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이 살아있는 질문 수업 - 하브루타의 실제
양경윤 지음 / 테크빌교육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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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살아있는 질문 수업](양경윤, 즐거운학교)

이 책은 하브루타에 관한 책이다. 몇 년 전 하브루타 붐이 일었을 때 하브루타 연수를 듣고 이 책을 샀던 것 같다.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교육 방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나는 평소에 질문(혹은 발문)을 잘 못 던진다고 생각을 해서 이 책을 샀던 것 같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찾아 헤매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하브루타의 실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개론적 성격의 책(?)은 이미 출간된 모양이었다. 그 책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하지만, 이 책이 너무 수박 겉핥기 식의 책이라 읽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 편이라 이런 저런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권일한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만큼의 삶의 철학은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그냥 하브루타를 적용하는 방법을 소개한다는 느낌? 이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뒤에 나오는 독서 교육 부분 때문이었는데,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 쓴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에 나오는 독서교육 부분을 읽을 때에는 저자의 삶이 빠져 있어서 진정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나보다 훨씬 훌륭하신 분이신 것은 알겠고, 이런 저런 적용을 많이 하시고 열심히 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알겠고, 수업을 통해 아이들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으신 것도 잘 알겠는데,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 책이 선생님의 삶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래도 아이들보다는 수업에 더 초점이 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보다는 수업에 더 초점이 가 있다는 것. 기술적인 부분은 잘 서술되어 있지만 관계적인 부분이 빠져 있어서 아쉽다고 느낀 모양이다. 이 선생님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요즘 스스로에게 원론적인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편이다. 위에도 썼지만, 질문만 던지고 답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나는 왜 질문 수업을 하고 싶은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왜 수업을 잘하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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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존 오웬 전집 1
존 오웬 지음, 김귀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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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존 오웬/김귀탁 옮김, 부흥과개혁사)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세 번째 책이다. 예장 고신과 합동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책과 같은 내용 들어본 적 없고, 자세하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현재 고신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합동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요즘 전도서 영어성경 필사를 하고 있는데, 전도서의 영어명이 교회라는 뜻이고, 라틴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드물게 교사로도 사용된다고 하니, 교회는 가르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 책이 시작되기 전에 김남준목사님이 쓰신 [존 오웬의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해제]라는 소논문(?)이 실려 있는데, 나는 단순히 이 책을 요약 정리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더니(이 책 다 읽은 후에 읽었다.) 존 오웬의 신학적 기반이 되는 사상들을 정리한 내용이었다(이 책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풀어내시기도 했다.). 김남준목사님이 존 오웬 좋아하신다(?)는 것도 개혁주의 성경공부의 리더(?)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알게 된 것이다. 대학원 다닐 때 김남준목사님 말씀이 좋아서 열린교회에도 갔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청교도 신학을 연구하시는 분이 많이 없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만큼 개혁주의와 조직신학에 대해 심도 있게 가르치시는 분들을 만난 적이 없다.-하지만 열린교회의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죄에 대한 성경 본문(롬 7:21)에서부터 시작한다. 롬 7:21에서 도출한 것은 네 가지 사실인데, 1. 죄는 곧 법이다(죄의 법의 이중적 의미는 죄의 존재와 본질, 죄의 힘과 효능이다.). 2. 죄의 법은 신자들 안에서 발견된다. 3. 신자들의 의지의 경향적인 성향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것이다. 4. 신자들 안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1부).
이 책에서는 죄의 효능과 힘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3부), 특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효능과 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처음에 죄의 법의 특징에 대해 다루고, 그 다음 내재하는 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다룬다. 여기서 죄의 법의 주체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마음이라고 하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오웬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지성, 의지, 정서, 양심의 기능을 묶어 마음이라고 한다고 정의한다. 오히려 ‘마음이 지성, 의지, 정서, 양심의 기능을 묶은 것이다.‘라고 정의하니까 마음에 대해 한결 이해가 쉬워지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반론이 없는 한, 오웬이 말하는 마음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다(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합리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 마음의 속성, 내재하는 죄의 속성을 다루는데, 마음의 속성을 다룰 때 내가 마음에 대해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이 나를 기만할 때가 많은데, 나는 그 사실을 늘 흐지부지 넘어가면서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물론, 그 다음에도 스스로 기만하는 것은 되풀이된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늘 마음에 자리잡은(?)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을 말씀보다 더 믿었다는 깨달음이 생기자 신앙생활을 이렇게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의 행위와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죄가 싸운다고 말하는 데에도 조금 정신이 들었다. -죄는 싸운다. 내가 지치고 싸움에 패하도록 물어지고 끈덕지게 싸운다. 한 번 싸워서 이긴 것처럼 보일 때 끝내면 되는 싸움이 아니다.
죄가 어떻게 속임으로 역사하는가에 대해서 크게 5단계로 살펴보는데, 140쪽에 잘 나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지성을 끌어내리고, 두 번째 단계는 정서가 미혹되고, 세 번째 단계는 죄를 잉태시키고(의지와 관련), 네 번째 단계는 실제로 수행되어 죄를 낳고, 다섯 번째 단계는 죄가 장성하는 것이다. 오웬은 지성이 어떻게 끌어내려지는지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지성이 한 번 끌어내려지면 그 뒤는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 부분을 보고 현대 상담치료의 하나인 인지행동치료가 생각이 났다. 인지행동치료에서 생각이 정서와 행동을 바꾼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동안 좋아했던 로렌스 크랩이 인지치료를 지지하기도 했다(여기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다음으로 넘긴다.).
오웬에 의하면 죄를 파괴하는 데 적합하고 유용한 수단은 묵상과 기도이다(158쪽). 내가 묵상과 기도를 게을리하는 데에는 죄의 힘을 크게 여기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마음도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했지만, 죄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오웬이 이렇게 하나씩 짚어주니, 속임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일시적 즐거움을 위해 일부러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3부에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주의 깊게 다룬 후 4부에서는 일반적인 죄의 효능과 힘에 대해 다룬다.

