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램의 희망 - 삶의 매순간은 신성하다
강인식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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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석사, MIT 박사, 그리고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학자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자동차 전복사고로 목 이하를 움직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다. 어쩔 것인가?

식물인간이 아닌 것만으로도 희망은 남아 있었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스스로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겐 다시 웃을 수 있는 희망이 되었다. 심지어 자신만을 위했던 그간의 삶을 반성하고, 남을 위해 살아가야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그 앞에선 절망은 사치다.


<밑줄>

다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손을 쓸 수는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은 아닙니다.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C4가 완전히 손상됐나요?”

그렇습니다

간결한 대답이었다.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런, 괜히 큰돈 쓰면서 비싼 병원에 왔잖아

USC 대학병원 중환자실의 사용료는 하루에 2천만원이 넘었다.

 

MIT에는 유명한 통계가 있다. 교수의 이혼율이 70%에 이른다는 것이다. 나는 솔로몬 교수의 말을 들으며 그 통계의 의미를 깨달았다. 늘 고민하지만 가정생활과 연구 과학자로서의 생활을 둘 다 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혼자서 하는 입시 형태의 공부에는 강할지 몰라도 연구에서 뒤처지는 것이 토의를 통해 자기 의견을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MIT에서 가장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입시 식의 공부를 지향한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기초연구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결과까지 한꺼번에 보장해야 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연구결과를 왜곡하거나 과대포장하는 것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연구 결과가 과장되었을 때 이를 잡아내고 제재를 가할 제도나 윤리적인 기준도 거의 없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면 될까?”

제가 보기에 형은 다친 직후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답을 구하신 것 같은데요?”

그 순간, 나는 맞아. 내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나만을 위한 삶에 대해 후회했었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과학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그런데 과학은 큰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과학은 불행히도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을 줄 수가 없다. 과학은 절대적이나 모든 것에 답을 주지는 못한다. 한 예로서 과학은 왜 우리가 사는지, 선과 악은 왜 있는지, 죽음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학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을가 싶어서 성직자들에게 물어본다. 그들은 이 문제들에 대해 우리에게 그럴싸한 설명을 해 준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 설명들에 기대기는 어렵다. 언제나 의심과 회의가 싹튼다. 러셀은 과학과 신학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놓인 그 넓은 회색지대가 철학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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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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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그럼 점성술사astrologer가 별을 보고, 천문학자astronomer는 점을 치나? 책을 끝까지 읽어도 대답을 직접적으로 들을 순 없었다. 다만, 날씨가 허락되는 날엔 누구든 별을 볼 수 있고, 별을 노래하는 건 가수의 몫이듯, 천문학자는 별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밑줄>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그러니 연구실에 홀로 남아 연구에 집중하는 밤은 정말이지 근사하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도 걸려오지 않고, 누군가 찾아오지도 않으며,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잊어도 되는 밤. 한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한 가지 주제에 오롯이 집중해 화장실 가는 것도 잊는 그런 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하나를 들여다봐도 이건 왜 그런지, 저건 왜 그런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면 하나씩 일일이 검색해보고, 찾아서 읽어본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료를 분석해보고, 그래프도 여러 가지 형태로 그려본다. 그러다보니 한 단계 전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지루함이 자연의 한 조각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다.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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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해 봐요 - 판사 김동현 에세이
김동현 지음 / 콘택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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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고, 카이스트, 연대 로스쿨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의료사고로 한순간에 시력을 잃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상상하기도 싫지만 분노하고 좌절하고 말았을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극복했다. 아니 극복이 아니라 적응했다. 아니 오히려 진화했다. 몸의 시력을 잃고 맘의 시력을 얻었다.

 

하늘이 저자에게 그런 고통을 주신 것은 어찌 보면 이런 진화를 원하셨던 것일까? 남의 도움 없이 혼자의 능력으로 충분했던 그에게, 남의 도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키워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월세를 송금하여 세 달 분의 월세를 밀린 세입자를 집주인이 법대로 내쫓았다. 저자는 이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세입자의 편을 들어주는 판결을 한다.

 

신은 저자 개인에겐 원치 않은 장애를 주었으니 너무나 불공평하다, 하지만 저자는 장애를 계기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눈을 떴고 그 결과 소외된 이들을 배려하는 판결을 하게 되었으니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공평하다.

