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독서법 - 10대와 함께 성경에 빠지는
김기현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성경독서법](김기현, 성서유니온)

작년 초에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을 읽었는데, 작년 말에 [성경독서법]을 읽었다. [성경 독서법]은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을 10대 한정으로(?) 풀어 쓴 책이다. 앞의 책에서도, 뒤의 책에서도 다가왔던 부분은 ‘소리내서 읽어라‘였다. 이 부분이 마음에 많이 남았던지, 그 후로는 교회에서 말씀을 소리내어 읽을 때가 언제인지 손에 꼽고는 했다(물론 거의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를 거의 못 가서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가더라도 예배를 인도하는 분-대개는 목사님-이 말씀을 읽으시지 성도들까지 함께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혼자 말씀을 묵상할 때 소리내기는 쉽지 않은데, 자고 있는 아기가 깰까 두려운 마음이 크다. 괜히 나 때문에 깨서 하루의 리듬이 엉망이 되지 않을까, 하루의 리듬이 흐트러지면 퇴근 후 아기랑 놀 때의 리듬도 흐트러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신랑이 더 많이 놀아주기는 하지만.). 걱정하고 있는 부분을 글로 적고 보니, 소리 내서 읽어야겠다.
이 책은 챕터 끝부분마다 ‘나눔과 토론을 위한 질문‘이 있다. 10대와 함께 나누면 좋을 질문이지만, 요즘처럼 성경을 멀리하는 시대에 어른들도 함께 나누면 좋을 질문들이다.

반복이 힘이 아니라 말씀이 힘입니다. 반복에 변화의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변화의 비밀이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이기에 때로 무의미한 반복처럼 보여도 반복을 통해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습관, 행동을 바꿉니다.(31쪽)

말씀이 힘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반복이 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Practice makes perfect.‘라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어서 말씀도 힘이고 반복도 힘이라고 생각했다. ‘반복은 그저 묵상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31쪽) 갑자기 궁금증이 생긴다. ‘지금은 반복을 통해 무의미하게 행동하게 되더라도 언젠가 깨닫는 현상은 일반 은혜의 영역인 것 같은데, 생각, 습관, 행동의 변화가 말씀의 힘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라는 지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적치유의 허구성] 서평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요즘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다.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성경을 분절적으로 뚝뚝 떼서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이 가톨릭의 전례독서입니다. 즉 전례주기를 따라 성경을 읽는 방식입니다. ...(중략)... 모름지기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저자가 기록하고, 교회가 정경으로 편찬한 순서대로 읽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최상의 방식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통째로 먹어야 합니다.(92쪽)

통째로 읽고 싶다. 교회에서 이런 거 (수련회로) 하면 참 좋을 텐데. 짧은 책부터 시작하면 좋을 텐데. 성경을 통째로 읽는 모임도 있으면 좋겠.......다(생각해보니 나는 아기를 키우는구나... 더 이상 일을 벌리면 안 되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시작하는 우리교회 독서모임 - 교회학교 교사가 알려주는 교회 독서모임 특급 노하우
조은정 지음 / 세움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시작하는 우리교회 독서모임](조은정, 세움북스)

최근에 세움북스에서 책이 나왔다! 세움북스에는 늘 빚을 진 느낌이 든다. 몇 달 전에 [올인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책 공유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책을 무료로 받았는데 아직까지 책을 다 못 읽고 있기 때문이다...(곧 읽겠습니다...)

글쓴이의 교회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교회다. 어릴 때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고, 출근하면서도 종종 봤던 곳이었기에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쯤부터 성서교육회에서 행아웃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했다(이번 시즌은 줌으로 하고 있다.). 벌써 시즌3이다(한 시즌 동안 4~5권의 책을 읽는다.). 이 책 제목을 보고 ‘교회에서 독서모임을 어떻게 했을까?‘ 매우 궁금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우리교회 독서모임‘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은 채 교회 안 독서모임이 너무 궁금해서 책부터 읽었다. 책을 한참 읽고 나서야 표지에 부제가 적혀 있는 것을 알았다. ‘교회학교 교사가 알려주는‘. 아, 아이들과의 독서모임 이야기구나. (어른들 독서모임 이야기인 줄 알고) 잠깐 실망했다가 교회학교라고 해서 초등학생들과도 독서모임을 하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말의 기대를 품었는데, 고등학생과 독서모임한 이야기만 있어서 살짝 아쉬웠다.
