단점이 되고, 단점은 장점이 됩니다. 이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반전이랍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반전이 대단하다는 작품을 만날 때면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볼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저만 그런가요? 거기다 반전에 놀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까지 다지고 작품에 임하니 작가는 그런 독자를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요즘 독자들은 눈이 높아져서 웬만한 반전엔 놀라지도 않죠.

 사실 반전을 인지하고 작품에 임하는 자세는 어느모로 보나 공정한 플레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작품을 읽다가 반전이 있음을 눈치챘다면 모를까, 이런 반전이 전개되겠군 머리 굴려가며 예상하는 것은 작품의 재미를 격감하게 하는 것이죠. 반전에 대한 힌트라도 될까봐 역자 후기도 미뤄두고 읽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저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며 반전에 대한 추리를 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작품에 임하실 분이라면 부다 반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길 바랍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반전>이 아니라 <통곡>이니까요.

 작품은 홀수 장과 짝수 장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홀수 장에서는 '그'라고 지칭되는 한 남자가 가슴이 뻥 뚫린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신흥 종교'에 빠져드는 내용이고, 짝수 장에서는 사에키 수사과장과 간혹 오카모토 경부보의 시선으로 '연속 소녀 유괴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게다가 홀수 장은 '그'가 '마쓰모토'란 사실을 나중에 알려줄 정도로 모호하게 시작합니다. '그'가 어떻게 상실감을 얻었는지 독자는 추측할 뿐입니다. 그렇게 두 이야기는 서로의 접점을 향해 결말로 치닫습니다.

 종교에 그리 감흥하지 않는 저로선 신흥 종교에 빠져드는 그의 모습이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상실감을 위로받으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반전에 대해 주제넘게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댔지만, 반전을 알았다 할지라도 약간의 어지러움을 동반하고 숨이 멈추게 하는 반전입니다. 시종 절제된 문장과 잔잔한 어조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문체 덕분에 그러한 효과는 배가됩니다. 이로써 비로소 이 작품의 제목이 <통곡>이라는 사실이 새삼 머리를 강타하고 가슴을 울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이클 코넬리와는 첫 만남이다. 저자의 페르소나인 해리 보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10여 년 전에 출간되었다고 하나 만나보지 못했고, <런던 차를 타는 변호사The Lincoln Lawyer>의 미키 할러에 투영된 저자를 처음 만난 것이다. 영미권에서 인정받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캐릭터나 플롯 자체로도 매력 만점이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드는 마음은 스탠드 얼론이라 아쉽다는 생각뿐이다. 이 정도 캐릭터라면 시리즈로 나와도 무방할 것 같은데. '다시 한번 기꺼이 이 진실 없는 세상에 설 것이다'란 마지막 문장을 봐선 시리즈로 나올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거야 작가의 맘이겠지만.

 작품 초반엔 생각지도 않게 법률 용어 때문에 헤맸다. 법정 스릴러를 좋아하고 읽어볼 만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고 어렵거나 하진 않다. 익숙해지면 일상 용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니. 저자가 5년에 걸쳐 작품을 구상했다고 하더니 그에 상응하는 리얼리티로 단단히 무장하고 나온 것이다. 할러가 잘 나가는 변호사이니만큼 맡은 의뢰가 많을 뿐이지 사건의 구도는 복잡하지 않다. 결말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반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재미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앞에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했지만, 사실 할러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전처와의 사이에 있는 딸에게도 자랑스럽지 못하다. 쉽게 말해 범죄자들을 의뢰인으로 삼고 그들의 돈줄을 노리는 변호사인 것이다. 이 책을 읽은 계기도 이렇게 생긴 할러에 대한 선입관을 부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할러는 내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의 끓는점은 독자에 따라 다를지 몰라도, 의뢰인의 거짓말이 처음 걸리는 순간부터 부글부글 끓어 올라 절정으로 치닿는다.

