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개혁신앙이다
라은성 지음 / 페텔(PTL)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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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개혁신앙이다](라은성, PTL)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600쪽이 넘는 벽돌책이라 다 읽는 데 두 달 가량 걸렸다. 같이 읽으니 읽을 수 있는 거지, 혼자 읽었다면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었을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강요를 바탕으로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서들을 인용하며 무엇이 개혁신앙인지 설명해주는 책이다. 비록 맞춤법이 틀리는 곳이 종종 있어 읽기에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다. 처음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을 개혁신앙이라고 부르는지, 용어 정리를 명확하게 해주어서 좋았다. ‘지금도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고 신념과 신앙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이런 현상은 개혁신앙을 위태롭게 합니다.‘(20쪽) 개념을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으면 이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과 저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이 달라 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에 몸담고 있지만 실제로 개혁주의를 배우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가 가장 클 거다. 개혁주의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개혁주의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다(물론 이 책에서는 개혁주의와 개혁신학, 개혁신앙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는 예장 합동은 스펙트럼이 너무 너무 넓다. 개중에 고신과 대신이 매우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고신이 그렇게 보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니 이미 교단의 의미는 사라졌다. 목회자의 성향이 어떤지에 따라 덜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가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보다 더 보수적인 곳이 되기도 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개혁신앙이라 하는가? ‘개혁신앙인(또는 개혁파)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핍박받고 루터파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작성한 고백서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개혁신앙‘이라 부릅니다.‘(37쪽)라고 설명하시며 교회사를 통해 어떻게 개혁주의가 형성되었는지 서술하신다. 네덜란드로 이동했던 개혁파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를 고백하여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을 확립하는데, 그것이 ‘벨지카 신앙고백서‘(벨직신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주네브 교리문답서‘(제네바 교리문답서)를 채택하는 일이었다. 또 돌드레히트 종교회의를 통해 채택된 ‘돌드레히트 신조‘(도르트 신조)에 기초한 신학이다. 이 돌드레히트 신조를 ‘5대 항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TULIP이다. 벨지카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돌드레히트 신조를 연합을 위한 세 형식, 일치를 위한 세 형식이라 부르고, 이 형식들이 영국을 제외한 대륙에서 개혁신학을 따라 살았던 분들이 고백하고 가르쳤던 것이다(40쪽).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은?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청교도와 장로교도가 고백한 내용들이다(50쪽). 신앙고백서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채택되었는지만 알아도 내가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개혁신앙이라고 외치는 신학교에서, 벨직 신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제네바 교리문답서,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을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주변에 신학생 지인들이 많고 들리는 바가 많아서 생기는 합리적 의문이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기독교 강요를 끝까지 다 안 읽는다고 하니 말이다.), 교단 총회에서도 이런 신조대로 고백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신학교에서는 저 신조를 믿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해야겠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결이 달라도 다 받아들이고 있고, 그러니 교단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요즘 교회, 신학교, 총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 생각이 많다.
궁금증도 생겼다. 성도의 교제는 어느 교단, 교파까지일까. 이단만 아니면 다 가능한가? 알미니안에 반대해서 생긴 도르트신조를 생각하면, 현재 알미니안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이단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으니 이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건지?
아무튼,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공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믿음대로 순종하려면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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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이야, 천천히 오렴 - 아이와 엄마의 ‘처음들’의 기록
룽잉타이 지음, 이지희 옮김 / 양철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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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천천히 오렴](룽잉타이/이지희 옮김, 양철북)-전자책

8월 책뜰안애에 갔을 때 권일한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다. 권일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시는 책을 계속 읽으니 선생님의 감수성(?)이 어떤지 조금 알 것 같다.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책들은 전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따뜻함‘이 있다. 이 책도 따뜻한 책이다. 룽잉타이의 다른 책도 읽을 예정이다.

책 표지에 적혀 있는 부제(?)대로 ‘아이와 엄마의 ‘처음들‘의 기록‘이 적혀 있는 책이다. 글쓴이가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먼저 경험한 내용을 글로 풀어주어 좋았다고 할까. 이 책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들을 소개해 본다.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 나오는 부분이다. ‘어차피 긴 시간 성장해나가는 동안 이 아이는 인간 세상의 온갖 추악한 일을 수없이 목격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두 살 때부터 사람들 사이의 원한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있을까.‘(21쪽) 아마 부모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가 고르는 책들마다 다 비슷한 내용이 펼쳐지고, 그런 책들을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다가 ‘엄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검열이 아니고 무엇일까? 책들을 미리 검사하고 금지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중략)... 검열도 별것 아니구나. 민중을 두 살짜리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일 뿐.‘(2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검열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서평이 길어지니까 여기까지.