이 책을 읽기 전, 읽은 직후에는 ‘교회 안 독서모임이 일반 독서모임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서평을 쓰는 지금은 ‘왜 교회 안 독서모임과 일반 독서모임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엇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어떤 점에서 다른 걸까?‘(‘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왜 다르지 않은 걸까?‘)라는 질문은 수 년 전부터 던져 오고 있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있다. 독서모임 때 성경 말씀을 말한다고 해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말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모임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이 책에서 독서모임 때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을 따져본 구절들일까, 그냥 문자적으로 가져온 것일까?(글쓴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교회가 성경 구절을 가르칠 때 문맥을 살펴 가르치지 않고 문자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 예전에는 성경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기도 했다.) 실제 글쓴이가 하신 독서모임을 본 적이 없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책만 읽었을 때는 마치 신학과 상담이 비혼합물 상태로 섞여 있는 게리 콜린스의 기독교상담이 떠올랐다.-독서모임에서의 게리 콜린스가 등장했으니, 로렌스 크랩과 제이 아담스를 기대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쓴이는 ‘내심 가장 바라는 건 독서모임을 통한 전도입니다.‘(72쪽)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관계성 전도이다. 교회에서 전도를 강조하는 주간이 되면 설교 시간에 관계성 전도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도 선교단체에서 관계성 전도를 중시했다. 오리엔테이션이나 신학기 때 사람들을 선교단체로 데리고 오는 것을 ‘전도‘라고 불렀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전도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에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교회 사람들끼리 있을 때의 이야기고, 내면의 이유로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모아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물론 모든 교회에 다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전도 주간에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이 한 말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성도들은 교회로 초청하기만 하면 되고, 말씀은 목회자가 선포하는 것이라고. 충격적이었다. 그럴 거면 천주교와 뭐가 다르지? 목회자만 성경을 바로 알면 된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그만큼 성도들이 성경을 잘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교회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지 고백할 수 없는 성도들이 많다는 말이다. 상담, 독서모임, 레크레이션, 게임, 공부, 놀이,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것이 전도일까? 위와 같은 것들을 교회에서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비기독교인들도 그런 것을 이용해서 교회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진심은 통하는 법, ‘너와 함께 하고 싶어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네가 교회에 오는 것을 원해서‘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그렇다면, 복음은 팔린 것이다. 휴지 하나 주고 ‘교회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상담을 해줄 테니 ‘교회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얻으러 가는 곳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전도를 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종교활동으로(난 아무래도 오늘날의 ‘전도‘가 종교활동일 때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사람의 믿음 여부를 평가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전도로 전하는 내용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중 어디까지 포함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상담, 독서모임, 공부, 놀이 등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일반계시 영역이다(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럴 때도 전도라고 말할 수 있나?). 일반계시는 자연, 사람 등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4부 은총과 맞닿아 있다. 모든 종교에 신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일반계시의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다. 특별계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니 성경을 전하지 않는 전도는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전도로 전하는 내용을 일반계시로 하든 특별계시로 하든, 궁극적으로는 특별계시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는 특별계시의 내용을 언급해야 전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을 늘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을 전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매우 싫다(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나? 접근성이 떨어져서 교회로 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너무 인간 중심적 사고 아닐까?). 비기독교인 모임에서도 그런 운영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김희자 교수님이 발표한 <교회 교육구조 진단 및 분석에 관한 연구> 논문에 의하면, 성장하고 있는 주일학교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교육지도자의 전문화, 둘째, 특화된 전도프로그램, 셋째, 짜임새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118~119쪽) 양적 성장만 성장인 걸까.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만 판단하는 것을 굳이 교회 안에서까지 해야 할까. 여기서 ‘전도‘만 빼면 일반 교육기관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오히려 이것이 세상을 본받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영화나 연극, 뮤지컬, 방송 같은 대중문화를 보고 신앙적인 관점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신앙 서적을 읽으며 신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고, 인문학을 읽고도 우리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신앙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144쪽)
‘21세기 교회학교는 일방적인 가르침만 강조할 게 아니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도 채워 줄 수 있는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119쪽)

여기가 나와 가장 맞지 않는 부분인데,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과 신앙의 성장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격과 신앙은 같은 건가? 신앙이 신학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같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간디, 테레사 수녀를 떠올린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인격적으로 훌륭할 수 있지만,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 중에 신앙이 없는 사람도 많다. 다시 돌아왔다.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의 다른점은 무엇인가?
