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 개정 양장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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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무라카미 하루키/윤성원 옮김, 문학사상)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어둠의 저편]을 통해 알게 되었다. 10년도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색채가 너무 너무 어두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알베르 까뮈 같은, 그리고 야시마 타로 같은 사람. 극도의 어둠의 색깔 때문인지 이 책은 오히려 밝게 느껴졌다. ‘아, 어두운 사람이 아니구나.‘ 이 책의 첫인상이었다.
이 책은 하루키가 부인과 함께 그리스, 로마,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기억나는 장면은 하루키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섬에 다녀온 것, 로마를 매우 안 좋은 관점으로 바라본 것, 여행지에서 달리고, 공연 보러 다닌 것 등을 꼽을 수 있겠다.
하루키 부부의 여행은 1986년부터 3년 동안 지속되었다. 3년 동안 여행을 다닌 삶이 왠지 부러웠다. 바로 옆에서 하루키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1980년대 이야기라니 놀라웠고, 독서모임을 하면서 로마의 모습이 1980년대에나 최근 몇 년 전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고경진선생님 말씀에 놀라웠고, 1980년대 당시에 자식을 중요하게 여겼을 일본 문화 속에서 딩크로 살아갔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1980년대의 하루키는 나와 비슷한 연배였다는 것도 신기했다(?). 하루키가 만들어낸 소설 속 인물에만 집중했지, 작가 하루키, 인간 하루키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 특유의 여행 색깔이 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이 다니는 곳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간다. 도서관만 다니시는 분도 봤고, 책방만 다니시는 분도 봤고, 역사(세계사)여행을 하시는 분도 봤고, 묘지를 다니시는 분(김영하)도 봤다. 나의 여행 색깔은 아직까지는 ‘도장깨기‘이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인지 다른 사람이 가보았다고 하는 곳을 가보면서 과연 갔다온 사람들이 평가한 내용과 동일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보겠다는(이 시점에서 베뢰아 사람들이 생각나는 건...) 마음인 것 같다. 주로 블로그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데 과장된 곳도 있고, 갈 만한 곳이었던 곳도 있었다. 나는 주로 (레일바이크, 유람선 같은) 무언가를 타면서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건 아마 여행의 목적이 ‘탈출‘(혹은 ‘일탈‘)에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싶다. 내가 학교를 갑갑하게 여긴다는 방증일까.
하루키가 이탈리아를 매우 안 좋게 얘기했지만, 이탈리아는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신랑이 결혼 전에 가려다 안 간 곳이어서이기 때문이다. 신랑이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던 터라 친퀘첸토, 첸토벤티세이만 듣고도 500, 126이라는 것을 알아서 깜짝 놀랐다(물론 그 전에도 ‘팬텀싱어‘ 들으면서 이탈리아어로 된 노래가 나오면 무슨 뜻인지 척척 말해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불편하겠지만, 언제 한 번 꼭 가보고 싶다.
기독교인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이 땅에서 나그네 인생을 산다고는 하는데 사실상 안 그런 사람들도 많고, 나도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살고 있나 싶을 때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객으로서 산다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5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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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누구의 인정도 아닌 -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
이인수.이무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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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인정도 아닌](이인수*이무석, 위즈덤하우스)-전자책

실패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여 마음고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고생이 자기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판단에 기인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살펴보는 것도 자기 수용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작년에 네이버에서 어떤 검사를 했는데 ‘전문가 Tip!‘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처음에 읽고서는 자기반성일까, 인정중독(그 당시에는 인정중독임을 알지 못했다.)일까 헷갈려 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문구를 캡처해 두고 가끔씩 꺼내 읽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금은 인정중독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올해 유난히 ‘행동하지 않는 나‘에 포커스를 두고 책을 읽었던 달이 있었다. 나를 움직이는 근원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흘러온 책이 이 책이었다. 읽으며 확신했다. 나를 움직이는 동기는 인정이었구나. 읽는 구절 구절마다 내 얘기인 줄 알았다.
