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페이지 사이에 리플릿 하나가 끼워져 있다. 짤막한 책 소개가 곁들여져 있는 책 광고 리플릿. 나는 그런 광고지, 전단지, 소위 찌라시에 약하다. 있으면 일단 읽는다. 꼼꼼하게 시간을 들여 정독한다. 별 소득 없이 훑어내려가다가 <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소개 문구를 읽고 나는 빵 터져버렸다. "이 결과가 심사위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ㅋㅋㅋㅋㅋ "블라인드 심사가 발견해낸 문진영이라는 낯설고도 준비된 이름" 아마도 암묵적 수상자로 점찍어두었던 작가가 있었는데 블라인드 심사를 하고 나서 결과를 보니 듣보잡 엉뚱한 작가가 수상자가 된 상황이었던 걸까. 인정하고 싶진 않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딱히 마음은 내키지 않아서 나온 심사평처럼 읽혔다. 신선한 충격이었다라 ㅋㅋㅋ 갑자기 문진영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장바구니에 작가의 책들을 담는다.   

   






    



미리보기로 문진영 작가의 글들을 읽다가 나의 최애 최은영 작가가 떠오른 건 퍽 자연스럽다. <밝은 밤>은 읽기 전이고, <애쓰지 않아도>는 아직 주문조차 안 한 상태. 책 소개에 나와 있는 작가의 말을 읽었다.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미 충분히 가졌으며 더는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불편하게 하지 말고 민폐 끼치지 말고 예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라는 이들을 본다. 누군가의 불편함이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을 본다. 더 노골적으로, 더 공적인 방식으로 약한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인간성의 기준점이 점점 더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많은 것들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힘을 더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멋있어서 내가 으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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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띠 비띠 스파이더 노래 불러주세요." 에이미가 꼬물거리는 손가락으로 라이머콩을 꼭 쥐고 사랑스럽게 부탁했다. 이저벨은--지긋지긋해서--안 부르겠다고 한다. 너무 피곤해서 안 부르겠다고. 하지만 에이미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이며, 엄마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이,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것이 마냥 기쁘다. 아이는 행복해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고, 분홍색 잇몸에 하얀 조약돌처럼 박힌 앙증맞은 치아를 드러내며 조그맣고 촉촉한 입으로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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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2-04-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띠 비띠 스파이더 ...˝ 저 이 노래 아는데...ㅋㅋ

Joule 2022-04-27 17:24   좋아요 0 | URL
와~ 정말요! 아기 키우는 집에서는 유명한 노래인가 보네요. ㅋㅋ

moonnight 2022-05-0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아이들이 아기였을 때가 떠올랐어요. 아기 에이미 너무 귀엽네요. ^^

Joule 2022-05-02 16:02   좋아요 0 | URL
저는 조카도 타인처럼 냉정하게 봐져서 달밤 님의 조카 사랑이 가늠도 상상도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어떤 기분인지.
 








인생을 살면서 간직하는 것은 기억이 전부이다시피 해서, 우리가 삶을 생각할 때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은 기억하는 자아의 관점이다. 

내가 강의를 끝내고 어느 청중에게 들은 짧은 이야기는 기억과 경험을 구별하는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음반을 틀어 놓고 긴 교향곡을 넋을 놓고 듣고 있었는데, 곡이 끝날 무렵 음반 흡집으로 깜짝 놀랄 잡음이 나는 바람에 "음악 감상을 통째로 망쳤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감상을 망친 게 아니라 감상의 기억을 망쳤을 뿐이다. 감상하는 자아, 즉 경험하는 자아는 곡을 거의 다 들을 때까지 좋은 경험을 했고, 마무리가 안 좋았다고 해서 그 경험이 취소될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내게 질문을 던졌던 그 사람은 결말이 안 좋았다는 이유로 그때의 경험을 통째로 망쳤다고 했지만, 그것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던 40분을 무시한 평가다. 실제 경험은 과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까? 

경험과 그 기억을 혼동하는 것은 인지 착각의 좋은 예이며, 사람들은 경험을 기억으로 바꿔치기 하는 탓에 과거 경험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발언권이 없다. 기억하는 자아는 더러 엉터리지만, 삶의 점수를 기록하고 삶의 교훈을 지배하는 자아이며, 결정을 내리는 자아다. 우리가 과거에서 배우는 교훈은 미래 기억의 질을 극대화하되, 미래 경험의 질도 극대화한다는 보장은 없다. 한마디로 기억하는 자아의 횡포다. 

우리는 내 이익과 관련한 선호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것이 내 경험에 근거했어도, 그 경험의 기억이 고작 몇 분 전에 생긴 것일지라도 그러하다. 취향과 결정은 기억에서 나오고, 기억은 엉터리일 수 있다. 이 사실은 인간은 선호도가 일관되고 그것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합리적 행위자 모델의 기초가 되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들쭉날쭉한 선호도는 타고난 것이다.