이 책의 내용은 이 말이 그 말 같고, 그 말이 이 말 같은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몇 번이나 문장을 다시 읽어야 했다.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지만, 죄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책 내용을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한 바가 많아서 적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다 적기에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 못 적어 아쉽다. 위에 쓴 서평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려고 하니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끝으로,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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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책 이야기 - 아이들과 함께하는 두근두근 독서 교실
권일한 지음 / 우리교육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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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책 이야기](권일한, 우리교육)

이 책은 세 번째 읽는다. 제일 처음 읽을 때는 끝까지 다 읽지 않았고(내 독서 성향이 이 책 저 책 막 읽는 성향이라 그렇다.), 작년에 두 번째 읽었고,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라 세 번째 읽었다. 책에 띠지를 붙여 놓았는데, 처음 읽을 때는 파란색 띠지로 윗 부분에 붙였고, 두 번째 읽을 때는 광택 나는 띠지로 옆에 붙였고, 세 번째 읽을 때는 종이 띠지로 옆에 붙였다. 이상하게도 띠지를 붙인 곳이 달랐다. 작년에 다가오는 부분이 있었고, 올해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이번에는 오히려 첫 번째 띠지를 붙인 곳과 겹치는 곳이 두 곳 있었다. 소개할 만하면 소개해 보겠다.
나는 오히려 ‘들어가며‘와 ‘나가며‘에서 감동을 받았다. ‘들어가며‘에 소개된 [오즈의 마법사]는 나에게는 그냥 재미있는 동화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즈의 마법사]의 작가가,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으로 두뇌와 심장과 용기, 고향을 꼽았다(7쪽)고 소개하신다. 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질문만 던졌다. 답은 찾지 않았다. 또, 책을 읽는다고 무조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랬다. 이야기라서 읽었고, 재미있어서 읽었다. 단지 그게 다였다. 서평을 쓰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나지 않는데, 그래서인지 예전에 읽은 이야기 책 중에 기억나지 않는 책도 많다. 7년 전에 [나니아 연대기]를 딱 한 번 완독했는데, 그 뒤로는 읽지 않아서 지금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뜨문뜨문 기억날 뿐이다.
‘1부 행복한 책벌레가 되기 위한 마음의 준비운동‘을 읽으며 여러가지 발제문을 생각했다(그냥 저절로 생각났다.). 1부 표지를 한 장 넘기면 이권우 님의 글이 제일 먼저 나온다.