혹자는 지금까지 적어온 것이 이 책과는 상관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간 중간 언급되는 이 구절들을 읽으니,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오던 것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이 아닌 다른 어떤 책이라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면 이런 식의 서평을 썼을 것이다. 아무래도 글쓴이와 나는 교회관부터가 굉장히 다른 것 같다. 내가 너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냥 내 생각은 이렇다는 매우 주관적인 서평임을 기억해주시길.
독서모임과 관련해서는, 글쓴이가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리고 독서모임에 임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고 싶었습니다.‘(115쪽)에서도 그 마음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교훈과 감동의 책을 선정하시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독서모임 진행자가 책을 통한 독자의 반응을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눈에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책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 성경 구절을 제시해 준다든지(‘이 책에는 이 구절이 어울려.‘라는 정답 제시의 느낌이 든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책의 내용에 대한 사실보다 글쓴이의 의견으로 발제문을 만든다든지(‘누구나 성장이나 변화를 위해서 내가 스스로 깨야 할 ‘알‘이 있다. 내가 깨야 할 ‘알‘은 무엇인가?‘(169쪽)가 그런 발제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는 것은 아이들과 교사를 수직적인 입장(교사는 주는 사람, 학생은 받는 사람)에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글쓴이를 학교 교사로 생각하고 쓰는 글이다. 내가 초등교사를 하고 있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 시간이 글쓴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하면 내가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겠다. 또 한 가지, 한 시간의 발제문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독서모임의 발제문은 두 시간 동안 평균 두 가지, 많아야 세 가지라서 깜짝 놀랐다. 사람마다 깊이의 차이가 달라 글쓴이는 지금의 독서모임도 깊이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교회로만 따진다면 교회 교사가 중고등학생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한 시간도 안 되는 예배 시간뿐이니 말이다. 많은 발제문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다.
위처럼 비판은 했지만(책보다는 한국 교회 전반에 대한 비판이다.), 글쓴이가 독서 전문가도, 교육 전문가도, 신학자도 아님에도 독서에 애착을 가지고 교회 안 독서모임 사례를 책으로 엮어냈다는 데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책의 내용을 성경 구절과 관련 짓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찾아본 것, 책을 선정하기 위해 다양하게 알아본 것, 꾸준히 독서모임을 이루어 온 것(올해처럼 대면으로 독서모임을 하지 못할 때 비대면으로 독서모임을 하기 위해 여러 모로 알아보고 노력한 것도 포함해서), 아이들을 챙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아이들 눈높이에서 많이 표현해준 것, 독서모임 경험을 나누고 독서모임 순서나 발제문 내용을 제시하여 처음 교회 안 독서모임을 이루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어준 것 등에 대해서는 대단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교회 안에서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하시려는 분들에게는 좋은 지침이 될 것 같다.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너무 기대감이 컸던 터라 서평을 이렇게 쓴 것에 대해서는 죄송한 마음이 있다. 독서모임 진행도 해보지 않았고, 매우 오래전에 교회에서 고등부를 짧게 가르친 경험으로 글쓴이의 경험에 왈가왈부하는 게 가당키나 하나.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개혁신앙이다
라은성 지음 / 페텔(PTL)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것이 개혁신앙이다](라은성, PTL)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600쪽이 넘는 벽돌책이라 다 읽는 데 두 달 가량 걸렸다. 같이 읽으니 읽을 수 있는 거지, 혼자 읽었다면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었을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강요를 바탕으로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서들을 인용하며 무엇이 개혁신앙인지 설명해주는 책이다. 비록 맞춤법이 틀리는 곳이 종종 있어 읽기에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다. 처음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을 개혁신앙이라고 부르는지, 용어 정리를 명확하게 해주어서 좋았다. ‘지금도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고 신념과 신앙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이런 현상은 개혁신앙을 위태롭게 합니다.‘(20쪽) 개념을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으면 이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과 저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이 달라 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에 몸담고 있지만 실제로 개혁주의를 배우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가 가장 클 거다. 개혁주의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개혁주의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다(물론 이 책에서는 개혁주의와 개혁신학, 개혁신앙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는 예장 합동은 스펙트럼이 너무 너무 넓다. 개중에 고신과 대신이 매우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고신이 그렇게 보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니 이미 교단의 의미는 사라졌다. 