˝그렇게 많은 너의 꿈과 계획이, 엄마가 되고 나서 모두 실현할 수 없게 된 거지?˝
엄마는 녹초가 된 몸을 소파에 기대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래서, 후회하니?˝
...(중략)...
잠시 후 엄마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다시 침묵. ˝어떤 경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거든......˝(29쪽)

나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덜 힘들게 육아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지금처럼 서평도 쓰고, 책도 읽고, 피아노도 친다. 하지만 내가 아기와 놀지 않는 시간 동안은 분명, 아기와 멀어지고 있다. 아기가 옆에 있는 순간은 힘들지만 괜찮은 순간이다.
‘아이를 가진 제자에게‘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의 아이이니, 아이를 낳는 것 역시 두 사람 모두의 일이야.‘(35쪽)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이 엄마가 가장 큰 ‘권한‘을 지니게 되고, 어느 누구라도 ‘생모‘의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하지. 아기는 먼저 엄마의 아들이고, 그다음으로 자신의 손자라는 사실을 내 어머니는 분명히 알고 계셨어. ...(중략)... ˝물론 결정은 엄마인 너의 몫이야.˝ ...(중략)... 사랑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풀어나가기가 어렵지 않아. 두려워해야 할 것은 증오야. 사랑이 아니라.‘(37쪽) 감사하게도 나는 시댁이 매우 가까운 편이라, 시어머니께서 아기를 매일 봐주신다. 내가 키우고 싶은 방식과 어머니가 키우고 싶으신 방식은 다르고, 물론 충돌할 때가 있다. 제일 스트레스 받았던 것은 신생아 때였는데, 모유를 먹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가 울면 모유를 먹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지금 생각해도 스트레스다.). 모유 먹이는 간격을 점차 늘려가야 하는데 아기가 배고파서 우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친정 엄마랑도 이 문제로 날선 분위기를 만들 때가 많았는데, 한국에서는 ˝물론 결정은 엄마인 너의 몫이야.˝라는 말을 듣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그런 말들을 하시는 건 아이를 사랑해서일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기는 한다(아기가 울면 불안해지기 때문에 빨리 울음을 달래려는 목적으로 모유를 먹이라고 말한다면 싫겠지만.).
신기했던 이야기는 ‘여와 이야기‘였다. 여와는 중국 고대 신화 속의 여신인데, ˝여와는 기뻐하며 진흙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아주 단순한 이름이었지. ‘사람‘이라고 말이야.˝(41쪽)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와란 이름 자체에서 ‘여호와‘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고, 글쓴이가 마지막에 말한 부분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중국에도 이런 신화가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여기 저기 퍼져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를 해주는 와중에 아이의 발견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엄마, 엄마 눈 속에, 눈동자에, 내가 있어. 안안이 있어. 정말이야......˝(41쪽)
아이를 키우면서 분명 아이와 나의 갈등은 존재할 것이다. 아이가 하기를 바라는 행동이 있을 것이고, 아이는 그 행동을 하기 싫어할 수 있다. 그럴 때 내가 글쓴이처럼 ˝좋아, 엄마가 강요하지 않을게. 하지만 네가 컸을 때 엄마가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고 거꾸로 엄마를 원망하지는 말아줘.˝(105쪽)라고 말하면 아이는 이해할까? 이해해주면 좋겠다. 열아홉의 안안처럼 ‘하지만 지금 나는 나와는 다른 엄마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다.‘(107쪽)고 말해주면 좋겠다. 아기에게 나의 시간을 좀더 내주어야겠다. 나에게 책 읽는 시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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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니미니북) 더클래식 세계문학 미니미니북 9
윤동주 지음 / 더클래식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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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더클래식)-미니미니북 + 독서모임 후기

