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하는 우리교회 독서모임 - 교회학교 교사가 알려주는 교회 독서모임 특급 노하우
조은정 지음 / 세움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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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우리교회 독서모임](조은정, 세움북스)

최근에 세움북스에서 책이 나왔다! 세움북스에는 늘 빚을 진 느낌이 든다. 몇 달 전에 [올인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책 공유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책을 무료로 받았는데 아직까지 책을 다 못 읽고 있기 때문이다...(곧 읽겠습니다...)

글쓴이의 교회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교회다. 어릴 때 몇 번 가본 적이 있었고, 출근하면서도 종종 봤던 곳이었기에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쯤부터 성서교육회에서 행아웃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했다(이번 시즌은 줌으로 하고 있다.). 벌써 시즌3이다(한 시즌 동안 4~5권의 책을 읽는다.). 이 책 제목을 보고 ‘교회에서 독서모임을 어떻게 했을까?‘ 매우 궁금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우리교회 독서모임‘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은 채 교회 안 독서모임이 너무 궁금해서 책부터 읽었다. 책을 한참 읽고 나서야 표지에 부제가 적혀 있는 것을 알았다. ‘교회학교 교사가 알려주는‘. 아, 아이들과의 독서모임 이야기구나. (어른들 독서모임 이야기인 줄 알고) 잠깐 실망했다가 교회학교라고 해서 초등학생들과도 독서모임을 하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말의 기대를 품었는데, 고등학생과 독서모임한 이야기만 있어서 살짝 아쉬웠다.
이 책을 읽기 전, 읽은 직후에는 ‘교회 안 독서모임이 일반 독서모임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서평을 쓰는 지금은 ‘왜 교회 안 독서모임과 일반 독서모임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엇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어떤 점에서 다른 걸까?‘(‘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왜 다르지 않은 걸까?‘)라는 질문은 수 년 전부터 던져 오고 있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있다. 독서모임 때 성경 말씀을 말한다고 해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말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모임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이 책에서 독서모임 때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을 따져본 구절들일까, 그냥 문자적으로 가져온 것일까?(글쓴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교회가 성경 구절을 가르칠 때 문맥을 살펴 가르치지 않고 문자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 예전에는 성경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기도 했다.) 실제 글쓴이가 하신 독서모임을 본 적이 없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책만 읽었을 때는 마치 신학과 상담이 비혼합물 상태로 섞여 있는 게리 콜린스의 기독교상담이 떠올랐다.-독서모임에서의 게리 콜린스가 등장했으니, 로렌스 크랩과 제이 아담스를 기대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쓴이는 ‘내심 가장 바라는 건 독서모임을 통한 전도입니다.‘(72쪽)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관계성 전도이다. 교회에서 전도를 강조하는 주간이 되면 설교 시간에 관계성 전도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도 선교단체에서 관계성 전도를 중시했다. 오리엔테이션이나 신학기 때 사람들을 선교단체로 데리고 오는 것을 ‘전도‘라고 불렀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전도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에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교회 사람들끼리 있을 때의 이야기고, 내면의 이유로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모아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물론 모든 교회에 다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전도 주간에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이 한 말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성도들은 교회로 초청하기만 하면 되고, 말씀은 목회자가 선포하는 것이라고. 충격적이었다. 그럴 거면 천주교와 뭐가 다르지? 목회자만 성경을 바로 알면 된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그만큼 성도들이 성경을 잘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교회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지 고백할 수 없는 성도들이 많다는 말이다. 상담, 독서모임, 레크레이션, 게임, 공부, 놀이,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것이 전도일까? 위와 같은 것들을 교회에서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비기독교인들도 그런 것을 이용해서 교회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진심은 통하는 법, ‘너와 함께 하고 싶어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네가 교회에 오는 것을 원해서‘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그렇다면, 복음은 팔린 것이다. 휴지 하나 주고 ‘교회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상담을 해줄 테니 ‘교회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얻으러 가는 곳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전도를 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종교활동으로(난 아무래도 오늘날의 ‘전도‘가 종교활동일 때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사람의 믿음 여부를 평가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전도로 전하는 내용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중 어디까지 포함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상담, 독서모임, 공부, 놀이 등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일반계시 영역이다(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럴 때도 전도라고 말할 수 있나?). 일반계시는 자연, 사람 등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4부 은총과 맞닿아 있다. 모든 종교에 신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일반계시의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다. 특별계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니 성경을 전하지 않는 전도는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전도로 전하는 내용을 일반계시로 하든 특별계시로 하든, 궁극적으로는 특별계시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는 특별계시의 내용을 언급해야 전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을 늘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을 전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매우 싫다(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나? 접근성이 떨어져서 교회로 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너무 인간 중심적 사고 아닐까?). 비기독교인 모임에서도 그런 운영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김희자 교수님이 발표한 <교회 교육구조 진단 및 분석에 관한 연구> 논문에 의하면, 성장하고 있는 주일학교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교육지도자의 전문화, 둘째, 특화된 전도프로그램, 셋째, 짜임새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118~119쪽) 양적 성장만 성장인 걸까.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만 판단하는 것을 굳이 교회 안에서까지 해야 할까. 여기서 ‘전도‘만 빼면 일반 교육기관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오히려 이것이 세상을 본받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영화나 연극, 뮤지컬, 방송 같은 대중문화를 보고 신앙적인 관점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신앙 서적을 읽으며 신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고, 인문학을 읽고도 우리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신앙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144쪽)
‘21세기 교회학교는 일방적인 가르침만 강조할 게 아니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도 채워 줄 수 있는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119쪽)

