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유순하 지음 / 문이당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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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막힌 소통,중간자적 교통정리,부모.형제간의 짙은 불화의식을 숨이 막히도록 절감했고, 주인공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식과 혈육의 정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멍에란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의 사전적 의미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 억압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글의 주인공 초로의 가장은 90자리에 있는 봉건적이고 권위적이며 폭압적인 전제군주의 모습을 그린 아버지이다.사리에 어둡고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에는 가차없이 아내,아들들을 인정사정없이 완력으로 휘두르며 집안의 분위기를 일시에 먹구름으로 만들어 놓는 현대판 고수이다.

주인공은 정년을 앞둔 중등학교 교사로서 학교와 배식업체간의 금전적 비리에 맞서다 힘없이 퇴직하게 되고 집안에 나앉게 되며 백수생활을 하게 되는데 집안의 헝클어진 분위기와 자신의 나약한 심경과 입장을 고백체로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해 놓은 것을 자신이 출타중일 때 대학에 시간강사로 있는 며느리가 몰래 훔쳐 보면서 이 이야기는 전개가 되고 집안의 모든 면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90을 내다보는 아버지,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지만 주인공은 2남 2녀의 형제중에 차남으로서 형이 부모를 모셔야하지만 어찌 된일인지 그가 맡게 되고,유년,청년,장년내내 아버지는 걸핏하면 폭행,폭언으로 일삼는데,중국의 순임금의 아버지,고수가 생각이 났다.매사 자신의 뜻과 비위에 맞지 않을때는 나이,지위를 막론하고 손,발로 폭행을 휘두르며 일순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되는 어리석음과 눈이 먼 노인으로 둔갑하게 된다.둘째 아들 집에 붙박혀 살게 된 이유는 작은 며느리의 음식솜씨가 아버지의 입맛에 맞아서라는 얘기를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또한 그의 어머지는 노쇠한 몸이었건만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90남편의 손지검에 의해 얼굴에 상처를 안기도 했고 돌아가시고 난 뒤에다 마누라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뒤늦게 깨달은 것같다.

형제간에 불화가 있고 만남이나 대화도 원활하지 않은 집안은 어찌보면 권위주의적이고 폭군과 같은 늙은 아버지의 잘못된 가정교육과 정체성에서 기인한 것같다.마치 늙어 죽는날까지 가족들을 안하무인으로 일관하고 사랑채에 틀어박혀 며느리의 밥상챙기기,비위맞추기,딸자식들과 모종의 속닥대기등을 감지할 수 있었고,사단의 발생은 거의가 사소한 것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는데,아버지는 죽기전에 작은 며느리 앞으로 통장을 넘겨 주기로 했는데,어찌된 일인지 며느리가 시아버지 재산이 탐이 나서 통장을 빼앗아 간걸로 법원에 각각 원고,피고로 소장이 날라 왔을 때에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종국에는 마음이 풀려 고소를 취하하게 되지만...그럴때 시어머니는 중간에서 가정을 위해 참고 또 참으라고 신신당부하지만 사람인지라 주인공과 며느리는 패륜을 저지르고라도 아버지를 패서 나쁜 버릇을 고치려 하지만,막상 그 순간이 오면 인간의 착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솔로몬의 지혜를 빌리고 싶은 마음이 내내 일어났다.

시어머니도 결국 화장을 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온 날,현재의 삶 속에서 눈에 거슬리는 아버지,형제와 제대로 아버지,남편으로서 역할을 못해 상실감과 자괴심을 앉고 불현듯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으며 자살이라는 운명을 생각하게 되는데...그래도 함께 할 가족,부모형제의 질긴 끄나풀은 버릴 수가 없었나보다.그간 2주간의 잠행끝에 집으로 돌아오고,남겨진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자식들의 병간호를 받으며 예전보다는 마음이 누그러지고 원수같이 지내던 형제들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게 됨을 느끼게 되었다.

