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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침묵 ㅣ 홍성사 믿음의 글들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20년 10월
평점 :
*형식과 본질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어려워서 미루고 미루다 이제 마무리하는 독서기록.
[침묵](엔도 슈사쿠/공문혜 옮김, 홍성사)
-다북다복 8th.
📚핵심 단어: 형식, 배교, 사랑(자비), 믿음(신앙고백)
📚소감
이 작가님은 처음 알게 되었는데, 왜 여지껏 몰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독교 문학에 관심이 적었던 것도 있지만, 기독교 문학이 적다는 생각으로 찾아보려는 생각도 안 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이 소설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괜찮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번역하지 않았다는 끝부분, ‘기리시단 관리자의 일기‘가 번역되어 있지 않고, 이 소설의 끝부분도 오역이라는(마음대로 마무리를 지었다는) 글을 봐서, 출판사에서는 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지 궁금하다는 선영님 말씀에 동의했다.
[침묵의 소리]에 실려 있다는 마지막 파트 ‘기리시단 관리자의 일기‘를 읽고서야 배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식적인 배교를 배교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형식적인 배교를 하면서 진정한 배교를 해온 것은 아닌가, 기치지로가 계속 형식적인 배교를 했지만 나중에는 신부를 보호한(?) 걸 보면 이걸 배교로 볼 수 있나(이 부분이 ‘기리시단 관리자의 일기‘에 실린 내용이다.), 입술로 부인하는 건 배교일까, 등등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이런 건 교회에서 다루어야 하는 건데.
배교는 일회적으로 일어나는 일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배교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건 아닐까 하고.
📚질문 만들기
1. 위험한 선교지로 들어가시는 분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2. 두려울 때 생각나는 말씀이 있나요?
3. 맡길 수 있나요?
4. 사제가 아니어도 인간으로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면 동요하지 않을까요?
5.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 적 있나요?
6. 사랑과 진리 사이에서
7. 약함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나요?
8. 행함은 교리에 구애되지 않아야 하나요?
9. 믿음에서 형식은 중요하지 않나요?
10. 지금의 믿음으로 변화한 계기가 있다면?
📌질문에 대한 답 읽기(매일 단상): https://blog.naver.com/kohen83/223393352010
📚인물탐구
📌로드리고: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상황과 빗대어 생각하는 인물.
📌기치지로: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본질로 접근하는 인물.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노우에: 진정한 배교자.
배교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잔인하게 배교시키거나(?), 죽음에 내몰지 않았을 것 같다.
📌페레이라: 로드리고가 따라간 길(?)이라고 생각했다.
📚독서모임
📌기치지로의 교활함 vs. 이노우에의 교활함
기치지로와 이노우에의 교활함이 이 책을 이끌어가는 두 축이라고 해석하는 관점이 좋았다. 어떻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지, 하는 생각 하나, 아직도 문학 읽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생각 둘.
기치지로와 이노우에의 교활함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본다. ‘교활‘이라고 하면 ‘속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기치지로와 우에노에는 얼굴에 표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기치지로의 교활함 때문에 가르페와 로드리고가 기치지로가 제대로 안내할 건지 의심했다. 우에노에는 겉으로는 인자한 표정을 짓지만, 많은 일본인 신자와 신부들을 고문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본인 농부의 순교 vs. 포르투갈 신부의 배교
이 책에는 일본인 농부의 처참한 삶이 잘 드러난다. 일본인 농부는 삶의 비참함 때문에 순교를 선택하는 게 오히려 쉬웠을(?) 거라고 보는 관점도 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진 것이 많을수록(많다고 생각할수록), 순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바른 믿음 vs. 변질된 하나님
“그렇지 않아. 이 나라 사람들이 그 무렵 믿었던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야. 그들만의 신들이지. 그것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모른 채 일본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그렇다고 해도 성경에 기반해 바른 믿음은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4영리를 통한 영접이나 군대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 정말 복음을 전하는 건지, 변질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포용하다보면 이단도 수용하게 되지 않을까? 알미니안주의가 현대 교회에는 널리 퍼져 있는 것처럼.
최근 감리교에서 동성애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이동환목사가 출교를 당했다.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
📌형식 vs. 본질(형식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
형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씀하신 선영님 말에 동의하며, 형식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형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이 [예배에 목숨을 걸라]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아오기도 했고)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형식으로 정성을 다하셨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예수님께서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던(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게, 형식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더랬다. 이 책도 그 말을 지지한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오히려 형식이 너무 훼손(?)되어서, 형식을 어느 정도 강조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배의 형식에서 찬송가 반주를 떠올렸다. 오전 예배는 4부로 절제해서 치지만, 오후 예배는 내 맘대로 치는 게 괜찮나, 하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 예배 때는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지인의 영향인지 내 생각도 사실 그 지인의 생각과 동일하다. 내가 반주에 관심이 많고 더 공부하고 싶은 게 하나님의 영광과 어떤 관련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신앙을 지키다보면 형식이 으레 나타나게 되는데, 그 형식에 꼭 매일 필요는 없지만 형식이 마음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인간의 죄된 본성을 타파하고 경건의 연습을 하는 데 형식이 유용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고,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틀로서의 형식을 말씀하신 분도 있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멋진 신세계]와 [1984]에서 다루었던 ‘통제와 자유‘의 대치 상황을 생각했다. 어릴 때는 어쩔 수 없이 통제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그 통제가 형식과 맞물리면서 어떻게 작동하게 되나, 하고 생각하다가 혼란스러워졌다. 또, 형식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정죄와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죄의 정죄를 동일한 선상에서 볼 수 있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형식‘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했던 화진님 말씀에 무릎을 탁 쳤다. 이런 통찰력이! 이 말이 내게는 형식과 본질의 결론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