좋은 책이란 그 책을 읽고 났더니
다른 책을 더 읽고 싶어 하는 욕심이 생기게 하는 책이다.(16쪽)

나에게 다른 책을 더 읽고 싶어 하는 욕심이 생기게 하는 책이 있었나? 나는 이 책이 그랬다. 이 책에 나오는 책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끔씩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들을 소개하는 책을 만나면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몇 달 전에 읽은 [독서모임 꾸리는 법] 책 부록에 소개된 책들도 읽고 싶었고, 몇 년 전에 읽다 말은 [한 권으로 꿰뚥는 시편] 읽으면서 본 회퍼의 [시편 이해]를 사서 읽었다. 그리고 20대를 지나면서 한 작가의 책에 꽂히면 그 작가의 다른 책을 사서 읽었다(대표적인 사람이 필립 얀시, 이용규선교사님이었다.). 책은 다른 책을 부른다.
또,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무엇일까?‘라는 질문도 생각해 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곱씹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내가 여러 번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질문은 45쪽 ‘나에게 좋은 책 목록‘과도 이어진다. 선생님 한 분이 책꽂이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고 해서 내가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나는 어떤 책을 명예의 전당에 꽂게 될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명예의 전당 목록도 계속 바뀔 것 같은데, 지금은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 [어린왕자]를 꼽을 것 같다. [한 아이]도 좋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도 있지만, 아직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탓에 명예의 전당에 올려두지 못한 것 같다(그렇다고 명예의 전당에 올리고 싶은 책들을 다 소화시킨 것은 아니다.).
‘나는 책을 왜 읽나?‘도 생각해 보았는데, 정말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생각하기 싫어서 이유가 없다는 말로 둘러대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르에 따라 읽는 까닭이 다른데, 소설이나 동화는 재미있어서이고, 전문서적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다. 내가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한편으로 246쪽에 나열된 책을 읽는 목적 중 지식을 쌓기 위해서와 배우기 위해서는 다른가, 라고 생각한다.). 권일한선생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책을 읽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책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에게 책예찬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발제문으로 ‘나의 책읽기 여정‘은 어떨까도 생각했다. 이때까지 읽어온 책들을 나열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책 읽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글쓰기와 말하기(토론)까지 이어진다.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활동은 통합적이기에 어느 것 하나 끊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세 번째 읽는 거라 그런지 조금 더 마음에 여유를 두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읽을 때는 책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지만, 계속 읽다보면 책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께서 책읽기 지도하시는 전체적인 그림이 조금 그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그림이 완성되면 나도 조금은 따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계속 읽어야 하는 책이다.

독서모임 운영자님께서 오늘 발제문을 주셨다.
1. 선생님은 책을 왜 읽으시나요?
2. 이 책을 30자 내외로 요약해 볼까요?
3. 우리는 권일한 선생님의 책을 두루 읽고 있는 중입니다. 세 번째 책을 읽은 지금, 권일한 선생님이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선생님께 배운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 주세요.
4. 책과 관련된 특별한 추억을 이야기해보아요. 선생님만의 행복한 책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번은 서평에서 적었고,

2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는, 책을 읽고 뜯고 씹고 맛보아 소화시키는 방법.
7글자로 적는다면, 책을 사랑하는 법.
(원래 띄어쓰기도 글자에 포함시키지만 여기서는 예외로 한다.)