누구나 가정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이 글에서처럼 폐쇄적이고 주먹이 앞서는 가정이라면 가슴이 막히고 힘이 들어서 한시도 살 수가 없을것이다.요즘 세대가 이러한 글을 읽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도 눈이 멀고 사리에 어두우며 자신만이 한 가정의 막강한 가장이라는 잘못된 인성과 습성을 갖고 있는 집안이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며,한 집안을 이끌어가는 가족구성원이 제일 힘이 들겠고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운명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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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밖의 길 - 유순하 장편소설
유순하 지음 / 책세상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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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밖의 길’이 주는 이미지는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뭔가 독자들에게 여운과 사념을 품게 해 주는 묘한 끌림이 있어,이 글이 꽤나 부피가 나가지만 짬을 내어 독서를 하는 내게는 주요 등장인물 3~4명이 이끌어가는 심적 고민,갈등,방황등을 작가는 로망과 서사,생명의 소중함등을 일깨워 주는 휴먼소설로서는 오래도록 내 가슴 속에 반향과 울림이 있을거 같다.

이 글에 등장하는 주인공 변(卞)씨,일본인 후미꼬(文子)씨,프랑스인 존씨등이 여행길에서 만나 마음의 친구가 되어 주고,같이 동행하면서 서로의 관심사와 끌림을 멋지게 맺어가는 여정을 읽으면서,조그만한 울타리 속에서만 살아오고 있는 내게도 또 다른 세계,여행의 묘미,길에서 만나 속으로만 애태우던 뜨거운 욕망이 사실혼으로 이어지기도 하면서 내면에 잠자고 있던 원초적 본능마저 살아나는 듯이 주인공들과 함께 길 여행길에 동참하는듯 몰입해 가고 있었다.

변씨,후미꼬씨,미스터 존 모두 하나씩 큼지막한 사연을 안고,그 아픈 사연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고 싶었던지 그들은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멋진 명소,문화시설을 돌아보는 여정이 아니라,그 옛날 역사와 문화유적을 자랑하는,개화가 덜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저자는 알차게 소개를 하고,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나 주위의 여건,풍물등을 아낌없이 보여 주고 있어 살아있는 현장감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어 가는 데에 커다란 매력을 안겨 주었던 거같다.

변씨 남편은 화가로서 출품한 작품이 반체제(1980년대) 색깔을 띤다고 해서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자살을 택하고,후미꼬씨는 연예인으로서 잘 나가던 남편이 유명 가수와 신접살림을 차리면서 이혼의 상처를 안게 되고,미스터 존은 어머니가 집시족이고 집시족으로는 행세하기 어렵고  멸시받는 프랑스에서 어머니마저 여의자 홀로 남겨진 자신은 강도라는 범죄를 안고  입옥을 하게 되지만 감옥 안에서 썼던 글이 좋은 평가를 받자 곧 출옥을 하고 받은 인지세로,이 3명은 카트만두,캘커타등지에서 조우하게 된다.

풍광이 멋진 네팔의 카트만두,흙먼지,소음,굶어 죽어가는 빈민이 3천만명이 넘는다는 인도,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그리고 안데스의 마추픽추의 잉카유적,칠레의 산티아고,마지막 여정처인 이스터 섬등이 하나의 파노라마로 각인되어 가며,이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또 다시 우연 아닌 우연으로 재회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사람은 살아있고 마음 속에 만나고 싶은 마음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인연설이 내내 머리 속에 뿌듯하게 자리잡아 감을 느꼈다.

특히 변씨는 자신이 집시족이라는 불우한 환경과 열등의식인지는 몰라도 말수도 적지만 착한 분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인도 캘커타에는 테레사수녀를 기리고 죽음을  목적에 있는 환자분들을 구제하는 구제원이 있는데 변씨와 존은 이곳에서 만나 인간적인 면과 그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씻어 줄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인연의 싹이 트여 가면서 다음 여정지인 마추픽추에서 재회하면서 속에 있는 진심을 토로해 나간다.또한 후미꼬도 칠레 산티아고에서 재회하면서 변씨와는 자매의 연을 맺는 여행길에서의 또 다른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이국땅 타지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주지 않는 고독의 길을 헤쳐 나간다면 누구나 인간이 그립고 기대고 싶으며 이들처럼 서로가 벗이 되어 주면서 또 다른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올 수도 있음을 느꼈는데,변씨와 존은 이스터 섬에 안착하면서 마음씨 좋고 성품이 너그러운 ’후아나’할머니 덕분에 삶의 터전인 오두막을 처소로 삼게 되면서,미스터 존은 변씨에게 프로포즈를 정식으로 하게 된다.이 점에서 변씨는 한국인의 외국인과의 결혼관이나 2세에 대한 선입견등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변씨도 어렵게 내린 판단 끝에 둘은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뜨거운 잠자리를 갖게 되면서 2세를 바라보게 되지만,그간의 여독과 복통과 발열로 인해 2세의 출산을 보지 못하고 식도 올리지 못한채 쓸쓸하게 이스터 섬 바닷가 한 켠에 불귀의 몸이 되고 만다.

