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모던 클래식스 7
제임스 패커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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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제임스 패커/정옥배 옮김,IVP)

이 책은 수 년 전, 거제요회에서 함께 읽었던 책이다. 그때 끝까지 다 읽지는 않았고, 뒤에 다섯 챕터 정도를 안 읽었다가 이번에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게 되어 다 읽었다.
제임스 패커는 존 스토트와 함께 WCC를 찬성한 신학자라고 하는데, 이 책 이전에 읽었던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이 책이 더 읽기 어려웠다. 그 이야기를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했더니, 제임스 패커는 교수 쪽이고, 존 스토트는 목회 쪽이라고 한다. 이 모임이 조직신학 쪽이고, 이제껏 접해왔던 성경신학 영역과는 또 다른 분야(성경신학을 많이 팠다면 조직신학에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르나, 조직신학에 이르기까지는 내 성경신학 밑천이 얕아서)라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아무래도 성경신학은 귀납적이고, 조직신학은 연역적인 것 같아서, 내가 연역법에 약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는 성경신학적인 부분이 많으니 귀납적일 것이고, 교수는 조직신학적인 부분이 많으니 연역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존 스토트를 더 쉽게(그럼에도 그 책도 어려웠다.)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이제껏 성경신학을 더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제일 첫 파트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나는 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가?‘였다. 이 질문은 상담 공부를 하며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나에게, ‘나는 왜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가?‘의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통찰력을 달라는 기도를 한동안 하다가 하지 않았는데,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상대방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 없이 통찰력을 얻고자 하면 그 통찰력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을 위한 상담사례발표 정리를 하면서 느꼈지만, 직면은 되지만 공감이 되지 않았기에 공감 없는 직면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원했던 통찰력은 아마 직면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까닭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내 지식 추구의 만족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마땅할까. 하나님의 지혜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에 주목하는 것, 셋째로,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넷째로,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57쪽)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나 포함),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피상적인 앎일 뿐일 것이다. 피상적으로 알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임스 패커는 지혜를 얻기 위한 선행조건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158쪽)
1.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던 잠언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자녀,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내적 시련 세 파트가 나에게는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하나님의 자녀 파트에서 양자됨에 대해 말하는데, 양자됨에 대해 이제껏 생각해온 바는 너무 단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마세요‘라는 찬양이 있다(사실 찬양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초점은 온통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 있는데, 이것이 자기 찬양이 아니면 무엇인지 말이다.). 그 물음이 ‘왜 신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인도하시는가?‘의 질문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악의 구렁텅이로 걸어들어간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은 왜 악의 구렁텅이를 허용하시는가?‘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큰 계획을 다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막아놓으셨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악의 구렁텅이나 고난을 통해 신자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짜 사랑은, 믿음은, 힘들 때 드러난다. 위기의 때에 드러나는 내 믿음은, 위기로 약해진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이 그만큼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파트를 읽으면서, 4년 전 일을 겪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371-373쪽에 보면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 나오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와 같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하나님의 인도를 ‘본질적으로 기록된 말씀과는 별개로 성령이 주시는 내적 충동‘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대학생 때 수양회를 가면 ‘하나님의 뜻 알기‘ 이런 선택강의가 항상 있었다. 그 강의 내용이 어땠는지 들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었다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패커의 용어로 ‘소명을 위한 선택‘에서 주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인도를 찾는다. 이 ‘소명을 위한 선택‘이 바로 결혼을 할까요, 말까요, 어떤 직업을 가질까요, 등등의 질문을 말한다. 패커의 답은 이렇다. ‘이러한 문제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 적용해서 해결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선택이 어떠한 적법한 가능성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경계를 정하는 것 뿐이다. 성경이 어떤 사람의 선택을 직접 지도해 줄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충동과 기호와 성향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도의 문제가 이와 똑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추정이 있으며, 둘째, 모든 사람의 삶을 이런 종류의 인도를 추구해야 하는 영역으로 다루는 면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만 하면 세상과 육신과 사탄이 우리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환경과 인간관계도 결코 우리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역시 자신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해롭다. 잘못된 주장이기 때문이다.(389-390쪽)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 믿기만 하면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비신자에게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책 뒷부분 해설 458쪽을 보면 이 책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그리고 해설 뒤에 연구 및 토론문제가 있는데, 수 년 전 이 책을 읽을 때 연구 및 토론문제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책 뒷부분도 유심히 볼 걸 그랬다.) 이 부분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바로 그만큼만 진정 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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