3번.
생각나는 성경구절로 대신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깨달으면 좋겠다.

4번.
나도 선생님처럼 차 타면서 책 읽어도 멀미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ㅋㅋㅋㅋㅋㅋ
어디든지 (읽지 않더라도) 책을 들고 다닌다는 점?
밤새 읽은 [백파선].
몇 주에 걸쳐 새벽까지 이불 속에서 읽은 [나니아 연대기].
책과 멀어진 내게 신랑이 밤마다 읽어준 [한국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2].
시립도서관을 기웃거렸던 중학생 때, 책 읽고 처음 울었던 경요의 장편소설 [너 없는 사랑].
동생이 빌려온 책, 동생은 안 보고 내가 봤던 [해리포터] 시리즈 1-4부.-대학생 때
12년쯤 지나 학교에서 빌려봤던 [해리포터] 시리즈 5-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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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모던 클래식스 7
제임스 패커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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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제임스 패커/정옥배 옮김,IVP)

이 책은 수 년 전, 거제요회에서 함께 읽었던 책이다. 그때 끝까지 다 읽지는 않았고, 뒤에 다섯 챕터 정도를 안 읽었다가 이번에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게 되어 다 읽었다.
제임스 패커는 존 스토트와 함께 WCC를 찬성한 신학자라고 하는데, 이 책 이전에 읽었던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이 책이 더 읽기 어려웠다. 그 이야기를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했더니, 제임스 패커는 교수 쪽이고, 존 스토트는 목회 쪽이라고 한다. 이 모임이 조직신학 쪽이고, 이제껏 접해왔던 성경신학 영역과는 또 다른 분야(성경신학을 많이 팠다면 조직신학에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르나, 조직신학에 이르기까지는 내 성경신학 밑천이 얕아서)라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아무래도 성경신학은 귀납적이고, 조직신학은 연역적인 것 같아서, 내가 연역법에 약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는 성경신학적인 부분이 많으니 귀납적일 것이고, 교수는 조직신학적인 부분이 많으니 연역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존 스토트를 더 쉽게(그럼에도 그 책도 어려웠다.)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이제껏 성경신학을 더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제일 첫 파트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나는 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가?‘였다. 이 질문은 상담 공부를 하며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나에게, ‘나는 왜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가?‘의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통찰력을 달라는 기도를 한동안 하다가 하지 않았는데,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상대방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 없이 통찰력을 얻고자 하면 그 통찰력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을 위한 상담사례발표 정리를 하면서 느꼈지만, 직면은 되지만 공감이 되지 않았기에 공감 없는 직면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원했던 통찰력은 아마 직면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까닭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내 지식 추구의 만족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마땅할까. 하나님의 지혜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에 주목하는 것, 셋째로,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넷째로,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57쪽)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나 포함),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피상적인 앎일 뿐일 것이다. 피상적으로 알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임스 패커는 지혜를 얻기 위한 선행조건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158쪽)
1.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던 잠언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자녀,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내적 시련 세 파트가 나에게는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하나님의 자녀 파트에서 양자됨에 대해 말하는데, 양자됨에 대해 이제껏 생각해온 바는 너무 단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마세요‘라는 찬양이 있다(사실 찬양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초점은 온통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 있는데, 이것이 자기 찬양이 아니면 무엇인지 말이다.). 그 물음이 ‘왜 신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인도하시는가?‘의 질문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악의 구렁텅이로 걸어들어간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은 왜 악의 구렁텅이를 허용하시는가?‘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큰 계획을 다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막아놓으셨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악의 구렁텅이나 고난을 통해 신자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짜 사랑은, 믿음은, 힘들 때 드러난다. 위기의 때에 드러나는 내 믿음은, 위기로 약해진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이 그만큼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파트를 읽으면서, 4년 전 일을 겪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371-373쪽에 보면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 나오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와 같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하나님의 인도를 ‘본질적으로 기록된 말씀과는 별개로 성령이 주시는 내적 충동‘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대학생 때 수양회를 가면 ‘하나님의 뜻 알기‘ 이런 선택강의가 항상 있었다. 그 강의 내용이 어땠는지 들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었다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패커의 용어로 ‘소명을 위한 선택‘에서 주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인도를 찾는다. 이 ‘소명을 위한 선택‘이 바로 결혼을 할까요, 말까요, 어떤 직업을 가질까요, 등등의 질문을 말한다. 패커의 답은 이렇다. ‘이러한 문제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 적용해서 해결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선택이 어떠한 적법한 가능성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경계를 정하는 것 뿐이다. 성경이 어떤 사람의 선택을 직접 지도해 줄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충동과 기호와 성향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도의 문제가 이와 똑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추정이 있으며, 둘째, 모든 사람의 삶을 이런 종류의 인도를 추구해야 하는 영역으로 다루는 면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만 하면 세상과 육신과 사탄이 우리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환경과 인간관계도 결코 우리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역시 자신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해롭다. 잘못된 주장이기 때문이다.(389-390쪽)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 믿기만 하면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비신자에게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책 뒷부분 해설 458쪽을 보면 이 책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그리고 해설 뒤에 연구 및 토론문제가 있는데, 수 년 전 이 책을 읽을 때 연구 및 토론문제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책 뒷부분도 유심히 볼 걸 그랬다.) 이 부분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바로 그만큼만 진정 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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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반양장) - 개정판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4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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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로알드 달 글/퀸틴 블레이크 그림/김난령 옮김, 시공주니어)