 마지막으로 작품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카페에서 들은 정보 하나. 최근에 열린 LA 북 엑스포에서 신작 <The Brass Verdict> 홍보차 들른 저자의 인터뷰에서 신작에 해리 보쉬와 미키 할러가 함께 등장하고, 알고보니 두 사람이 이복형제였다는 깜짝 발언을 하셨다고 한다. 이쯤하니 신작도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독자의 기대로는 출판사에서 저자의 스탠드 얼론뿐만 아니라, 그의 대표격인 해리 보쉬 시리즈도 모두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볼 때 그는 이미 법정 스릴러의 대가인 존 그리샴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 중이다. 법정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 될 최고의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녀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5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내게 있어서 제프리 디버와는 첫 만남이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함에도 분권 되어 나오는 그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반갑게도 이 작품은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에도 불구하고 한 권으로 나와주었다. 본 작은 그의 대표작 '링컨 라임' 시리즈가 출간되기 이전의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수많은 찬사를 받았고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는 밑바탕을 확실히 다졌다. 그래서 그런지 팬들 사시에선 이 작품의 출간 소식이 큰 화제가 되었고, 그런 그들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했던 대작이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표지와 더불어 원제의 매력을 그대로 가져온 본 작은, 아시다시피 인질범과 협상가의 12시간에 걸친 두뇌 게임을 다루고 있다. 본격적인 줄거리에 앞서 제목에 대한 재밌는 일화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원제인 <A Maiden's Grave>는 내용과 구체적인 연관은 없다. 그것은 농아인 멜로니가 콘서트 장에서 들은 영가 <Amazing Grace>의 제목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러나 후에 되새겨보면 '놀라운 은총'을 '소녀의 무덤'으로 잘못 들은 것은, 인질 사태를 예견(?)한 작가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필자는 자꾸만 <소녀의 무덤>을 <소녀의 침묵>이라 잘못 읽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이유를 들어본즉 역자가 원제를 대신한 제목으로 <죽음보다 깊은 침묵>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왠지 나쁘지 않은 느낌 탓에 무의식적으로 입에 잘 붙는 '침묵'이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우연에 의한 것이지만 엽기적인 연쇄 살인마를 다룬 <양들의 침묵>도 떠오르고. 물론 한니발 렉터에 비하면 포스가 떨어지지만 인질범 루 핸디의 잔혹함도 그에 못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도살장이 위치한 황량한 밀밭이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찾아보니 원서의 표지도 밀밭을 차용했다. 번역작의 표지는 갈색 머리 소녀의 이미지를 상하 반전했는데, 그로 인해 소녀의 휘날리는 머릿결이 밀밭같아 보이기도 하고. 사실 인질극을 다룬 작품은 처음이라(영화로는 많이 봤지만 내게는 저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외면했던 것 같다) 많이 생소했고 읽기가 수월하진 않았다. 인질 교환을 협상하고 마감 시간을 연기하는 등 나로썬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인질범 루 핸디와 FBI 인질협상가 아더 포터가 벌이는 장시간의 협상은 손에 땀을 쥐게 했지만, 그만큼 지지부진하고 지루하게도 느껴졌다. 간간이 터져주는 각자간의 갈등과 문제가 작품의 몰입도를 높여주고, 액션 서스펜스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작가는 유달리 신체적 장애를 이겨낸 인물들을 잘 그려낸다. 대표작인 '링컨 라임' 시리즈는 전신마비 법의학자가 주인공이고, 청각장애를 지닌 인질들의 농아 공동체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준다.

 작품이 종반부로 이어지며 독자는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반전과 마주하게 된다. 이 반전 덕분에 그간의 협상 과정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닌 모양이었다.]란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 달리고 또 달려라. 협상가 아더 포터의 절망감 만큼이나 허망함을 느꼈던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에 다시금 손에 땀을 쥐고 숨이 멎을 만큼의 극도의 긴장감을 끌어 모을 수 있다. 반전에 이은 무리한 전개가 약간 아쉽지만, 그에 못지않게 반전의 귀재로 불리는 거장의 숨결을 만났다는 기쁨이 더욱더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