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런 말 들어도 나는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그만 좀 하세요. 엄마가 그럴 때마다 해드릴 말도 없고, 정신 사나워 죽겠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꽃이 폈어. 그래서 어쩌라고, 응? 따달라는 거야? 아니잖아. 엄마 말이 맞는다고 해야 되는 거야? 매번 꽃 폈다고 중얼거릴 때마다내가 대체 뭐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건데요? - P148
잿빛의 마른 발,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 같은 손. 따뜻하고 풍성했던 엄마가 언제 이렇게 바싹 마른 고목이 됐나. 그런 엄마의 진을다 빼먹은 자신은 보기 싫을 만큼 퉁퉁해졌는데. - P150
하지만 모든 것을 효용과 쓸모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는 그에게서 점차 중요한 어떤 것들을 퇴화시켰다. 김성곤 안드레아는 차츰 감탄하는 법, 놀라는 법, 사물과 세상을 목적 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법을 잊어갔다. 그런 걸 잊은 사람에게서 진정한 미소나 여유 같은 게 우러나올 리가 없었다. - P152
감각 자체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인간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걸 김성곤은 아영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소중한 깨달음을 잊었고 대부분의 것들을지루하고 피로한 일상으로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 P154
퇴화된 감각들은 토라진 아이처럼 안으로만 촉수를 뻗었다. 자연히 성곤은 자신의 슬픔과 절망에만 과도하게집중했고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특히 가족을 탓했다. - P156
느끼라고, 느껴서 무언가를 하라고 주어진 몸뚱이였다. 돌처럼 가만있지 말고 세상을 향해 얼른 뛰쳐나오라고 온몸의 세포들이 부르짖었다. - P162
이런 총천연색의 감각을 느끼려고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걸까. 눈으로 본 걸 피부로, 귀로 들은 걸발끝으로, 심장의 울림을 지구의 흔들림으로 느끼고 싶어서 말이다. - P163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의문이 남았다. 대부분의 것들은 감각을 잠깐 스치고 금세 잊혔지만 어떤 것들은 감각의 기능이 끝난 뒤에도 메아리를 울렸다. 본 것의 잔상, 들은 것의 잔음, 냄새의 잔향 같은 건 언제, 어째서 생겨나는것일까.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성곤은 오토바이로거리를 내달리며 고민했다. 끝내 남는 건 뭘까. - P164
- 세상이 왜 지금 끝나지 않는 거지. 젊은 성이 물었다. - 이것보다 더 아름다우니까. 란희가 대답했다. - 아름다움은 사라져. 변하고 퇴색되지. 성곤의 말에 란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름다움은 남아. - P166
자신도 그다지동의하지 않는 시스템 안에 남들처럼 아이를 몰아넣고 성실함과 꼼꼼함을 강요하는 게 자주 찔렸다. 기껏해야 평소엔 많이 힘들지,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니라고 말하고, 힘이 부치는 날엔 그래 가지고 뭐가 되려고 그래, 너만 힘드니, 세상 사람 다 힘들고 너 정도면 배부른 거야,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평범하고 못난 엄마였지만. - P181
-응. 근데 그냥 지레 포기해버리는 거지. 밥 먹으면서 생각해봤는데 내가 한 말도 일종의 푸념인 것 같아. 희망차게 시작했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뻘쭘하잖아. 과거가촌스러워진다고. 그럴 바엔 차라리 시니컬하게 먼저 선수쳐버리는 거지. 어차피 안 될 거라고 말하면서. - P184
-아빠가 아영이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돼? 헤어지기 직전 성곤이 물었다. -철없다. 아빠. 그런 복잡한 건 자식한테 묻는 게 아니야. - P191
-사람은 자꾸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거든요. 돌보다 더 단단하고 완고한 게 사람이죠. 바뀌었다고생각한 그 순간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왜? 그게 편하니까 그 단계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은정말 드물죠. 그 시간까지 온전히 겪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기 자신에서 한발자국쯤 나아간 사람이 되는 겁니다. - P192