 

성경에서 선한 욥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신의 아들이 예수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신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남부끄럽게 살지 않도록 고난을 주신다. 신의 아들조차도 거부할 수 없었다.

 

<밑줄>

어떤 선택이든 후회가 남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고, 길을 잘못 들었으면 돌아가면 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조금 방황하고 돌아가더라도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장애라는 건 그냥 불편한 상태에 적응하고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는 것이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마지막 3천 배를 마쳤다.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실망스럽지 않았다. 편안하고 담담했다. 스님께서는 기도를 마친 내게 말씀하셨다.

육신의 눈을 뜨지 못했지만 이제 마음의 눈을 뜬 거야.”

스님 말씀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내가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또 다른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자기에게 큰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사고 직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를 낼 기운마저 없었다. 그래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도 알았다. 사고가 난 그날 밤 나는 절망과 분노와 한숨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문득 병실 구석에 웅크린 채 잠든 의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저 의사도 자기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닐 텐데 새벽까지 혼자 동분서주하며 사고를 수습하려고 애쓰던 모습이 생각나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밉고 화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 도리는 하는 사람이다 싶었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렇다고 나를 착해빠진 순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대방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내 기준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그쪽이 상당한 힘의 우위를 쥔 상태라면. 나는 시킨다고 무조건 하는 스타일이 못 된다. 일일이 돌볼 여유가 없어 그냥 넘어가는 일도 많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군대에 있을 때도 부당한 지시에는 들이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 직장에서는 할 말 하려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위원장까지 했다.

 

현대와 같은 위험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나 사고 또는 질병으로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노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기능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 사람이 본인이 될 수도, 가족, 친구, 이웃이 될 수도 있다. 그때 가서 불편한 것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바꾸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우리 모두에게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복이 사람 복이라는데 정말 과분한 복을 받았다. 내 존재도 그들에게 복이었으면 한다. 민폐 끼치기를 세상 무엇보다 싫어하던 나였지만 이 시간을 통해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조금씩 기대고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 이다.

 

한번은 고민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어느 가게가 코로나19로 영업을 못 하게 되면서 월세가 밀렸다. 나중에 두 달 분 월세를 송금했는데 착오로 다른 사람에게 보냈다. 이걸 알아차린 것은 세 달 분의 월세가 밀린 뒤였다. 부랴부랴 월세를 다시 보냈다. 명백한 과실이긴 하지만 후폭풍은 컸다. 임대인은 계약갱신을 거절하고 가게를 비워 달라고 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3기분의 차임에 해당하는 금액에 이를 때까지 차임을 연체한 사실이 있으면 임대인이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법적으로 임대인이 인도와 원상회복을 요구할 수 있다. 영업도 제대로 못 해 보고 권리금까지 모두 날릴 판이었다.

임대인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 월세가 또 밀릴지 모르니 임차인을 내보내고 새로 들이고 싶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직접 영업을 해도 괜찮다. 법적 요건은 다 갖추었으니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임차인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 보았다. 월세가 밀린 건 잘못이 맞지만 송금 한 번 잘못했다고 억대의 돈을 투자한 가게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법이 너무한다. 법은 왜 이러하며 판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모른다.

우리 민법은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조항으로 판단하는 사건은 극히 예외적이다. 구체적인 개별 조항이 있음에도 이런 추상적인 일반 조항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왔지만, 임대인 손을 들어 주자니 임대인의 이익에 비해 임차인의 손해가 너무 컸다. 고민 끝에 상급심에서 파기될 각오를 하고 권리남용이라며 임차인 손을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임대인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되었다.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선거로 선출하는데 판사를 왜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선거는 다수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대표로 선출하는 절차다. 그렇게 뽑힌 사람들이 또다시 다수결로 법을 만든다. 애초에 다수의 논리가 지배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같이 승자독식의 선거 구조에서는 그런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힘 있고,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의견이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찍어 누른다. 수십 년째 통과되지 않는 수많은 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다 누가 죽기라도 하면 여론에 밀려 겨우 통과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부도 다를 바가 없다. 대통령제에서 지지율이라는 것은 정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기득권에 눌려 물러서는 일이 수없이 생긴다. 다수를 위해서라면 소수를 희생시키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게 다수결의 최대 부작용이고, 선출된 권력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법관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서 소외된 사람의 인권을 법관이 챙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독립성을 보장하고 탄핵 절차에 의해서만 신분을 박탈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도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사회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공익은 파편화된 사익이다. 판사로서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까지 소홀히하지 않고 소중하게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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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안준철 / 현대문화센터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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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김창기 작사 작곡 김광석 노래 그날들의 가사이다. 이 가사의 원조는 안준철 시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 나는 이미 그윽해진다이다.