돌봄교실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에 있다가 발견한 책이다. [마틸다], 많이 들어봤는데, 생각하다가 한 장 두 장 넘기니 왠지 권일한 선생님이 이야기한 책인 것 같았다. 표지를 살피니 로알드 달 책이다. 권일한 선생님 책에서 [로알드 달의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 책을 언급하신 기억은 있는데, [마틸다]도 언급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로알드 달 책이니 잘 골랐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읽었다.
이 책은 신나는 책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편견을 가지기 쉬운 다섯 살짜리 꼬마 여자아이가 자기 부모님을 혼내고, 교장선생님을 혼내는 이야기다. 물론,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서. 아무 때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부당하게 자신을 대할 때 머리를 써서 어른을 혼냈다. 어떻게 저런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을까?(물론 마틸다는 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긴다.) 마틸다의 복수를 읽으면 사이다를 마시는 느낌이다.
복수는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불편한 이야기이다. 용서와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에서 복수를 말하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마틸다가 하는 행동들을 읽으며 대리만족에 통쾌한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일까? 억울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그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혼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틸다는 구체적인 계획 아래 복수를 하는데, 나는 그런 구체적인 계획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와 밀착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 관계를 깨뜨리면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혼낼 마음이 있을까?
마틸다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았다. 교장선생님도 사랑하지 않았다. 마틸다가 그들을 혼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마틸다를, 그리고 마틸다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헤꼬지를 하는 것은 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로 돌아간다면, 혼낼 마음이 있을까, 라고 묻는 것 자체에서 내가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 대상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그 대상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달랐지만- 갈등하는 것이 아닐까.
이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비어있는 소리다. 설교 시간에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진심이 느껴지면, 사랑할 수 있다. 아직까지 내 단계는 여기까지다.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더 나아가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대접하면 나도 그렇게 잘 대접하겠다는 생각이 드러난다. 남에게 대접받은 대로 내가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대접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을 보다보니 매우 옛날에(수십 년 전이므로) TV로 어린이드라마처럼 [마틸다]를 상영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마틸다는 초능력을 부릴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그 아이가 이 아이였나 보다. 그 어린이드라마(?)보다는 책이 훨씬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책을 넘어서는 영화는 이때까지 보지 못했다.
로알드 달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졌다. 도서관에 또 가게 된다면 [로알드 달의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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