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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산둥수용소](랭던 길키/이선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10월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으로 읽었다. 한 번씩 서평을 쓰는 게 부담스러운 책들이 있다. 그 책들은 서평을 쓰는 것을 계속 미룬다. 이 책이 그런 책이다. 이 책을 다 읽은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서평을 쓰는 게 두려웠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다고 서평을 쓰는 지금 서평을 쓰는 게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고, 생각을 다 정리한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사람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때 인간이 얼마나 비도덕적인지, 한 사람이 어떻게 권력을 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용소 밖에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진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전문가 정신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났으며 학문적인 목소리는 침묵을 지켜야 할‘(65쪽) 위기에 있었다.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신념보다도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물질적인 문제‘(145쪽)이기 때문이었다.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자아실현의 욕구는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철학을 가르치고 기독교 복음을 설교하는 일이 삶에서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150~151쪽) 지금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충족되어야 할 욕구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복음이 쓸모가 있는가?‘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초점은 그 ‘욕구들‘에 향하고, 복음에 향하지 않는다(한편으로, 교회가 사람을 돕는 목적-교회가 사람의 욕구에 초점을 두는 것-이 이웃사랑의 발로인지, 교회 세력의 증가인지를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의 욕구들을 해결해주기 위해 교회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충족해야 한다고 여기는 욕구들을 교회에서 해결해 주면서 덩치를 불렸다. 알다시피,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 시작은 욕구이지만, 끝은 욕망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해결해주어야 하는 욕구는 어디까지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이 고민은 ‘교회는 사람들의 욕구를 해결해주는 곳인가?‘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질문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였다.-교회론을 읽어봐야겠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교리는 필요없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독서모임 때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경건함이 없는 사랑은 자기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자기의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는 없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를 드러내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점은, 기독교인은 자기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비기독교인은 모른다는 것,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렇다면,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할까?
수용소는 무척 좁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을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이 되어서 자신의 소중한 공간을 뺏기게 된다면, 인간이 왜 굳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 되려고 원해야 할까? 정말로 인간은 자신의 안위와 안전보다 도덕적 우월성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까?‘(159쪽, 나의 베스트 문장이었다.) 자신의 안위와 안전보다 도덕적 우월성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조차도, 어릴 때 침범당한 안위와 안전 운운하며 이제는 안전해지고 싶다는 무의식적 바람이 자꾸 튀어나오는 통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신앙적인 의사결정을 못할 때가 많다. 사람은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이익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 때문에 선택한다. 이 책에는 이런 사례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행위가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고는 나중에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으려 한다.‘(180쪽) (우리나라처럼 극단이 심한) 정치적 성향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지 않을까? 자신에게 유리하니까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로 포장되어 있다. 자신은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라서 다른 사람은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스로 속이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이려면, 자신의 실존에 반드시 필요한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 공정하고 관대하기란 절대로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이런 ˝가치˝들은 자신의 안전과 안위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도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183쪽) 수용소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아무도 포기하려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실존에 반드시 필요한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사회 활동에서 합리적 행동이란 도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지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행동이다. 나는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야말로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수 조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186쪽)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야말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수용소에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신부들이었다. ‘신부들의 도덕성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들의 청렴함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신뢰했다. 또한 그들의 관대함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슬픈 일이지만, 이런 수용성을 ˝도덕적인˝ 사람들에게서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342쪽) ‘열방을 위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수용성‘이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수용성‘이 없다. 한편으로는 사제들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적인 정직함‘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나치게 지적으로 정직하려고 하면(교리들을 이리 저리 재보고 판단하는 일련의 일들을 말한다.) 수용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수용하는 것이 지적인 정직함을 포기하는 것이라면...(정말 그런지는 아직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개신교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적인 정직함을 포기하지 못해 자신들의 경건함을 잃지 않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지적인 정직함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포기해도 괜찮은 가치라는 말일까?
길키는 율법주의와 개신교인들이 추구하는 경건함(거룩)을 같은 말로 서술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랑이 없는 경건함(거룩)은 경건함(거룩)이 아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내가 실제로 수용소에 갇혔다면, 이기심 없는 도덕성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딸린 식구가 있는 사람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 가족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속이며 나의(내 가족의) 실존에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이 가능할까?(딸린 식구가 없었더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신약성경이 전하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은, 진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됨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460쪽) ‘오직 하나님 안에만, 불의와 잔인성을 일으키지 않는 궁극적인 헌신이 존재한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영원한 의미가 존재한다. 하늘이나 땅 위의 어떤 것도 그 의미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지 못할 것이다.‘(4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