이제 변씨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할 수 밖에 없고 태어난 아이가 튀기여서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아이를 입양할까 어떻게 할까등 많은 고심 끝에 아이의 이름대로(변희망) 아이의 꿈과 희망을 최대한 살려주기 위해 막연하게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몸을 싣는다.길에서 만나 또 다른 길을 찾아 가는 이들의 여정을 저자는 다소는 인위적으로 그들의 만남이 재현되었지만,그래도 변씨와 존씨 사이에서 태어난 ’희망’이는 사생아의 몸이 되겠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 일도양단의 결정의식이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애적인 면이 짙게 깔려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파우스트의 절실한 탄식에 대한 울림이 있는 문장을 인용해 보려 한다.
"내 마음에는, 아아, 두 개의 충동이 공존하고 있어서,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 끌고 있네.하나는 무서운 욕망에 사로잡혀 현세에 매달려 현세적 만족을 얻으려는 충동이요,다른 하나는 세상 먼지를 벗어나 숭고한 선인들의 정신세계로 솟아오르려 하는 충동일세".P439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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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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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원초적 자문자답을 하게 될때가 있다.과연 먹고 살기 위해서인지 사랑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권력과 명예,부를 쫓기 위해 허덕거리며인지는 각자가 처해 있는 입장과 생각,가치관,실천력에 의해 달라지리라 생각을 한다.이미 물신이 팽배되어 있고 자신의 욕구,욕망이 달성되지 않을 때엔 도덕과 윤리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먼저 챙기는 것을 흔히 보고 듣고 있으며 그 만큼 현대라는 사회는 지식과 산업,자본은 발달되어 있지만 정작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산업이 덜 발달된 사회가 그나마 옹기 종기 모여 정답게 살아가며 자급자족으로 욕심을 내지도 않고 평화로운 모습을 견지했고 그 시절이 그리운건 나만의 사치스런 기억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인간의 본능은 과연 무엇일까,배고픔을 채우기 위해,무언가가 되기 위해,일탈의 삶이지만 향정신성에 의존하고 굶주린 육욕을 채우기 위한 존재일까라는 생각이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끊임없이 뇌리에 남아 있다.인간은 문명의 발달과 발전을 도모한답시고 어딘가로 향하고 무목적론적으로 확대를 해나가고 있다.그러나 정처는 없는듯 하다.부모의 DNA 즉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타고난 환경적 요인도 인간의 본성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치고 겉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새장 안에 갇힌 붉고 여린 새 한마리가 목이 말라 물 한모금 마시고 몸을 비척이는 순간 이때다 싶게 새장 안을 기던 구렁이 한 마리에게 먹히고 구렁이는 잡히고 몸둥이를 가르니 가녀린 새는 숨이 멎은채 가녀린 약자의 모습을 상징과 응축으로 보여주는 얘기로 시작되는 나카무라후미노리의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과 권력,잃어버리고 사라진 인간의 선과 악,윤리와 도덕성을 사유하게 한다.

 교도관의 일상을 그린 이 작품은 살인을 해야 할 정당한 이유도 없이 지천에 깔려 있는 벌레같은 미물을 아무 생각없이 발로 밟고 죽이듯이 살상을 하고 감옥에 끌려 오며 세인들은 죽어도 마땅하다며 범죄 당사자에게 사형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주인공 '나'는 고교시절 알고 지내던 여친들과의 만남,덧없는 섹스,또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자위행위,죄수들과의 대화,연민,그리고 세상은 착하게 변하기를 바라지만 갈수록 사람이 사람을 무섭게 만들어가며 여기에는 권력 또한 가증스러울 정도로(그 사회의 인습,법률 구조에 의해) 인간의 목숨을 파리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사람을 죽이면 응당 그에 따른 댓가를 치르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사회가 정한 법에 따르는 것 또한 수긍해야만 할 문제이다.다만 이 글에서처럼 사형수가 사형 처분이 행해지는 날,사형 집행인의 미스와 기계 동작의 오류로 사형수의 목숨이 잠시 부지될때 사형장에 입회한 검사는 유도 실력이 쟁쟁한 교도관을 시켜 둔치로 죽음의 불구덩이로 빠지게 하고 그 사형수는 죄값을 치르게 된다.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죄수의 회한과 정령이 또 다시 악의 정령으로 살아나 사회가 암울하고 비도적이며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치닫지 않을까 한다.

