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는 이 우주에 흰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처럼. 코끼리라면 슬퍼할 일이 없다고 해서 샀다. 과연. 나의 코끼리는 유서 깊은 빙하처럼 하얗고 눈이 부셔 눈물이 나긴 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쯧쯧쯧 코끼리는 그렇게 닦는 게 아니지. 그렇지만 이건 흰 코끼리인데요. 새롭고 달콤한 드롭프스를 깨물어 먹으며 코끼리가 나를 보고 웃었다.


너는 왜 날지 않아? 코끼리가 물었다. 하늘은 운동화가 없는 애들이나 날고 싶어 하는 법이다. 너는 왜 흰 코끼리야? 바람이 불었다. 코끼리의 귀가 공손하게 사각형으로 접혔다. 눈을 감고 또 오래 생각할 모양이다. 나는 모자를 벗고 코끼리 옆에 침착하게 앉았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눈이 나리고 기억은 공평하게 잊혀지고 나와 흰 코끼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 밥 먹을까? 




II

아무거나 함부로 기억하는 아이의 생몰 연대가 거기 적혀 있었다. 기억상실은 감기처럼 흔하고 이제 나는 나의 가장 오랜 기억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지상에 더 오래 붙어 있자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농담처럼 웃었다. 중력이 너무 세서 걸핏하면 유리컵이 깨져도 신문에 나지 않았다.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다들 생각하는 척했다. 


출생의 비밀과 오로라 중에 하나를 고르시오. 

그러나 지금은 이 의자가 좋아요. 


카탈로그적 신도시에서 삶에 광을 내느라 바쁜 사람들. 유행이 지난 흰 코끼리는 몇 번의 세일을 거쳐 떨이로 트럭에 실렸다. 시간 조정이 필요합니다. 비고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다만 흰 코끼리의 시간. 아무도 흰 코끼리를 보고 웃지 않았다. 그러기엔 거룩한 삶. 좀 더 가치 있게 살아야 했다. 실종 3일째. 두서없이 비가 내렸고 태풍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우산을 펼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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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으면 그애의 뜨거워지는 숨이 나는 신났다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니 그애가 흔쾌히 그래! 했다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헝클어 버렸다

콩콩콩 가슴이 뛰고 발바닥에 땀이 배였다

어, 개미다! 마침 다행히 개미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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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슭마다 내가 벗어둔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

그리다 만 그림 저기
신승훈 2집 저기
동그랗고 맑은 그 눈동자 저기

아무도 손을 흔들어 주지 않는 건 
이제 그곳엔 아무도 없기 때문

우리가 처음 만났던 
세상에 없는 
북일동 산 8-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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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너의 말대로 시계가 있었다. 오전 10시짜리 시계. 아직 자료 전송 중이라 나는 눈으로 물체들을 훑었다. 저것의 계기, 저것의 활용, 저것의 사연을 알게 된다고 해도 저것은 탁자이다. 저것에 대해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은 없다. 이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삶을 살려고만 들지 않는다면.


초인종이 울렸다. 이 모델의 예상 방문객은 택배 기사, 말씀드릴 게 있는 이웃, 가스 검침원 정도이다. 좋은 소식이 아침부터 남의 집 문앞에서 웃고 있는 일은 없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는 최신 휴대폰을 공짜로 주고 돈을 빌려주고 싶다는 전화들이 쇄도한다. 친절한 사람들. 통장 잔고가 36,920원이라는 걸 아는 모양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빨래를 한다. 마침 외출해서 빨래를 못한 사람들은 옷 입은 채로 빗속을 뛰어다닌다. 비는 자 대고 쭉쭉 그어주면 되는데 그 일은 누가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 고위직이겠지. 위에서 하는 일은 밑에서는 잘 안 보이는 법이다. 날씨 따라 변하는 게 사람이라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다.


등장인물이 많은 삶에서 번번이 실수하는 바람에 나는 벌써 몇 년째 외딴 삶이다. 어떻게 생각해? 좋아요. 그랬어야 했다. 대개의 의문문은 명령문이다. 수당이 월급 대신 시간으로 나왔고 고지서가 쌓였다. 월급 받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스타벅스 앞을 지날 때면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이 짤그랑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변하지 않는다. 삶의 모든 날은 어느 날이므로 어느 날은 없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오전 10시짜리 시계가 있을 뿐이다. 탁자가 있고 양말이 있고 책이 있다. 그리고 어느 삶에는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등짝을 후려치는 엄마나 아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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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넘겨 준 너의 머리카락

너는 내게 모르는 얼굴이지만

삶에서 죽음은 가엾은 일이라

괜찮다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어


너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잘 가라고 너에게 손을 흔들어

살았다는 안도감에 착한 사람들

왜 아무도 네게 화를 내지 않는 걸까


최승자 시집 속에 숨겨둔 일만 엔

결백한 자의 비밀이란 겨우 그런 것

괜히 울어주지 않아도 돼 꼬마야

눈물로써 밝혀지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둬야 한다며

오늘따라 유별난 끼니의 당위성

표정을 만드느라 애쓰며들 파이팅

그러나 정작 끼니를 놓치고 있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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