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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겨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퉁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출처 :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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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10-01-0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많이 내리고 있는 1월 첫 출근날, 후배가 메신저로 보내온 시를 옮겨보다. 모처럼 눈이 많이 쌓여 온 세상이 하얗다. 서설이려나...
 

시인들이 술 마시는 영안실 - 정호승 

 

희미한 영안실 형광등 불빛 아래 

시인들이 편육 몇 점에 술을 마신다 

언제나 착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고 

죽음은 용서가 아니라고 

사랑도 어둠이었다고 

누구는 컵라면을 국물째 들이켜며 

철없는 짐승인 양 술에 취한다 

꽃이 죽어서도 아름답더냐 

왜 발도 없이 인생을 돌아다녔나 

겨울 나뭇가지 끝에 달린 이파리처럼 

어린 상주는 꼬부라져 영정 앞에 잠이 들고 

뒤늦게 누가 보낸 화환인가 

트럭에 실려온 흰 백합들이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보이고 있다 

달 없는 하늘에 별들만 푸른데 

영안실의 밤은 깊어가는데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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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9-11-22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뵙게 되는 분입니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아버지가 되라'는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가장 후회없는 일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몇 개월째 방치했던 서재를 다시 꾸리며, 옮겨봅니다.
 

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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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이홉 - 문인수 

누가 일어섰을까. 방파제 끝에 

빈 소주병 하나, 

번데기 담긴 종이컵 하나 놓고 돌아갔다. 

나는 해풍 정면에, 익명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정확하게 

자네 앉았던 자릴 거다. 이 친구, 

병째 꺾었군. 이맛살 주름 잡으며 펴며 

부우- 부우- 

빠져나가는 바다, 

바다 이홉. 내가 받아 부는 병나발에도 

뱃고동 소리가 풀린다. 

나도 울면 우는 소리가 난다. 

 

- <배꼽>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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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9-01-0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개월만에 시 한편을 읽어본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신분을 숨긴 경찰이 들어간 날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시를 읽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텐데...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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