 살인은 정당화 될 수가 없다.아울러 모든 늘어만 가는 사회의 거대 세력을 끌어 안고 가기엔 너무나도 버겁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지도 미지수이지만 사형이 존재하는 나라인 일본에서의 얘기일테지만 사형수를 죽인다면 검사 역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닐텐가라고 저자는 휴머니즘의 상실과 암울한 사회 구조를 탄식한다.아무런 이유도 없이 신혼부부를 살해한 '야마이'라는 사형수는 교도관인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야마이의 생각의 실타래기를 전해 주는데 아마도 '나'는 야마이에게 든든한 교도관의 모습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자신에게는 형이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만의 생각으로 '나'를 형으로 삼고 싶다고 맺는다.

 무언가가 되고 싶고 확대 재생산을 빌미로 산과 강은 파헤쳐지며 황폐화됨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 또한 자연의 선함의 모습에서 굶주린 뱀의 악아리마냥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그 정당성을 제고하기 위해 사회는 갖은 자,힘있는 자로 이동해 나간다고 본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싶고 그 이상향을 꿈꾸어 가지만 한 번 맛들인 권력과 힘,명예를 놓치고 싶어하는 바보도 없을거라 생각한다.돈,권력,명예와는 무관한 '나'이지만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인명을 미물로 생각하고 대하는 비정한 사회에서 벗어날려면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고 보듬어 주고 실천하는 참된 의식인이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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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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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청년 시절 현실적인 삶을 계급투쟁의 구도로 삼아 정치경제학적 관점을 철학이라는 아우라 속에서 깊은 사유와 통찰력을 갖고 세 차례에 걸친 초고(草稿)를 통하여 그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보아진다.당초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의 형식으로 전개될 법학과 국가학에 대한 비판을 예고하고 이는 국민경제학 비판초고에 불과함을 적시하고 있다.

 첫 번째 초고에서는 노동임금,자본의 이윤,지대,소외된 노동으로 대별하고 있다.노동임금을 보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규정된다고 밝히고 있다.자본가는 노동자가 자본가 없이 생존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노동자 없이 생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노동자들에게 자본,지대,노동의 분리는 치명적으로 보며 인간에 대한 수요는 상품과 동일하게 인간의 생산을 규제한다.노동자는 자본가의 손해와 더불어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며 노동가격은 생활수단의 가격보다 훨씬 더 불변적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자본의 이윤을 살펴 보면 자본은 노동과 생산물에 대한 지배권이며 자본의 이득은 전적으로 사용된 자본의 가치에 따라 규제된다고 한다.부,근면,인구가 증가할수록 금리는 더욱 하락하고,그에 따라 자본가들의 이득도 감소한다.지대에 들어가기 전에 지주의 권리는 약탈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세이),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 수확하고 싶어 하며,토지의 자연적 생산물에 대해서조차 지대를 요구한다.즉 지주는 임차인에게 사용을 임대한 자연력의 산물,토지의 사용에 대하여 지불된 즉 가격 을 간주되는 독점가격이기도 한다.

 소외된 노동을 보면 노동자가 상품으로,가장 비참한 상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노동자의 빈곤은 생산의 힘과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점이다.특히 경쟁의 필연적 결과는  소수의 수중으로 자본의 축적,그에 따라 가공할 만한 독점의 재현이라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두 번째 초고에 들어가면 사유재산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밝히고 있다.사유재산의 관계는 노동,자본의 연관이며 이것들이 경과해야 하는 것은 양자의 직접적 혹은 매개된 통일,양자의 대립,자기 자신에 대한 대립,적대적인 상호대립으로 대별되는데 자본과 노동은 최초엔 하나로 시작했으나 서로 분리되고 낯설어진다해도 서로를 고양시키고 촉진한다고 한다.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에게서 현존을 빼앗으려 하며 예외적이긴 하나 자본가가 노동자로 전락하고 노동자는 자본가로 변신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세 번째 초고에는 사유재산과 노동,사유재산과 공산주의,욕구,생산과 분업,화폐로 대별하고 있다.사유재산의 주체적 본질,대자적으로 존재하는 활동으로서 주체,인격으로서 사유재산은 노동이다(아담 스미스)아 모든 부는 토지와 농경으로 해소된다(케네)고 말하고 있으며 모든 부는 산업적 부,노동의 부가 되었고 산업은 완성된 노동이며 산업 자본은 사유재산의 완성된 객관적 형상이다고 맺고 있다.