이번 달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이다. 내가 고른 책이기도 하다. 굳이 왜 시집이냐고 물으신다면, 시를 잘 몰라서라고 답한다. 다른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을 할 때 제일 난감한 게 시 수업인데, 교과서 시를 버리지도 못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시를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교과서 시가 괜찮은 시인지(그 중에 괜찮은 시도 있다고 하니까) 안 괜찮은 시인지 구분도 잘 못하는, 시에 대해선 문외한이 바로 나다. 그래서 시를 알고 싶었다. 또,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시를 공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를 좋아하면 알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시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릴 때, 유치환 시를 외웠다. 김영랑, 김소월 시가 좋았다. 이육사의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듣고 그 시를 다시 보게 됐다. 알쓸신잡에서 심훈의 소설과 시를 함께 보며 ‘그 날이 오면‘을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시를 오래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시가 알고 싶어졌을까? 가르치려면 알아야 하니까. ‘가르침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 질문은 여기에서 더 다루지는 않겠다.
수많은 시 중에 왜 윤동주 시였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작품을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 ‘동주‘라는 영화를 봤다는 게 두 번째 이유, 그 중에 집에 있는 책이 이 책이었다는 게 세 번째 이유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시가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사실 시를 읽는 동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적 감수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는 여러 번 읽어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법인데, 한 번에 이 시집을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고른 책이니 꼭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나를 짓눌렀다. 이번 시즌부터는 책을 선택한 사람이 발제문을 준비하기로 해서, 발제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내가 생각한 발제문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와 그 까닭‘, ‘내가 시를 이해하는 방법, 시를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길‘과 ‘팔복‘이라는 시가 좋았는데, ‘길‘에서는 마지막 연이 마음을 울렸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 이 시에 대해서는 함께 나누면 참 좋을 것 같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윤동주를 이해한 내용을 듣고서야 윤동주의 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점이 참 감사했다. ‘서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다 나오는 줄도 몰랐고, 서시와 종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윤동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큰 그림을 알려면 시를 여러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윤동주가 저항시인인지도 잊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우리 글로 시를 쓴다는 게 얼마나 용기있는 일이었을지 생각하지 못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윤동주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렸던 것을 용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기도, 시를 쓰기도 부끄러운 감정들을 용기있게 시로 써내려갔다. 치열하게 살았던 윤동주의 삶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하지 않을지. 윤동주는 제 식대로 용기있게 살았는데, 부끄러운 것은 윤동주가 아니라 나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괴로워해야 할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 나.
‘태초의 아침‘과 ‘또 태초의 아침‘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독서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 태초의 아침‘에서 가죽옷이 아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시 나눔도 정말 멋졌다. 시 하나를 가지고 시 모임을 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어쩜 이렇게 윤동주를 잘 이해하고 있으신지. 나에게 없는 눈이어서 부러웠다. 어쨌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어서 윤동주의 시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았다.
(결국 시를 이해하는 방법은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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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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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존 윌리엄스/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전자책

사람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려면 문학을 읽어야 한다. 요즘 내 마음이 딱딱한 것은 문학을 멀리해서일까. 대단한 책이라는 추천이 많은데,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서일까. 머리 식히고 시간 때우기용으로는 소설만한 게 없다.

[스토너]도 권일한 선생님의 책 목록 중에 있었다. [스토너]는 [대지] 같았다. 몇 년 전에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대지]를 읽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는데, [스토너]도 ‘한 사람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것 같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이 책은 스토너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문학 교수로 살게 된 스토너의 인생 이야기. 전체적으로 논하기에는 내가 소설을 감상하는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에, 부분적으로나마 마음에 남았던 구절들을 언급하며 서평을 이어 나가려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11쪽) 스토너가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영문학 교수 아처 슬론에 대해 글쓴이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 문장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한다. 20대에는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30대에는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40대에는 학생들이 아는 것을 가르친다고 했던가(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틈조차 없는 현실이다. 신기하게도, 그 ‘간격‘ 속에서도 스토너는 아처 슬론에게 매료되었다.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11쪽) 그후로 스토너는 달라진다. 마치 가드너가 말한 ‘결정적 경험‘을 한 사람처럼. 아처 슬론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수동적이었던 인생이 자의적으로 바뀌었다. 이 부분을 글쓴이는 ‘나중에,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그는 학부의 마지막 두 해를 되돌아보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돌아보듯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13쪽)고 묘사한다. 캠퍼스의 연인들에게 친밀함을 느꼈던 것은 스토너가 책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기에 자신의 장래를 ‘웅장한 대학 도서관‘으로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내가 두려움이 많은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토너는 후에 아처 슬론과 같은 교수가 된다. ‘신입생들에게 처음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허둥거리던 그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62쪽)
스토너는 이디스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결혼에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이디스를 보면서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과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43쪽)시킨다든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피로와 불안을 안고 있다든지. 그것은 아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데서 감정을 다른 곳으로 발산시키려 하는 반대급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것임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시간 속에 묻어버린 감정, 몸(32~33쪽에 이디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스토너와의 관계에서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물론 스토너도 이디스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잘 몰랐기에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감정을 얻을 수 있었다면, 이후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103쪽) 이디스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다.
스토너와 이디스 사이에 태어난 딸 그레이스는 이디스와 감정적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스는 엄마가 매우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엄마, 보고 싶었어.˝가 아니라 ˝모양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했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디스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그레이스를 소유하려 했다. 그 순간부터 그레이스는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이디스의 감정을 알았지만, 이디스는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적어도 겉으로는). 아마 이디스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또 이디스는 스토너가 집에 만들어둔 서재를 점점 축소시키면서 자신이 집 전체를 관장하려 했다. 마음 둘 곳 없어진 스토너는 학교로 눈을 돌린다. 계속해서 어긋나고 삐걱거린다.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깝다. 솔직하게 인정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아서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내가 제일 흥분했던 부분은 스토너가 워커와 로맥스에게 당하는 부분이었다. 스토너가 옳았지만(이야기가 워커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서 내가 글을 잘못 읽고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결국 스토너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억울함‘에 과민반응할 때가 많은데, 스토너는 억울한 사람이었다. 결국 스토너가 로맥스를 한 방 먹이는 것은 죽음을 앞두기 몇 년 전이었다. 이제 와서 한 방 먹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142쪽)

