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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도대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신라시대의 김유신과 현대인 사이에는 외양상의 동일성 또는 유사성이 유지된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면 같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테세우스의 배'는 어떤가.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 다른 조각으로 대체해 나가다가 결국 모든 조각을 다른 조각으로 대체했다면 그것은 원래의 배와 동일한 것인가?
저자인 탁석산씨는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먼저 '보편성'이라는 허상을 깨는 것에 도전한다. 보편 개념은 우리가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 보편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바다의 색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냥 편의상 바다는 파란색이라고 추상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중요하다. 한국의 정체성이라 할 때 이는 한국인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는 개별 개인들의 총합을 얘기하는 것이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탁석산씨는 예를 들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는 '세계적'이란 말 자체에서 보편이 사용되고 있다. 보편은 편의상 부르는 것일뿐 허상이다는 명제에 따르면 탁석산씨는 '세계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고 미국적이거나 한국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세계적=미국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에 진출하려는 방향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홍콩의 예처럼 세계적(=미국적)인 것을 홍콩의 영화에 담아내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탁석산씨는 제안한다.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하지 말고 세계적(=미국적, 일본적)인 것을 한국적인 것에 흡수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는가고.
이제 다시 본론. 그렇다면 정체성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탁석산씨는 그 기준으로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3가지를 들고 있다.
'현재성'은 시원(始原)이 중요하지 않고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원된 과거나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과거는 정체성의 대상이 되지만, 전통이 현재성을 상실한다면 훈고학이 될 뿐이라는 지적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대중성'에 대한 접근도 신선하다. 우선 다수가 좋아하고 염원하고 편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시대정신이 녹아 있는 것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소수의 한국인이 부르는 판소리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조용필이나 이미자의 노래가 보다 더 한국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의 기준이 '주체성'이다. 집단은 여러 가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현상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 정체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탁석산씨가 얘기하고 있는 정체성 판단 기준은 참으로 현실적이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판소리, 한복, 전통예절에 대한 채무의식이나 부담의식을 한편으로는 덜어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귀속되고자 하는 부담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 해서 현대인의 부담이 완전 해방된 것은 결코 아니다. 탁석산씨의 주장을 곰씹어보면 판소리, 한복, 전통예절 등이 그 자체로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의 혼돈에 빠지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이 그냥 과거에 의해서 편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시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에 '만들어가야 한다'는 부담 또한 가질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항상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현실에 대해 사유한다. 우리는 그 덕분에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훌륭한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