 사유재산과 공산주의를 보면 사유재산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상존하고 있지만 객관적 측면에서만 보면 노동이 사유재산의 본질이며 자체로서 지양되어야 할 자본이며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적극적 표현이며,무엇보다도 보편적 사유재산이며 정치적 본성을 따르고 인간의 자기 소외인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으로서 인간에 의한,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욕구,생산과 분업을 보면 인간의 본질적 힘의 새로운 실증과 인간적 본질의 새로운 풍부화,사유재산 내부에서 반대의 의미로서 타인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데,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함이고 새로운 의존 속으로 옮겨 놓기 위해서이며,새로운 향유 방식으로 새로운 경제적 파멸의 방식으로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분업에는 아담스미스,세이,스카르벡,밀등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밝히고 있다.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하는 속성과 자기 소유화의 속성이 있으며 우월성을 띠고 있다.화폐는 본질의 전능성과 전능한 존재로 간주된다.화폐는 욕구와 대상,인간의  생활과 생활수단 사이의 매개물이다.화폐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는 분은 셰익스피어이다.자신의 존재와 능력은 개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최악에서 최선으로 연결시켜 주는 마법의 24개의 다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에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업적을 철학적 관점에서 경제학을 바라보고 있다.헤겔의 현상학과 논리학에서 전개된 변증법의 상술에 대해 오류를 끄집어 내어 비판하고 있으며 포이어바흐에겐 진정한 유물론과 실재적 학문을 정초했다고 제시한다.

 마르크스의 국민경제학을 철학적 관점에서 통찰하고 사유한 그의 초고를 통하여 현존하는 우리의 사회적 삶과 사회적 삶에서 배태되어 영위되는 개인의 삶에 관한 통찰의 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자본(가),노동(가),토지,대지,이윤,이득,욕구,생산,분업등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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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가 온다 - 경제위기 이후 딜레마에 빠진 세계경제를 되살릴 윈윈 솔루션 워튼스쿨 경제경영총서 33
스튜어트 하트 지음, 정상호 옮김 / 럭스미디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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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승천하고 경제 대국으로 레드카펫을 따논 당상으로만 알았더니 미국,일본등 경제 대국의 버블경제가 꺼지면서 한국 역시 타격을 빗겨 나갈 수가 없었고 감내하기 힘들었지만 온국민이 하나된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IMF의 긴 터널을 어느 정도 해소한듯 싶지만 정작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은 생계비,교육비,세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음을 실감한다.매월 들어오는 수입도 숫자만 그럴듯 하지 실제 생활비로 나가는 데에는 힘겨울 수밖에 없고 신음 소리만 나온다.

 2001년 세계 무역센터의 공중 폭파,2005년 이라크 전쟁,2008년 모비지 사건으로 인하여 세계는 또 다시  경제 공황을 맞이하게 되며 이에 부차적으로 빈익빈 부익부,기아 문제,유가 급등,서브프라임시대,기후 환경 문제등도 경제 공황만큼이나 커다란 이슈로 떠오르고 당연히 국가와 국가간,국가와 기업간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남게 되었다.인류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행복 지수는 아직도 멀었다라는 생각이 든다.한 사회의 구조를 보더라도 갖은 자와 권력자들은 부와 권력의 달콤함에 없는 자와 약자는 천민 의식으로 순종하며 살아가야만 하고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나아가 신자본주의의 그늘 아래 정치와 경제 대국들은 말로는 글로벌화로 외치고 세계는 하나라는 허울 좋은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지고 탈산업화와 지구 환경 문제에 주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촌의 대다수 빈민(약 40억),빈국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하다 보니 과연 그들이 빈국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고 행복하게 살아갈 방도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경영 전략과 지구 환경 문제등의 전문가이고 권위가이신 스튜어트 하트가 경제위기 이후 딜레마에 빠진 세계경제를 되살릴 윈윈 솔루션의 청사진을 제시해 놓고 있어 지구촌에 사는 일원으로서 관심과 기대가 컸던 만큼 그의 문제 제기와 자본주의의 재창조라는 명제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문제 제기,그린을 넘어서서,토종화를 지향하여로 되어 있다.