나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어떻게 평가를 내리게 될까? 지금 내리는 평가와 스토너가 죽을 때의 나이가 되어 내리는 평가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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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 고통과 기억의 위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이문원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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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프레드릭 비크너/홍종락, 이문원 옮김, 비아토르)-전자책

이 책은 8월 마지막 날에 끝까지 다 읽은 책이다. 그런데 9월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도 서평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책 서평은 자꾸 미루고 미루고 미루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끝까지 다 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권일한 선생님이 좋은 책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과 나는 신학적 부분에서는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종이책으로 살지 전자책으로 살지 망설여졌다. 그러던 도중 비크너에 굉장히 감명받은 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전자책으로 사기로 결정했다. 전자책은 서평 쓰기가 힘들어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집에 책이 워낙 많으니 소장해야 할 책인지 아닌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은 자서전적인(?) 글이다. 비크너와는 신학적 부분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단,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필립 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다른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용서‘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던 그때와 같았다.), 그것은 비크너가 어릴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무기로 ‘나는 이런 일도 겪었어. 넌 절대 이해 못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해석한 대로 적어보자면, ‘나는 이런 일을 겪어서 이렇게 극복했는데, 너도 이렇게 해볼래?‘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일생에 걸쳐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너무 쉽게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라고 위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실제로 다른 점이 있나?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기도해서 해결을 받았나? 해결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결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 ‘해결‘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상황이 나아지는 것? 아니면 내 태도가 달라지는 것? 내 감정이 변하는 것?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 중에서도 믿음이 보존되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뷔크너는 고통을 대처하는 일반적인 방법부터 설명한다. 고통을 그냥 잊는 것(11쪽),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 살아감으로써 그 상황을 견디는 것, 자신의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갇히는 것(12쪽), 자신의 고통을 농담거리로 만드는 것, 고통을 경쟁거리로 만드는 것(13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식은 고통의 좋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13쪽)라고 소개한다. ‘고통을 심지 않으시고 고통이 생기게 하지는 않으시지만, 그분은 우리가 고통 안에서 보물을 거두기를 기대하십니다.‘(15쪽)라고 달란트 비유를 해석하면서, 고통도 장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부를 다른 자아에게 내어 주고, 그 대신에 상대에게서 뭔가를 받는 일‘(16쪽), 그것은 곧 ‘자신의 고통으로 가는 문을 기꺼이 여‘는(17쪽) 일이다. ‘주인이 말했듯이 그들의 궁극적 상은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쁨이 고통의 끝입니다. 고통의 문을 통해 우리는 기쁨으로 들어갑니다.‘(20쪽) 뷔크너는 고통의 끝에 있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기쁨은 하나님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만 겪는 고통인 줄 알았던 문제에서 해방되었던 것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던 시절이었다. 뷔크너는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인생에나, 가장 운이 좋아 보이는 인생에도 고통이 있으며, 묻어버린 슬픔과 상처 입은 기억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열어 주는 이러한 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것을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라고 불렀다.‘(31-32쪽) 개인적으로, 이러한 순간들이 ‘은혜‘라고는 불릴 수 있지만 ‘거룩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일 일인가를 생각했다. 단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거룩한‘에 계속 매여 있었다. 아무튼, 이 은혜가 임함으로 고통의 청지기가 되는 문이 열리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기억하라‘는 방에 들어가라고 한다. 기억할 수 있는 일들과 기억할 엄두가 나는 일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15년 전쯤 읽었던 [참으로 소중한 나],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라는 책도 생각났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과거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이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이 과거이고, 이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귀하고 거룩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계속 행하실 거라는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완성하시고 실현하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40쪽) 하지만 역시, ‘하나님‘보다는 ‘우리‘가 중심이 된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간다. 죽은 사람을 소환(?)해서 그들과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 고통과 직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법왕국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지 않아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학을 그저 재미로만 읽는 나는 문학적 감수성이 넘쳐나는 비크너를 담을 그릇이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89쪽에 비크너를 읽으면 안 되는 사람이 나온다. 이 책을 감명깊게 읽으신 선생님이 이 부분을 보여주어서 나는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래에 적힌 구절에서 멈추게 된다. ‘정통교리를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풀어 주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된다.‘ 나는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황스럽게도,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에도 비크너를 읽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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