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목

 

할아버지와 손녀와 손자와 할머니와 큰엄마와 엄마와 큰아빠와 아빠와 작은엄마와 작은아빠가 냉이를 캐러 가고 있다

 

바구니를 들고 비닐봉지를 들고 과도를 들고 꽃삽을 들고 호미를 들고 연필칼을 들고 뻥튀기를 들고 나뭇가지를 들고 꽃가지를 들고 팔짱을 끼고 가고 있다

 

회빛 나무들과 뒤란들이 만나는 산자락

 

목련 한 그루가 하얗다

 

-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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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행복하게 살았는가를 가늠하는 척도 하나

"일출과 일몰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멋진 곳에서,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맞이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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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7-2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멋진 곳'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많이 다르겠지요. 하루의 땀을 씻는 공사판 함바집 수돗가일 수도 있겠고, 새벽녘 고깃배 들어오는 포구 어시장일 수도 있겠고, '서울의 달'을 가장 가까이 바라보던, 그래서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던 드라마 소재가 되었던 곳에서의 저물녘일 수도 있겠고...
 

흰 국숫발

 

슬레이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가

동촌 할매

자박자박 밤마실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더니

 

배는 출출한데 저 햇국수를 언제 얻어먹나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

 

흰 국숫발, 국숫발이

춤추는

 

저 국숫발을 퍼지기 전에 건져야 할 텐데

재바른 손에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나

쿵쿵 이 방 저 방

빈방

문 여닫히는 소리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

 

재바르게 이 그릇 저 그릇 국수사리 던져넣는 소리

쨍그랑 떵그랑 부엌바닥에 양재기 구르는 소리

솰솰솰솰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

 

후루룩 푸루룩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

 

수루룩 수루룩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

 

-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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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7-2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돌아가셨는가.

파란여우 2008-07-2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는 상가에서 국수 내는 집이 있었죠.
잔칫상에 올려지던 명줄 길다던 국수가 문상객들의 속을 풀어주던.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간단하게 치뤄지는 터라 국수먹고 오는 조문은 없어진지 한참되었습니다.

국수 삶는 일은 보기보다 쉽지 않아서 펄펄 끓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연륜 많은 노인네가 주로 국수를 삶았죠.
국수 퍼지기 전에 동물적 본능으로 건져 올리는 기술이 필요했으므로.
오늘은 시원한 국수 국물을 후르륵 마시고 싶네요.

달빛푸른고개 2008-07-25 09: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예전에 상가집 졸졸 따라다니며 얻어먹던 국수가 생각나는군요.
'장례'와 관련된 직접적인 표현 없이 그 풍경을 그려낸 작품이라 허락도 없이 올려보았습니다.
(워낙 시가 안 읽히는 시대라 이것도 허망한 일이지만...)

빈한한 집을 가끔 찾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시선 290
장철문 지음 / 창비 / 200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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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비 긋는 날씨였지만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아 우중입산을 하다.

이 시집은 오가며 읽어볼 요량으로 챙겨온 시집이었다. 

산중에 비는 더 거세져 바위에 걸터앉아 우산 쓰고 시집을 읽는 청승을 연출하다.

시 속에 빠져들고, 어지간해서는 읽지 않는 '해설'까지도 '해설자는 대체 이 시들이 펼쳐놓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궁금하여' 읽어보다.(나보다는 조금 더 단순하게 읽은 것 같은데...) 시집을 곁에 두는 것이 삶에서 필요한 일임을 새삼 깨닫다.

시인은 말한다. '다시 또 받아쓸 언어들이 찾아와준다면...'

세상을 향하여 한껏 열려진 시인의 안부가 궁금하다.(시 몇 편을 '페이퍼 쓰기'로 퍼나르는 실례를 감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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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를 먹다

 

신생아실에서 아이를 데려다 눕혀놓고

만산의,

두 시간 만의 출산이

순산도 너무 빠른 순산이어서

자궁에 혈종이 생겼다는 아내는

요도에 호스를 꽂았는데,

회복실을 빠져나와 끊은 담배를 피웠다

소주를 한 병 사서

어두운 벤치에서 혼자 마셨다

느티나무 가지 흔드는 바람자락에

형이 왔다

와서

내 어깨를 치고

아이를 들여다보고

아내에게 뭐라고 웃었다

형을 만지고 싶었다

웃음이 환하게 흩어졌다

형, 잘 가!

웃음 한자락이 남아서 오래 펄력였다

형, 아프진 않지?

남은 한자락이 마저 흩어졌다

 

입만 헹군 것이 미덥지 않아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아이의 기저귀를 갈았다

아내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술 마셨어?

홍삼 드링크를 한 병 마셨더니, 오르네

 

아가야, 이 소똥하고 이마받이한 녀석아!

아빠한테 삼촌이 있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다

이 물에 불어서 쭈글쭈글한 녀석아!

네가 와서

삼촌이 가셨구나

너를 마중하느라고 엄마가 피를 대야로 쏟았구나

 

 

-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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