 문제 제기에서는 경제글로벌화에 따른 혜택을 입지 못하는 개발도상국 내지 저개발국가들의 빈부 격차의 심화와 원자재와 화석연료 에너지의 무절제한 사용으로 인한 심각한 환경 문제들이 주요 이슈이다.국가와 기업 특히 정부의 입김이 센 한국의 경우에는 무한대의 개발은 자제를 하고 없는 자와 환경 개발 문제에 적극 대처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또한 지속적인 기업으로 살아 남으려면 민간부문 주도의 개발로서 이윤을 추구함과 동시에 빈곤층의 삶의 질을 높이며 그들에게 희망을 줌은 물론 후대들을 위해 지구의 생태계 보전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기업은 환경혁명과 정부는 규제와 공공정책상의 철학적 변화를 보여 주고 있음도 눈에 띈다.

 요는 제대로 된 비전과 전략,구조,능력,용기를 갖춘 기업들만이 2000년대 두 번째 십 년으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가장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고 특히 기후 환경문제를 제대로 알고 실행해 나가는 기업은 향후 몇 백년의 승승장구를 보장받을 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눈에 띄는 대목은 기업들이 전통시장 참여자들의 수요에 맞춘 기술과 제품,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부단한 노력과 밀착성을 보여 줄 필요가 있음도 알게 된다.

 과학기술 발명발전과 사회정치적 대격변 속에서 도래하는 창조적 파괴의 시대를 현재 맛보고 있고 초기  시대에 살고 있는데 수십 년 전부터 과거 시대에 개발됐던 기술들이 더 이상 지속성을 가질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유해물질 오염,삼림.어장 고갈,토양침식,동식물종 다양성의 감소,글로벌 기후변화,인구폭발,빈부격차 확대,갈등.분쟁 격화등은  기업들이 사용하는 기술과 비즈니스 관행이 어떤 부정적인 사회.환경적 영향을 미치는지 심각하게 고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고로 지속성을 갖지 못한 기술을 청정기술 및 재생가능 기술로 대체할 때만이 비로소 지속성 높은 세계로 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피라미드 바닥에 초점을 맞추어 하부로부터의 이노베이션도 눈에 띄는 대목인데 갈란츠 사의 피라미드 중간층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파괴적 변화의 가능성이 이를 보여 주는데 방글라데시의 "마을전화"를 예로 들고 있다.아래로의 대약진은 피라미드 중간층들에게 식품,보건 쪽에 주력하여 삶의 질과 소득 향상,행복 지수를 높여 주는데 더욱 노력한다면 지속성 있는 기업으로 오래도록 살아 남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BoP 비즈니스 전략이 다국적 기업들에 있어서 글로벌 차원의 모범관행을 기업 안테나를 높임으로써 새롭게 얻은 지역사회 지식과 결합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전략이 될 수 있다.특히 기업들은 빈곤층을 고객이나 소비자가 아닌 파트너 또는 동업자로 여겨야 한다.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선 글로벌 효율성과 국가시장별 대응능력,학습결과의 타 지역 시장 이전등 다국적 기업들이 이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분야에 더해 이를 보완하는 "토착화 능력"의 개발이 절대 필수조건이 아닌가 싶다.이렇게 함으로써 기업과 빈곤층은 깊이 있는 상호 유대가 형성이 되고 능력이 축적되며 대도약을 위한 솔루션이 생성이 될 것이고 지역사회 파트너들과의 생태계 구축도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이제는 지구가 경제 위기 뿐만이 아닌 기후 환경오염,최빈국들을 끌어 안고 지속성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가고 오래도록 살아 남기 위해서는 열정적이고 꼼꼼한 인재를 키우고 전략을 세우면서 진정으로 실천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망가진 경제,기후 환경오염 문제를 풀어나갈 수가 있고 빈국과의 상생함으로써 새롭고 산뜻한 자본주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궁극적인 세계 경제를 되살릴 길이라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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