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스토너](존 윌리엄스/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전자책

사람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려면 문학을 읽어야 한다. 요즘 내 마음이 딱딱한 것은 문학을 멀리해서일까. 대단한 책이라는 추천이 많은데,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서일까. 머리 식히고 시간 때우기용으로는 소설만한 게 없다.

[스토너]도 권일한 선생님의 책 목록 중에 있었다. [스토너]는 [대지] 같았다. 몇 년 전에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대지]를 읽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는데, [스토너]도 ‘한 사람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것 같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이 책은 스토너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문학 교수로 살게 된 스토너의 인생 이야기. 전체적으로 논하기에는 내가 소설을 감상하는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에, 부분적으로나마 마음에 남았던 구절들을 언급하며 서평을 이어 나가려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11쪽) 스토너가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영문학 교수 아처 슬론에 대해 글쓴이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 문장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한다. 20대에는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30대에는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40대에는 학생들이 아는 것을 가르친다고 했던가(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틈조차 없는 현실이다. 신기하게도, 그 ‘간격‘ 속에서도 스토너는 아처 슬론에게 매료되었다.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11쪽) 그후로 스토너는 달라진다. 마치 가드너가 말한 ‘결정적 경험‘을 한 사람처럼. 아처 슬론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수동적이었던 인생이 자의적으로 바뀌었다. 이 부분을 글쓴이는 ‘나중에,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그는 학부의 마지막 두 해를 되돌아보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돌아보듯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13쪽)고 묘사한다. 캠퍼스의 연인들에게 친밀함을 느꼈던 것은 스토너가 책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기에 자신의 장래를 ‘웅장한 대학 도서관‘으로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내가 두려움이 많은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토너는 후에 아처 슬론과 같은 교수가 된다. ‘신입생들에게 처음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허둥거리던 그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62쪽)
스토너는 이디스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결혼에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이디스를 보면서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과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43쪽)시킨다든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피로와 불안을 안고 있다든지. 그것은 아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데서 감정을 다른 곳으로 발산시키려 하는 반대급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것임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시간 속에 묻어버린 감정, 몸(32~33쪽에 이디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스토너와의 관계에서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물론 스토너도 이디스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잘 몰랐기에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감정을 얻을 수 있었다면, 이후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103쪽) 이디스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다.
스토너와 이디스 사이에 태어난 딸 그레이스는 이디스와 감정적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스는 엄마가 매우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엄마, 보고 싶었어.˝가 아니라 ˝모양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했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디스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그레이스를 소유하려 했다. 그 순간부터 그레이스는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이디스의 감정을 알았지만, 이디스는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적어도 겉으로는). 아마 이디스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또 이디스는 스토너가 집에 만들어둔 서재를 점점 축소시키면서 자신이 집 전체를 관장하려 했다. 마음 둘 곳 없어진 스토너는 학교로 눈을 돌린다. 계속해서 어긋나고 삐걱거린다.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깝다. 솔직하게 인정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아서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내가 제일 흥분했던 부분은 스토너가 워커와 로맥스에게 당하는 부분이었다. 스토너가 옳았지만(이야기가 워커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서 내가 글을 잘못 읽고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결국 스토너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억울함‘에 과민반응할 때가 많은데, 스토너는 억울한 사람이었다. 결국 스토너가 로맥스를 한 방 먹이는 것은 죽음을 앞두기 몇 년 전이었다. 이제 와서 한 방 먹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142쪽)

나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어떻게 평가를 내리게 될까? 지금 내리는 평가와 스토너가 죽을 때의 나이가 되어 내리는 평가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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