‘인정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타인의 평가에 유독 예민하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만 마음이 안정된다. 그래야 자신의 가치도 확인된다. 이들에게는 ‘인정받는다‘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 인생의 목표 자체가 인정받는 것이다. 개인적 행복이나 삶의 의미는 뒷전이다.‘(5쪽)
존경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인정하는 말을 하면 그 말이 나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된다. ‘나, 제대로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교단에 서서 가르치는 햇수가 늘어날수록 문제가 보였다.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잘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학급 경영 방식들을 내가 따라하더라도, 내 방식(가치관)이 아니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것은 아마 내가 ‘타인이 원하는 모습인 거짓 자기(false self)로 살아가게‘ 되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고, 진짜 내 모습이 무엇인지도 혼란스러‘(12쪽)웠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여느 상담 책이 그러하듯, 어릴 때의 양육방식이 내 모습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그 탓을 돌릴 생각은 없다. 경제적으로 독립하며 정서적으로도 독립하기 시작했던 것 같고, 그게 이미 16년차를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나‘가 있기에 ‘지금의 나‘가 있다. ‘과거의 나‘가 불행한 세월을 살았다고만 생각하기에는 ‘지금의 나‘가 불행하지 않다. 기억은 얼마든지 왜곡되기 마련이고, 언제나 자신이 유리한 대로만 기억한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주지만,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현재를 성장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대학원 교수님마다 내 반응에 대한 상담 방법이 다르시겠지만, 어떤 교수님은 그 아이를 위해서 울어주라고 했을 것 같고, 어떤 교수님은 내가 유년기 때에 겪은 경험을 말해보라고 하시며 그때 내가 얻게 되는 이득이 무엇인지 물어보셨을 것 같다. 적고 보니 앞의 교수님은 공감을, 뒤의 교수님은 직면을 의미하는 것 같긴 하다. 쓰면서 드는 생각은,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를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미 울 만큼 울었다. 더 이상 슬퍼할 것도 없다. (과거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나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가 부모님께 바라던 사랑의 방식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방식을 기대하지 않는다. ‘새로운 관계를 경험‘(42쪽)함으로써 기대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인정중독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관계‘ 또는 ‘치료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관계‘를 경험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감정 경험이 있었다면 이것을 기록해보자. 특히 도움이 되는 것은 그때 내 마음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고 기록하는 것이다.‘(43쪽) 1년 동안 내가 가장 싫어했던 일은 교장실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한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교장선생님께 ‘‘인정받음‘을 통해 안심하고 싶‘(49쪽)었던 것 같다.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해지니까, 교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회피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랑을(사랑만)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거부반응이 있다. 사랑을(사랑만) 강조하는 사람 중에 (나처럼) 원리원칙주의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강조하면 모든 사람을-원리원칙주의자인 나까지도- 다 수용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왜 원리원칙주의자가 되었는지 내 이야기는 모르면서 무조건 원리원칙보다 사랑을 앞세워야 돼,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던 것 같다. 사랑을(사랑만) 강조하는 사람에게도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모양이다. 내면의 부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당연히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내 삶을 희생해왔기 때문이야!˝(56쪽) [밉스 가족의 특별한 비밀]이 떠오른다.
상담을 공부했어도, 공감능력이 부족하니 자기 공감이 잘 안 되는 상태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쉽지 않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이후로 인지상담에 빠져(?) 있기도 하고, 직면을 이상화하고 감정을 평가 절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를 보기 위해 다시 대학원에 가서 선생님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언제까지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을 건지 답답하기도 하다. 한편으로, 인정중독이라는 것을 인지했으니 인정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유롭게 되기 위한 발걸음을 떼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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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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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전자책

이번 달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이다.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술술 넘어가는 책이다. 하지만 독서모임 책이 아니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책이다. 페미니즘이 강하게 드러나는 책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지난 달에는 이 책을 영화화한 [82년생 김지영]을 추석 특선 영화로 봤다. 영화로 봤을 때는 김지영 씨 남편인 정대현 씨가 너무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에서도 너무 소극적이었다. 그만큼 가정보다 일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겠지.
나는 83년생이다. 82년생 김지영 씨와는 우리나라 나이로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더 공감이 잘 되겠다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나는 이 책 내용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나 역시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이 흔한 세대를 살았다. 그럼에도 감흥이 없었던 건, 남동생이 있지만 누나의 권위가 유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원가족에서 친가 쪽은 고모의 자녀들을 제외하면 내가 첫째인데,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나를 엄청 예뻐하셨다. 할아버지가 나를 엄청 예뻐하셨다는 것을 안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더러 동생이 나한테 대들면 쌔려주라고(?!) 하셨다. 엄격했던 엄마마저도 동생이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든든한 벽이 되어 주기도 했다(그래서 남동생은 나한테 ˝야!˝라거나 이름만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엄격했던 엄마 덕이다.). 아빠는 딸바보셨기 때문에(ㅋㅋㅋㅋㅋ) 책에 나오는 것처럼 아들만 예뻐하진 않아서 공감이 덜 되기도 했다. 이런 가정 환경이었으니 남아선호사상, 남녀차별은 사실 다른 세상 얘기였다. 학교에서 남자가 앞 번호인 것도 별로 불만 가진 적이 없었는데, 급식 먹을 때뿐 아니라(물론 나는 국민학교 때 급식을 고작 3개월 정도만 먹어서 누가 먼저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평가받을 때도 앞 번호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특별히 앞 번호가 더 혜택이 많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거기다 나는 소위 ‘경단녀‘가 될 가능성이 극히 낮고, 여성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직업군이라 사실상 대부분의 힘든 일을 남자 선생님이 하고 있는 직업 환경이다. 신랑마저도 프리랜서라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더 동떨어진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결혼도 늦게 했고, 김지영 씨 같은 시댁 분위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82년생 김지영이 없었던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 뿐.
