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 고통과 기억의 위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이문원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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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프레드릭 비크너/홍종락, 이문원 옮김, 비아토르)-전자책

이 책은 8월 마지막 날에 끝까지 다 읽은 책이다. 그런데 9월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도 서평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책 서평은 자꾸 미루고 미루고 미루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끝까지 다 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권일한 선생님이 좋은 책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과 나는 신학적 부분에서는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종이책으로 살지 전자책으로 살지 망설여졌다. 그러던 도중 비크너에 굉장히 감명받은 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전자책으로 사기로 결정했다. 전자책은 서평 쓰기가 힘들어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집에 책이 워낙 많으니 소장해야 할 책인지 아닌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은 자서전적인(?) 글이다. 비크너와는 신학적 부분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단,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필립 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다른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용서‘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던 그때와 같았다.), 그것은 비크너가 어릴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무기로 ‘나는 이런 일도 겪었어. 넌 절대 이해 못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해석한 대로 적어보자면, ‘나는 이런 일을 겪어서 이렇게 극복했는데, 너도 이렇게 해볼래?‘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일생에 걸쳐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너무 쉽게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라고 위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실제로 다른 점이 있나?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기도해서 해결을 받았나? 해결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결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 ‘해결‘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상황이 나아지는 것? 아니면 내 태도가 달라지는 것? 내 감정이 변하는 것?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 중에서도 믿음이 보존되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뷔크너는 고통을 대처하는 일반적인 방법부터 설명한다. 고통을 그냥 잊는 것(11쪽),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 살아감으로써 그 상황을 견디는 것, 자신의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갇히는 것(12쪽), 자신의 고통을 농담거리로 만드는 것, 고통을 경쟁거리로 만드는 것(13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식은 고통의 좋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13쪽)라고 소개한다. ‘고통을 심지 않으시고 고통이 생기게 하지는 않으시지만, 그분은 우리가 고통 안에서 보물을 거두기를 기대하십니다.‘(15쪽)라고 달란트 비유를 해석하면서, 고통도 장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부를 다른 자아에게 내어 주고, 그 대신에 상대에게서 뭔가를 받는 일‘(16쪽), 그것은 곧 ‘자신의 고통으로 가는 문을 기꺼이 여‘는(17쪽) 일이다. ‘주인이 말했듯이 그들의 궁극적 상은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쁨이 고통의 끝입니다. 고통의 문을 통해 우리는 기쁨으로 들어갑니다.‘(20쪽) 뷔크너는 고통의 끝에 있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기쁨은 하나님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만 겪는 고통인 줄 알았던 문제에서 해방되었던 것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던 시절이었다. 뷔크너는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인생에나, 가장 운이 좋아 보이는 인생에도 고통이 있으며, 묻어버린 슬픔과 상처 입은 기억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열어 주는 이러한 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것을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라고 불렀다.‘(31-32쪽) 개인적으로, 이러한 순간들이 ‘은혜‘라고는 불릴 수 있지만 ‘거룩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일 일인가를 생각했다. 단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거룩한‘에 계속 매여 있었다. 아무튼, 이 은혜가 임함으로 고통의 청지기가 되는 문이 열리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기억하라‘는 방에 들어가라고 한다. 기억할 수 있는 일들과 기억할 엄두가 나는 일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15년 전쯤 읽었던 [참으로 소중한 나],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라는 책도 생각났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과거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이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이 과거이고, 이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귀하고 거룩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계속 행하실 거라는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완성하시고 실현하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40쪽) 하지만 역시, ‘하나님‘보다는 ‘우리‘가 중심이 된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간다. 죽은 사람을 소환(?)해서 그들과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 고통과 직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법왕국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지 않아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학을 그저 재미로만 읽는 나는 문학적 감수성이 넘쳐나는 비크너를 담을 그릇이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89쪽에 비크너를 읽으면 안 되는 사람이 나온다. 이 책을 감명깊게 읽으신 선생님이 이 부분을 보여주어서 나는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래에 적힌 구절에서 멈추게 된다. ‘정통교리를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풀어 주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된다.‘ 나는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황스럽게도,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에도 비크너를 읽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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