목회자의 성향이 어떤지에 따라 덜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가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보다 더 보수적인 곳이 되기도 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개혁신앙이라 하는가? ‘개혁신앙인(또는 개혁파)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핍박받고 루터파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작성한 고백서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개혁신앙‘이라 부릅니다.‘(37쪽)라고 설명하시며 교회사를 통해 어떻게 개혁주의가 형성되었는지 서술하신다. 네덜란드로 이동했던 개혁파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를 고백하여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을 확립하는데, 그것이 ‘벨지카 신앙고백서‘(벨직신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주네브 교리문답서‘(제네바 교리문답서)를 채택하는 일이었다. 또 돌드레히트 종교회의를 통해 채택된 ‘돌드레히트 신조‘(도르트 신조)에 기초한 신학이다. 이 돌드레히트 신조를 ‘5대 항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TULIP이다. 벨지카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돌드레히트 신조를 연합을 위한 세 형식, 일치를 위한 세 형식이라 부르고, 이 형식들이 영국을 제외한 대륙에서 개혁신학을 따라 살았던 분들이 고백하고 가르쳤던 것이다(40쪽).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은?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청교도와 장로교도가 고백한 내용들이다(50쪽). 신앙고백서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채택되었는지만 알아도 내가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개혁신앙이라고 외치는 신학교에서, 벨직 신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제네바 교리문답서,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을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주변에 신학생 지인들이 많고 들리는 바가 많아서 생기는 합리적 의문이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기독교 강요를 끝까지 다 안 읽는다고 하니 말이다.), 교단 총회에서도 이런 신조대로 고백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신학교에서는 저 신조를 믿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해야겠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결이 달라도 다 받아들이고 있고, 그러니 교단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요즘 교회, 신학교, 총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 생각이 많다.
궁금증도 생겼다. 성도의 교제는 어느 교단, 교파까지일까. 이단만 아니면 다 가능한가? 알미니안에 반대해서 생긴 도르트신조를 생각하면, 현재 알미니안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이단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으니 이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건지?
아무튼,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공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믿음대로 순종하려면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 고통과 기억의 위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이문원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프레드릭 비크너/홍종락, 이문원 옮김, 비아토르)-전자책

이 책은 8월 마지막 날에 끝까지 다 읽은 책이다. 그런데 9월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도 서평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책 서평은 자꾸 미루고 미루고 미루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끝까지 다 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권일한 선생님이 좋은 책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과 나는 신학적 부분에서는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종이책으로 살지 전자책으로 살지 망설여졌다. 그러던 도중 비크너에 굉장히 감명받은 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전자책으로 사기로 결정했다. 전자책은 서평 쓰기가 힘들어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집에 책이 워낙 많으니 소장해야 할 책인지 아닌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은 자서전적인(?) 글이다. 비크너와는 신학적 부분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단,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필립 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다른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용서‘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던 그때와 같았다.), 그것은 비크너가 어릴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무기로 ‘나는 이런 일도 겪었어. 넌 절대 이해 못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해석한 대로 적어보자면, ‘나는 이런 일을 겪어서 이렇게 극복했는데, 너도 이렇게 해볼래?‘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일생에 걸쳐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너무 쉽게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라고 위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실제로 다른 점이 있나?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기도해서 해결을 받았나? 