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김순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동체로 사는 이유](에버하르트 아놀드 글/토머스 머튼 해설/김순현 옮김, 비아토르)

성서교육회 독서모임에서 권일한선생님 책 다섯 권을 읽고 권일한선생님 서재(?!) ‘책뜰안애‘에 방문했다. 이른바 ‘작가와의 만남‘을 했다. 그리고 책뜰안애에서 이 책을 받아왔다. 특별히(?) 권해주시는 책 네 권 중에 이 책이 와닿았던 것은, 요즘 내가 공동체에 대해 생각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 생활을 한다. 제일 처음 접하는 공동체인 가정, 그리고 학교, 직장, 교회까지. 크게 보면 사회, 국가도 포함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진정한 공동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교회와 믿는 자들의 가정이 진정한 공동체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이미 그 역할을 잃은지 오래다. 교회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한다면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과연 몇이나 있는지 묻고 싶다. 공동체에 대한 내 기준이 너무 높을 수도 있다. 이 땅에서의 완전한 공동체는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계속 의문이 든다.
공동체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적 용어로는 ‘섬김‘, ‘봉사‘라고도 한다. 섬김, 봉사, 희생은 자의적이기도, 타의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섬김과 희생은 보이는 것으로는 구원의 열매인지 자기의의 발로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에서의 봉사는 쉽게 구원의 열매로 둔갑한다.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테레사 수녀, 간디, 마틴 루터킹. 이 사람들은 다 구원의 열매로써 자기희생을 보여준 사람들인가? 끊임없이 생각해왔던 질문이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의문이다.
이 책은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각 부마다 쓴 사람이 다르다. 머리글부터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사이자 사제인 배질 페닝턴이 썼다. 그리고 본문은 에버하르트의 아내인 에미 아놀드가 쓴 에버하르트의 생애, 에버하르트가 쓴 ‘공동체로 사는 이유‘, 토머스 머튼이 에버하르트에의 글에 대해 쓴 해설, 공동체 모습이 사진으로 실려 있는 후기로 나뉘어져 있다.
이 책의 책날개에서 옮긴 이에 대한 설명을 본 순간,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와 오순절, 순복음, 기장, 감리와는 잘 맞지 않아서였다. 동시에, 내가 원하는 방향의 책만 읽으면서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맥락은 본 회퍼, 판넨베르크, [인간발달]을 쓴 로더, 필립 얀시, 루이스와 비슷하다. 이 글에도 나와 있지만 아나뱁티스트에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는 아나뱁티스트에 대해 잘 모른다. 아나뱁티스트 출신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나뱁티스트가 제세례파의 영향을 받았고,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 재세례파는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깐(?) 적이 있다.
이 사람들과 내가 어떤 점에서 다른 색깔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 같다. ‘갈등 한가운데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가?˝이다. ˝믿음이 첫째이고, 옳은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18쪽) 페닝턴이 머리글에서 말한 이 문장에는 공감을 했다. 다만, ˝우리가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믿음은 공동체에서 검증됩니다. 누가 옳으냐를 검증하기보다는 우리가 믿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입니다.‘(115쪽) 머튼이 쓴 해설에서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좀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는 ‘우리가 믿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가 중요하다. 이 책은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믿음을 통해서 행하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는 주체가 사람이 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그렇다. 물론 책에서 ‘공동체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100쪽)라고 말하고는 있다. 어쨌든, 이 분들의 신앙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행위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하나님을 절대 선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는 데 중점이 있는 듯하다. ˝선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114쪽) 선의 궁극적 신비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루이스가 생각났다. 나니아연대기 7권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 ‘선의 궁극적 신비‘로 묘사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세상의 선과 하나님의 선이 같지 않다는 점에서(세상의 선이 하나님께는 선이 아닐 수 있다.), 무조건 선을 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는 한, 그리스도인은 협력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병사, 사형 집행인, 또는 경찰청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33쪽) 에버하르트는 비폭력주의자임이 틀림없다. 하나님나라는 비폭력이 중심인 나라인가? 그렇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분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하나님나라에 가까운 것 같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는 참으로 중대하다... (중략)... 우리는 그날 자체, 도래할 그날, 해방하여 일치시키는 그날이 오기를 열렬히 고대하며 기다려야 한다.‘(52쪽)
선에 대해서만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성령님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우리를 찾아온 힘이었습니다.‘(37쪽), ‘그러나 우리에게 자금이 꼭 필요할 때면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다.‘(49쪽), ‘수고하는 사랑은 사랑이 있는 수고처럼 성령의 일이다. 사랑의 수고는 성령에서 비롯된다.‘(63쪽) 성령님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교리문답서를 보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과연 사랑의 수고는 성령에서 비롯되는가?
왠지 서평에서 에버하르트의 공동체에 대해 헤집어놓은 느낌이다. 신앙 색깔이 다른 부분이 눈에 보여서일 것이다. 신앙 색깔이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이렇게 헤집는 게 아닐 텐데, 그릇이 작은 게 여실히 드러난다.
개혁신앙의 단점(?)이 신앙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테다. 물론, 실제 개혁신앙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개혁신앙인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을 위해 적용된 교리는 삶의 구체적인 지침이 되기‘([이것이 개혁신앙이다] 79쪽) 때문이다. 바라건대, 에버하르트가 자신의 신앙으로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개혁신앙인으로 살면서 공동체를 잘 이루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