개인적으로, 여성들이 받는 온갖 불합리함이 ‘여성혐오‘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책의 주장-정확하게는 여성학자 김고연주 님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이기에 불합리한 점도 있었지만, 여성이기에 얻는 혜택도 있었다(물론 그 혜택 안 받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견도 존중한다.). 남성들과 같은 선에서 동등하게 대우받고 싶은 여성들도 있지만, 여자라는 연약함을 이용해서 남성 뒤에 숨으려고 하는 여성들도 있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남성들과 같은 선에서 동등하게 대우도 받고 싶고, 여성의 연약함을 어필하고도 싶은 것 같다.
성역할 고정관념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들 하는데, 그래, 그 말은 맞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단, 그 일에서는 비슷한 능력치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육군 특전사 부대인 707에서는 남자가 받는 훈련을 여자가 똑같이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여경은 남경과 다른 채용 조건으로 선발된다. 경찰이 되어 하는 일은 똑같은데 왜 선발 기준은 다른 걸까?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여성혐오‘로 바라보기보다는 힘, 권력의 남용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남자가 그 힘을 여자에게 나누지 않으려 하고, 여자는 그 힘을 가지려는 데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남자의 상사가 여자일 때도(힘이 있을 때도), 여자의 상사가 남자일 때와 비슷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기업은 개인보다 강하고, 기업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선택한다. 여성을 혐오해서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갑의 자리에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식 사고방식을 취했던 것 뿐이라는 말이다(물론 이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추측컨대,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힘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힘을 뺏기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이상 이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힘을 가지기는 쉬워도, 나눠주기는 어렵다.

(페미니스트 지인님들,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논쟁하려는 마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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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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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수용소](랭던 길키/이선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10월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으로 읽었다. 한 번씩 서평을 쓰는 게 부담스러운 책들이 있다. 그 책들은 서평을 쓰는 것을 계속 미룬다. 이 책이 그런 책이다. 이 책을 다 읽은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서평을 쓰는 게 두려웠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다고 서평을 쓰는 지금 서평을 쓰는 게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고, 생각을 다 정리한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사람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때 인간이 얼마나 비도덕적인지, 한 사람이 어떻게 권력을 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용소 밖에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진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전문가 정신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났으며 학문적인 목소리는 침묵을 지켜야 할‘(65쪽) 위기에 있었다.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신념보다도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물질적인 문제‘(145쪽)이기 때문이었다.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자아실현의 욕구는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철학을 가르치고 기독교 복음을 설교하는 일이 삶에서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150~151쪽) 지금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충족되어야 할 욕구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복음이 쓸모가 있는가?‘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초점은 그 ‘욕구들‘에 향하고, 복음에 향하지 않는다(한편으로, 교회가 사람을 돕는 목적-교회가 사람의 욕구에 초점을 두는 것-이 이웃사랑의 발로인지, 교회 세력의 증가인지를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의 욕구들을 해결해주기 위해 교회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충족해야 한다고 여기는 욕구들을 교회에서 해결해 주면서 덩치를 불렸다. 알다시피,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 시작은 욕구이지만, 끝은 욕망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해결해주어야 하는 욕구는 어디까지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이 고민은 ‘교회는 사람들의 욕구를 해결해주는 곳인가?‘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질문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였다.-교회론을 읽어봐야겠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교리는 필요없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독서모임 때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경건함이 없는 사랑은 자기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자기의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는 없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를 드러내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점은, 기독교인은 자기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비기독교인은 모른다는 것,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렇다면,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할까?