해결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결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 ‘해결‘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상황이 나아지는 것? 아니면 내 태도가 달라지는 것? 내 감정이 변하는 것?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 중에서도 믿음이 보존되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뷔크너는 고통을 대처하는 일반적인 방법부터 설명한다. 고통을 그냥 잊는 것(11쪽),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 살아감으로써 그 상황을 견디는 것, 자신의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갇히는 것(12쪽), 자신의 고통을 농담거리로 만드는 것, 고통을 경쟁거리로 만드는 것(13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식은 고통의 좋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13쪽)라고 소개한다. ‘고통을 심지 않으시고 고통이 생기게 하지는 않으시지만, 그분은 우리가 고통 안에서 보물을 거두기를 기대하십니다.‘(15쪽)라고 달란트 비유를 해석하면서, 고통도 장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부를 다른 자아에게 내어 주고, 그 대신에 상대에게서 뭔가를 받는 일‘(16쪽), 그것은 곧 ‘자신의 고통으로 가는 문을 기꺼이 여‘는(17쪽) 일이다. ‘주인이 말했듯이 그들의 궁극적 상은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쁨이 고통의 끝입니다. 고통의 문을 통해 우리는 기쁨으로 들어갑니다.‘(20쪽) 뷔크너는 고통의 끝에 있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기쁨은 하나님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만 겪는 고통인 줄 알았던 문제에서 해방되었던 것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던 시절이었다. 뷔크너는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인생에나, 가장 운이 좋아 보이는 인생에도 고통이 있으며, 묻어버린 슬픔과 상처 입은 기억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열어 주는 이러한 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것을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라고 불렀다.‘(31-32쪽) 개인적으로, 이러한 순간들이 ‘은혜‘라고는 불릴 수 있지만 ‘거룩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일 일인가를 생각했다. 단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거룩한‘에 계속 매여 있었다. 아무튼, 이 은혜가 임함으로 고통의 청지기가 되는 문이 열리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기억하라‘는 방에 들어가라고 한다. 기억할 수 있는 일들과 기억할 엄두가 나는 일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15년 전쯤 읽었던 [참으로 소중한 나],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라는 책도 생각났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과거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이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이 과거이고, 이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귀하고 거룩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계속 행하실 거라는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완성하시고 실현하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40쪽) 하지만 역시, ‘하나님‘보다는 ‘우리‘가 중심이 된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간다. 죽은 사람을 소환(?)해서 그들과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뷔크너는 마법왕국에서 상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 고통과 직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법왕국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지 않아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학을 그저 재미로만 읽는 나는 문학적 감수성이 넘쳐나는 비크너를 담을 그릇이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89쪽에 비크너를 읽으면 안 되는 사람이 나온다. 이 책을 감명깊게 읽으신 선생님이 이 부분을 보여주어서 나는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래에 적힌 구절에서 멈추게 된다. ‘정통교리를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풀어 주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된다.‘ 나는 비크너를 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황스럽게도, 슬프고 곤혹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에도 비크너를 읽을 것 같지는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김순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동체로 사는 이유](에버하르트 아놀드 글/토머스 머튼 해설/김순현 옮김, 비아토르)

성서교육회 독서모임에서 권일한선생님 책 다섯 권을 읽고 권일한선생님 서재(?!) ‘책뜰안애‘에 방문했다. 이른바 ‘작가와의 만남‘을 했다. 그리고 책뜰안애에서 이 책을 받아왔다. 특별히(?) 권해주시는 책 네 권 중에 이 책이 와닿았던 것은, 요즘 내가 공동체에 대해 생각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 생활을 한다. 제일 처음 접하는 공동체인 가정, 그리고 학교, 직장, 교회까지. 크게 보면 사회, 국가도 포함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진정한 공동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교회와 믿는 자들의 가정이 진정한 공동체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이미 그 역할을 잃은지 오래다. 교회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한다면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과연 몇이나 있는지 묻고 싶다. 공동체에 대한 내 기준이 너무 높을 수도 있다. 이 땅에서의 완전한 공동체는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계속 의문이 든다.