여기가 나와 가장 맞지 않는 부분인데,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과 신앙의 성장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격과 신앙은 같은 건가? 신앙이 신학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같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간디, 테레사 수녀를 떠올린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인격적으로 훌륭할 수 있지만,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 중에 신앙이 없는 사람도 많다. 다시 돌아왔다.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의 다른점은 무엇인가?
혹자는 지금까지 적어온 것이 이 책과는 상관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간 중간 언급되는 이 구절들을 읽으니,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오던 것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이 아닌 다른 어떤 책이라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면 이런 식의 서평을 썼을 것이다. 아무래도 글쓴이와 나는 교회관부터가 굉장히 다른 것 같다. 내가 너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냥 내 생각은 이렇다는 매우 주관적인 서평임을 기억해주시길.
독서모임과 관련해서는, 글쓴이가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리고 독서모임에 임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고 싶었습니다.‘(115쪽)에서도 그 마음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교훈과 감동의 책을 선정하시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독서모임 진행자가 책을 통한 독자의 반응을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눈에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책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 성경 구절을 제시해 준다든지(‘이 책에는 이 구절이 어울려.‘라는 정답 제시의 느낌이 든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책의 내용에 대한 사실보다 글쓴이의 의견으로 발제문을 만든다든지(‘누구나 성장이나 변화를 위해서 내가 스스로 깨야 할 ‘알‘이 있다. 내가 깨야 할 ‘알‘은 무엇인가?‘(169쪽)가 그런 발제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는 것은 아이들과 교사를 수직적인 입장(교사는 주는 사람, 학생은 받는 사람)에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글쓴이를 학교 교사로 생각하고 쓰는 글이다. 내가 초등교사를 하고 있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 시간이 글쓴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하면 내가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겠다. 또 한 가지, 한 시간의 발제문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독서모임의 발제문은 두 시간 동안 평균 두 가지, 많아야 세 가지라서 깜짝 놀랐다. 사람마다 깊이의 차이가 달라 글쓴이는 지금의 독서모임도 깊이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교회로만 따진다면 교회 교사가 중고등학생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한 시간도 안 되는 예배 시간뿐이니 말이다. 많은 발제문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다.
위처럼 비판은 했지만(책보다는 한국 교회 전반에 대한 비판이다.), 글쓴이가 독서 전문가도, 교육 전문가도, 신학자도 아님에도 독서에 애착을 가지고 교회 안 독서모임 사례를 책으로 엮어냈다는 데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책의 내용을 성경 구절과 관련 짓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찾아본 것, 책을 선정하기 위해 다양하게 알아본 것, 꾸준히 독서모임을 이루어 온 것(올해처럼 대면으로 독서모임을 하지 못할 때 비대면으로 독서모임을 하기 위해 여러 모로 알아보고 노력한 것도 포함해서), 아이들을 챙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아이들 눈높이에서 많이 표현해준 것, 독서모임 경험을 나누고 독서모임 순서나 발제문 내용을 제시하여 처음 교회 안 독서모임을 이루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어준 것 등에 대해서는 대단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교회 안에서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하시려는 분들에게는 좋은 지침이 될 것 같다.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너무 기대감이 컸던 터라 서평을 이렇게 쓴 것에 대해서는 죄송한 마음이 있다. 독서모임 진행도 해보지 않았고, 매우 오래전에 교회에서 고등부를 짧게 가르친 경험으로 글쓴이의 경험에 왈가왈부하는 게 가당키나 하나.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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