결혼 생활이 실패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기억하는 자아의 관점이다. 이혼은 막판에 불협화음을 낸 교향곡과 같다. 끝이 나쁘다고 해서 전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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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나라에서 운전면허증에, 사고로 사망할 경우 장기 기증을 할지 안 할지 표시해둔다. ... 장기를 기증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별생각 없이 이 선택을 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장기 기증률을 비교한 것이 그 증거인데, 이 수치는 문화가 비슷한 이웃 나라들 사이에서도 크게 달랐다. 2003년에 나온 기사에서, 오스트리아는 장기 기증률이 거의 100퍼센트인 데 반해 독일은 12퍼센트에 그쳤고, 스웨덴은 86퍼센트인 데 반해 덴마크는 고작 4퍼센트였다. 

이 엄청난 차이는 질문 형식이 유발한 틀짜기 효과다. 기증률이 높은 나라는 장기를 기증하고 싶지 않다면 기증 거부 칸에 따로 표시를 해야 하는 '거부 선택' 형식을 택한 나라다. 그러니까 이 간단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기증하겠다는 뜻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기증률이 낮은 나라는 기증하고 싶다면 기증 찬성 칸에 따로 표시를 해야 하는 '찬성 선택'을 택한 나라다. 이게 전부다. 사람들이 장기를 기증할지 안 할지를 예견하는 최고의 단일 지표는 해당 칸에 별도로 표시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선택되는 기본 옵션을 무엇으로 지정했느냐다. ...

중요한 선택은 해당 상황의 하찮은 특징에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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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영 작가의 신작. <청담동 살아요>,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그리고 이제 <나의 해방일지>

경기도 외곽에 사는 세 남매의 이야기. 1횐가 2횐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달걀 프라이를 보며 서울은 노른자고 경기도는 흰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면서 이민기가 자신은 경기도민이라 흰자 먹을 테니 사장님은 노른자 드시라고. 비유가 너무 찰떡 같아서 서울 떠올릴 때마다 생각날 듯.


동네 카페 앞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다 염창희(이민기)는 그런 말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런 인구밀집도 떨어지는 시골에 살았으니까 친구 한 거지 쌔고쌘 게 또래들인 도시에 살았으면 나 너랑 친구 안 했어. 반경 10km 이내에 또래를 쓸어모아도 열댓명이 안 되는 이런 시골에 살았으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같이 논 거지. 시골은 이게 문제야. 하여튼 나이만 같으면 다 친구야. 나 어려서 여자애 하나 껴서 넷이 놀았다고 그러잖아. 그러면 되게 죽이 맞았나 보다 그래. 그냥 네 명이 전분 거야 동네에. (염미정(김지원)을 가리키며) 쟤! 쟨 또래 하나도 없어갖고 동네 바보랑 놀았잖아. 개똥이랑. 

이런 시골에선 친구도 식구랑 같은 거야. 식구를 가려 만나? 그냥 태어나니까 식구래. 그냥 태어나니까 친구래. 옆집에 애 하나 있대. 학교에서도 옆에 앉는 짝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딴 애랑 놀면 돼. 근데 동네친구? 이건 답이 없어."


*


대체로 나는 이민기가 연기하는 역할에 대해 되게 동류의식을 느끼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가장 나 같은 인물을 찾으라고 하면 이민기. 이민기의 지난 번 작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도 이민기에게 감정이입되었었는데. 전생에는 고양이였지만, 다음생에 인간 남자로 태어나면 이민기(가 맡는 역할들) 같은 남자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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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2-04-12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눈여겨 보고 있는 중인데 최근 영화 <야차> 보고나서 이엘이라는 여배우에 관심이 가서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더 커졌어요.
너무 어둡다, 칙칙하다는 여론도 있던데 무시하고 한번 시작해봐야겠어요. 더구나 <청담동 살아요>, <나의 아저씨> 작가라니 뭐...

Joule 2022-04-12 09:54   좋아요 0 | URL
이엘, 드라마 <도개비>에서 삼신할매로 나왔던 분이잖아요. 연기를 잘하는구나, 느꼈어요 이번에.
캐스팅이 정말 역대급. 모든 연기자들이 다 생활인 같아요. 연기자 안 같아요. 그래서 와 캐스팅 진짜 대박이다 해요, 다들 연기인데 왜 다들 연기 안 같고 진짜 저런 사람인 것 같은 건지.
TVN ‘우리들의 블루스‘ 끝나고 바로 JTBC 돌리면 ‘나의 해방일지‘ 하잖아요.
이거야말로 빅매치. 노희경과 박해영이라니.

저는 설경구를 별로 안 좋아라 해서 <야차>는 못 보고 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