공동체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적 용어로는 ‘섬김‘, ‘봉사‘라고도 한다. 섬김, 봉사, 희생은 자의적이기도, 타의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섬김과 희생은 보이는 것으로는 구원의 열매인지 자기의의 발로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에서의 봉사는 쉽게 구원의 열매로 둔갑한다.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테레사 수녀, 간디, 마틴 루터킹. 이 사람들은 다 구원의 열매로써 자기희생을 보여준 사람들인가? 끊임없이 생각해왔던 질문이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의문이다.
이 책은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각 부마다 쓴 사람이 다르다. 머리글부터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사이자 사제인 배질 페닝턴이 썼다. 그리고 본문은 에버하르트의 아내인 에미 아놀드가 쓴 에버하르트의 생애, 에버하르트가 쓴 ‘공동체로 사는 이유‘, 토머스 머튼이 에버하르트에의 글에 대해 쓴 해설, 공동체 모습이 사진으로 실려 있는 후기로 나뉘어져 있다.
이 책의 책날개에서 옮긴 이에 대한 설명을 본 순간,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와 오순절, 순복음, 기장, 감리와는 잘 맞지 않아서였다. 동시에, 내가 원하는 방향의 책만 읽으면서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맥락은 본 회퍼, 판넨베르크, [인간발달]을 쓴 로더, 필립 얀시, 루이스와 비슷하다. 이 글에도 나와 있지만 아나뱁티스트에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는 아나뱁티스트에 대해 잘 모른다. 아나뱁티스트 출신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나뱁티스트가 제세례파의 영향을 받았고,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 재세례파는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깐(?) 적이 있다.
이 사람들과 내가 어떤 점에서 다른 색깔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 같다. ‘갈등 한가운데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가?˝이다. ˝믿음이 첫째이고, 옳은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18쪽) 페닝턴이 머리글에서 말한 이 문장에는 공감을 했다. 다만, ˝우리가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믿음은 공동체에서 검증됩니다. 누가 옳으냐를 검증하기보다는 우리가 믿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입니다.‘(115쪽) 머튼이 쓴 해설에서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좀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는 ‘우리가 믿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가 중요하다. 이 책은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믿음을 통해서 행하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는 주체가 사람이 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그렇다. 물론 책에서 ‘공동체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100쪽)라고 말하고는 있다. 어쨌든, 이 분들의 신앙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행위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하나님을 절대 선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는 데 중점이 있는 듯하다. ˝선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114쪽) 선의 궁극적 신비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루이스가 생각났다. 나니아연대기 7권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 ‘선의 궁극적 신비‘로 묘사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세상의 선과 하나님의 선이 같지 않다는 점에서(세상의 선이 하나님께는 선이 아닐 수 있다.), 무조건 선을 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는 한, 그리스도인은 협력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병사, 사형 집행인, 또는 경찰청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33쪽) 에버하르트는 비폭력주의자임이 틀림없다. 하나님나라는 비폭력이 중심인 나라인가? 그렇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분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하나님나라에 가까운 것 같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는 참으로 중대하다... (중략)... 우리는 그날 자체, 도래할 그날, 해방하여 일치시키는 그날이 오기를 열렬히 고대하며 기다려야 한다.‘(52쪽)
선에 대해서만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성령님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우리를 찾아온 힘이었습니다.‘(37쪽), ‘그러나 우리에게 자금이 꼭 필요할 때면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다.‘(49쪽), ‘수고하는 사랑은 사랑이 있는 수고처럼 성령의 일이다. 사랑의 수고는 성령에서 비롯된다.‘(63쪽) 성령님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교리문답서를 보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과연 사랑의 수고는 성령에서 비롯되는가?
왠지 서평에서 에버하르트의 공동체에 대해 헤집어놓은 느낌이다. 신앙 색깔이 다른 부분이 눈에 보여서일 것이다. 신앙 색깔이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이렇게 헤집는 게 아닐 텐데, 그릇이 작은 게 여실히 드러난다.
개혁신앙의 단점(?)이 신앙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테다. 물론, 실제 개혁신앙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개혁신앙인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을 위해 적용된 교리는 삶의 구체적인 지침이 되기‘([이것이 개혁신앙이다] 79쪽) 때문이다. 바라건대, 에버하르트가 자신의 신앙으로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개혁신앙인으로 살면서 공동체를 잘 이루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