-모든 게 전부 운명인지, 아니면 내가 했던 행동과생각의 결과인지 말이야. 그러다가 문득 삶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 편하더라. 내 의지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내가 힘쓸 이유도 없어진 거야. 그런데 말야, 몸집은 이렇게 커졌지만 늘 어딘가가 비어 있다고 느꼈어. 그러다가 네메일을 받고, 네가하려는 프로젝트의 영상도 보게 됐지. - P207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지만, 변화의 반대말은 아무것도하지 않는 것. 스스로가 만든 지푸라기를 잡고 떠오릅시다! - P212
-(중략) 넌 절대로 원하는 만큼 한번에 이룰 수는 없어. 세상이 그렇게 관대하고 호락호락하지가 않으니까.근데 말이지, 바로 그만두는 건 안 돼. 일단 안 돼도 뭔가가 끝날 때까지는 해야 돼. - 언제까지요? - 끝까지. - 끝이 언젠데요. - 알게 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상황이 끝나든 네마음이 끝나든, 둘 중 하나가 닥치게 돼 있으니까.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다시 시작해야지.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뭘요? -되는 것부터.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중 되는 것부터. 운동이든 공부든, 책을 읽는 거든. 하다못해 나처럼 등을 펴는 게 됐든. 너 혼자 정해서 너 스스로 이뤄낼 수 있는 것부터. - P225
삶의 가장 큰 딜레마는 그것이 진행한다는 것이다. 삶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흐른다. 인과와 의미를 찾으려는노력이 종종 헛된 이유는 그래서이다. 찾았다고 생각한정답은 단기간의 해답이 될지언정 지속되는 삶 전체를 꿰뚫기 어렵다. 삶을 관통하는 단 한가지 진리는, 그것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뿐이다. - P237238
-그거 알아? 정말 어려운 건 힘든 상황에서도 어떤태도를 지켜내는 거야. 난 당신이 그걸 해낸 줄 알고 응원했어. 진심으로 노력해서 결국 바뀌었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신은 허영에 빠져 자만한 거였고 나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착각한 것뿐이었어. 잠깐은 모든 게 잘돼간다고생각했겠지. 상황 좋고 기분 좋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건쉬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바쁘고 여유없고 잘 안 풀리니까. 당신은 바로 예전의 당신으로 되돌아갔지. 그러니까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은 거야. 넌 끝까지 그냥 원래의 너 자신일 뿐이라고. - P252
- 세상에 던져졌으니 당연하지요. 태어나길 원하지도 않았는데 좁은 배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갑자기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던져졌잖아요. 인간은 탄생부터가 외롭고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무슨 수로 알겠어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일단 쥐어보는 거지요. 쥐었던 게 운 좋게 잘 풀리기도 하고, 이건아닌데 싶지만 쥐었던 걸 놓을 용기는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꼭 쥐고 있기도 하죠.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걸 빼앗아 가면 다시 세상에 던져진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불안해하는 겁니다. 손에 잡히는 것도, 의지할 데도 없이 발가벗겨진 채로 버둥거리고 있으니까. 다들 그러고 삽니다. - P258
박실영은 삶을 적으로 만들지도, 삶에 굴종하지도 않았다. 인생이라는 파도에 맞서야 할 땐 맞서고 그러지 않을때는 아이의 눈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관찰했다. - P259
ㅡ 잘 살펴봐요, 지나온 삶을 엉망이기만 한 삶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해. 박실영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고 성곤을 지그시 바라봤다. - 그리고 내 보기에 당신은 잘 살아온 것 같아요. 계속 삶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쓰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잘했어요. 아주 잘했습니다. - P260
김성곤은 이해할 수 없는 삶 앞에 겸허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삶에 대적하거나삶을 포기하려 하는 대신에, 삶과 동등한 입장에서 악수를 나누기로 했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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