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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허구성
정태홍 지음 / RPTMINISTRIES / 2012년 2월
평점 :
[내적치유의 허구성](정태홍, RPTMINISTRIES]
12월 마지막에 읽을 종이책으로 어떤 책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낙찰한 책이었다. 왜 골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원래 신랑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도 안 읽은 책이 많아서 신랑 책까지 넘볼 생각을 못했는데, 요즘 교회들이 워낙 심리상담과 교리를 섞어 가르치는 게(교리를 가르친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꼴보기 싫은 단계까지 도달해서 집어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표지가 아무런 디자인 없이 새빨갛기만 한 게 좀 부담스럽긴 한데 의도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용적 편집이나 맞춤법 부분에 있어서도 조금은 아쉬웠다. 또, 굳이 주서택목사의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분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주서택목사의 교재를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의 시작은 제이 아담스였다. 대학원에서 ‘기독교 상담의 이론과 실제‘ 강의를 들을 때 심리학 위에 신학을 쌓은 사람이 게리 콜린스, 심리학과 신학을 섞은 사람이 로렌스 크랩, 신학 위에 심리학-신학이 심리학에 우선한다-을 쌓은 사람이 제이 아담스라고 했었다. 게리 콜린스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워낙 비판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참고 문헌에 로렌스 크랩과 제이 아담스는 등장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또, 처음에 내가 좋아했던 로렌스 크랩은 상담을 배울수록 성경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제이 아담스로 옮겨 가게 되었던 건데, 이 책에서는 제이 아담스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1차 충격을 받았다(내가 서평 쓰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지점이다.).-(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제이 아담스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제이 아담스의 상담 이론은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본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잘 몰랐다. 내가 힘들었던 상처에만 집중하고 상담을 배울 생각을 했지, 내 문제의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물론 성경은 심리학 책이 아니고, 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상담을 공부하려 했다는 것도 한참 뒤에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았던 게 2012년 1월 말씀묵상캠프였는데, 말씀묵상캠프를 담당하신 목사님의 성경 묵상을 통한 질문과 통찰력이 상담을 통한 질문, 통찰력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상담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내 속의 어리석음을 발견했다. ‘아, 나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을 공부해서 채우려고 했던 거구나!‘ 그런데 이 책에서 똑같이 말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성경만으로 부족한 목사와 성도‘(24쪽)).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에서조차) 심리학을 외치는 교회들이 많다. ‘아무리 개혁주의 신앙을 외치는 분이라 할지라도, 심리학에서만큼은 너무나 관대하고 자상하고 포용력이 한이 없습니다. 심리학을 비판하는 사람을 광신자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가장 개혁주의적인 목사라고 자부하며 개혁주의 모임을 주도합니다.‘(27쪽) ‘결국 설교는 성경으로 하고, 가정사역은 심리학으로 하겠다는 생각입니다.‘(36쪽) 내가 제일 싫은 부분이 이런 부분이다. 개혁주의라고 한다면 칼빈의 5대 강령(칼빈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에 따라 ‘오직 성경으로‘여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심리학적 기술과 방법들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심리학적 기술과 방법을 동원하면서 개혁주의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는 대학교 4학년 때 읽었던 책이다. 그 책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볼 수 있을까?(주서택목사는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건, 주서택목사가 하는 이 방법 ‘시간여행‘은 브래드쇼의 명상 방법과 똑같았다(167~183쪽). 그렇다면 명상은 성령님의 인도인가?
또 다른 문제점은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과 주서택목사가 말하는 ‘속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속사람‘이 두 번 나오는데, 두 번의 내용 다 주서택목사의 ‘속사람‘(내면아이)과는 다른 의미이다(78쪽 참조). 비단 ‘속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 의미의 낱말과 성경에 나오는 낱말이 같은 뜻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용어 사용은 ‘속사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한 가지는 구상화(Visualization)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꿈은 이루어진다‘를 뜻한다. 내가 지난 여름에 [미라클모닝]을 읽으면서 찝찝했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바를 상상하고 소리내어 말해보라는 단계가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적이지는 않아서 그 단계를 뺐더랬다. 그게 아마 ‘구상화‘를 말하는 것 같다. 대학원에서 심리검사 수업을 들을 때도 이상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 그림이 답(미래)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 오는 날의 사람‘ 그림을 공부할 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구상화‘인 것 같다. 그 교수님이 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융이 영지주의를 끌어왔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인가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관상기도도 구상화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방언도 그렇지 않을까?(방언 유경험자임을 밝힘)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방언‘으로 보여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언의 유익은 거기서 끝이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방언은 아무 유익이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뜻도 모르는 소리를 계속 기도로 하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방언을 하나의 이적으로 본다면, 이적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에게서도 가능한 것이다.
‘구상화‘에서의 핵심은 ‘영적인 안내자‘이다(93쪽 참고). 나는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안내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가 제일 중요하다. 상상을 해서 떠오르는 대상, 그게 바로 ‘영적인 안내자‘이다. 기독교와 혼합이 되는 순간 그 ‘영적인 안내자‘는 예수님, 하나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주서택목사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기독교상담에서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는데, 기독교상담을 하면서 마음이 변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일까? 일반 상담을 하면서도 충분히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상담 아닌 것으로도 가능하다. 생각, 습관, 행동이 바뀌는 것을 전부 성령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반은총의 영역이 아닐까? ‘영적인 안내자‘는 예수님일까?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범신론을 인정하는 셈일 거다. 그렇다고 일반은총으로 보기에도 살짝 찝찝하다. 사실 나는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7권에서 이런 냄새(?)가 조금 났더랬다. 8년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지만.
‘내 과거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라는 결정론적 생각이 과연 성경적일까? ‘자아실현‘이 과연 성경적일까? 오늘날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행복‘은 ‘자아실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아실현‘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자기부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에 집착하는 것은 나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내 문제를 알아보겠다고 계속 과거를 파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더 집중할 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더 멀어진다. 나의 이해와 다른 사람의 이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해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해되어서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일 테니.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면아이‘로 돌아가서 지금의 나를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보겠다는 죄악된 생각이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속에 울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죄인‘으로서 나의 죄악을 회개하며 돌이키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83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며 과거가 우리를 이끌어 가지도 않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과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136쪽)
심리학이 기독교와 대치되는 이유 중 하나는 문제를 죄로 바라보느냐, 병리현상으로 바라보느냐의 관점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다루고 있기에 ‘인간은 죄인이다‘로 시작하는 기독교와 대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다. 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으려 할 테지만, 학교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구상화의 ‘영적인 안내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눈에 직접 보이는 대상만 ‘영적인 안내자‘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릭 워렌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여러 모로 아직 정리는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