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던 날도 그대의 편지를 버리지 못했음)
비가 와서인지
초상집 밤샘 때문인지
마음은 둘 데 없고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온 너의
조그맣던 입술과
파리한 입술만 어른거린다
너무 쓸쓸해서
오늘 저녁엔 명동엘 가려고 한다
중국 대사관 앞을 지나
적당히 어울리는 골목을 찾아
바람 한가운데
섬처러 서 있다가
지나는 자동차와 눈이 마주치면
그냥 웃어 보이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엔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
수첩을 뒤적거리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싱거운 취객이 되고 싶다
붐비는 시간을 피해
늦은 지하철역에서
가슴 한쪽을 두드리려고 한다
그대의 전부가 아닌 나를
사는 일에 소홀한 나를
그곳에 남겨놓으려고 한다
시집 곳곳에 숨어있는 시인의 가난한 사랑이 슬펐다.
내게는 위악적이게만 느껴지는 거친 언어가 또 슬펐다.
마침내 장미와 안개를 섞은 그의 사랑은 꿈속에도 없고 천국도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이십대도 아닌 내가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었는지...
오늘 밤 난 또 왜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지...
내가 나비라는 생각
허 연
그대가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를 감겨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 지난 그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 이 나리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 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 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