수용소는 무척 좁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을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이 되어서 자신의 소중한 공간을 뺏기게 된다면, 인간이 왜 굳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 되려고 원해야 할까? 정말로 인간은 자신의 안위와 안전보다 도덕적 우월성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까?‘(159쪽, 나의 베스트 문장이었다.) 자신의 안위와 안전보다 도덕적 우월성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조차도, 어릴 때 침범당한 안위와 안전 운운하며 이제는 안전해지고 싶다는 무의식적 바람이 자꾸 튀어나오는 통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신앙적인 의사결정을 못할 때가 많다. 사람은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이익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 때문에 선택한다. 이 책에는 이런 사례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행위가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고는 나중에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으려 한다.‘(180쪽) (우리나라처럼 극단이 심한) 정치적 성향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지 않을까? 자신에게 유리하니까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로 포장되어 있다. 자신은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라서 다른 사람은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스로 속이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이려면, 자신의 실존에 반드시 필요한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 공정하고 관대하기란 절대로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이런 ˝가치˝들은 자신의 안전과 안위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도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183쪽) 수용소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아무도 포기하려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실존에 반드시 필요한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사회 활동에서 합리적 행동이란 도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지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행동이다. 나는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야말로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수 조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186쪽)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야말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수용소에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신부들이었다. ‘신부들의 도덕성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들의 청렴함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신뢰했다. 또한 그들의 관대함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슬픈 일이지만, 이런 수용성을 ˝도덕적인˝ 사람들에게서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342쪽) ‘열방을 위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수용성‘이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수용성‘이 없다. 한편으로는 사제들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적인 정직함‘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나치게 지적으로 정직하려고 하면(교리들을 이리 저리 재보고 판단하는 일련의 일들을 말한다.) 수용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수용하는 것이 지적인 정직함을 포기하는 것이라면...(정말 그런지는 아직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개신교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적인 정직함을 포기하지 못해 자신들의 경건함을 잃지 않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지적인 정직함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포기해도 괜찮은 가치라는 말일까?
길키는 율법주의와 개신교인들이 추구하는 경건함(거룩)을 같은 말로 서술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랑이 없는 경건함(거룩)은 경건함(거룩)이 아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내가 실제로 수용소에 갇혔다면, 이기심 없는 도덕성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딸린 식구가 있는 사람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 가족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속이며 나의(내 가족의) 실존에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이 가능할까?(딸린 식구가 없었더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신약성경이 전하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은, 진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됨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460쪽) ‘오직 하나님 안에만, 불의와 잔인성을 일으키지 않는 궁극적인 헌신이 존재한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영원한 의미가 존재한다. 하늘이나 땅 위의 어떤 것도 그 의미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지 못할 것이다.‘(4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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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햄릿 열린책들 세계문학 15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박우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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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윌리엄 셰익스피어/박우수 옮김, 열린책들)-전자책 대여

9~10월에 알라딘에서 이벤트가 있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고전 전자책을 15일간 대여해주는 이벤트였다. 그때 셰익스피어의 책들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여러 권의 책을 대여했는데 심심할 때마다 한 권씩 보려고 전자책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첫 번째로 선택한 책은 [햄릿]이었다. 몇 달 전에 [페스트]를 15일간 대여했다가 다 못 읽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꼭 다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15일 내로 다 읽기는 했는데, 15일이 지난 후 서평을 써서 책에 나오는 구절을 정확하게 인용하지 못하는 점은 좀 아쉽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충분히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유명한 구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이 책에 나오는 구절이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고전을 정말 안 읽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다보니 불현듯 ˝브루투스, 너마저?˝가 떠올랐는데, 알고보니 이 대사도 세익스피어가 쓴 [줄리어스 시저], [헨리 4세]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브루투스, 너마저?˝가 생각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책이 희곡이라는 것도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부분이었다. 희곡을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게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무식했다. 그래서 용감했다(?).
셰익스피어는 왜 비극을 써야만 했을까. 그게 좀 궁금했다. 햄릿의 아버지가 죽자 햄릿의 어머니와 숙부는 기다렸다는 듯 결혼하는 막장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대략의 줄거리상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햄릿의 아버지가 희곡 전에 죽는 것으로 시작해서 폴로니우스(신하), 오필리아(폴로니우스의 딸, 햄릿이 사랑하는 척을 했던 여자이다. 햄릿이 실제로 사랑했는지 사랑하는 척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죽고 미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햄릿과 함께 영국에 가기 위해 동행했던 두 친구(?), 그리고 맨 끝에는 오필리아의 오빠, 햄릿, 햄릿의 숙부, 어머니가 거의 동시에 죽으며 희곡이 끝난다. 왜 등장인물을 이렇게나 많이 죽였어야 했을까...
사실 [햄릿]의 세계관은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다만, 이 책 뒷편에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이 있었는데 해설을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의도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한 사람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해설 부분이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아 이 정도로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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