 

거창 고등학교에 다녀온 뒤 나는 교사가 되겠다는 신념을 끝내 버리지 못하여 당시 식솔을 거느린 생활인으로서의 위기감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사범대학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첫 교단을 밟은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신내림을 거부할 수 없어 끝내 무당이 되는 것처럼 안준철 선생님은 그렇게 운명처럼 교사가 되었다.

 

그리곤 담임반 학생들의 생일에 시를 만들어 선물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자의 영전에 바치는 시까지. “계집 아이처럼 / 희고 고왔던 / 네 얼굴보다도 // 으깨진 뼛가루가 / 더 곱고 희더라 // 주검조차 눈부신 / 열아홉살 // 그 젊은 나이로 / 너는 정녕 / 먼 길을 떠난 것이냐 (‘하얀 주검)”

 

나는 고등학교 교사이다.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넘어선 시기와 질투의 시간, 즉 방학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쉬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방학이 아니다. 백여명 학생들의 생기부에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500자씩 입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악용해서 미사여구가 범벅된 거짓말을 입력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잤다. 떠들었다. 딴 공부했다라고 적어줄 수도 없어 괴로운 시간을 견디어 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안준철 선생님의 이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였다. 안선생님이 교단에 오른 것은 1980년대 말이다. 그때엔 지금처럼 거짓말 생기부를 강제로 입력해야 했던 시기가 아니다. 다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 제자에게 생일시를 써주는 일을 묵묵히 하셨다. , 나도 세특이 아니라 편지를 쓰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안준철 선생님과는 구면이다. 20년전 처음 만났을 때 퇴임을 10년 앞둔 노교사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 대한 사랑은 초임교사 못지 않은 낭만선생님이셨다(실제 별명도 낭만샘). 어느새 지금의 나도 퇴임을 10년도 채 남지 않은 늙은 교사가 되었다. 게다가 방학 내내 세특 작문하는 것에 진이 다 빠져버린.

 

그런데 운명처럼 이 시집을 만나게 되었고 이젠 세특을 편지처럼 써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안준철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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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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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담당 교사가 교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그의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학생들은 교사를 신뢰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신뢰하는 유일한 교사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군, 지난 1년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해 주었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시간만은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세희의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은 수학교사의 수업으로 시작된다. 이 교사는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 볼 기회가 온 것 같다.”라며 수업을 마무리한다.

 

학교 돈 1억원을 횡령한 재단 이사장의 대한 신문 기사를 읽고 있는 아버지, 그 집의 아들은 공부를 잘해 자기 또래의 어느 아이들 보다도 큰 특권과 고액 소득을 누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그러나 벌써 전부터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학교 교사들은 무엇이든 좋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일반 사회에서 인정하는 사고 방식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고, 그 뒤에는 많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너무나 바르고 너무나 옳은 그 생각들은 아들을 또 얼마나 괴롭힐 것인가? 사회에 나갔을 때 아들은 무서운 혼란을 맞을 것이 뻔했다.”

 

난쏘공의 마지막도 수학교사의 수업으로 마무리된다.

 

수학 담당 교사가 교실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그의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사를 신뢰했다. 오분의 일 정도는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대입 예비고사 수학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교사가 입을 열었다.

제군,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담당한 수학 성적이 예년보다 떨어져 제군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예비고사에서의 수학 성적이 나빠진 책임이 수학 교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제도를 만든 당국자, 그 제도를 받아들인 교육자와 학부모, 네 개의 답안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잡도록 사지 선다형의 문제를 만든 출제자, 문제지 인쇄업자, 불량 수성 사인펜 제조업자, 수험 감독관, 키펀처, 수퍼바이저, 프로그래머, 컴퓨터가 있는 방의 습도 조절 책임자, 판정자 역을 맡은 컴퓨터, 물론 나의 수업을 받은 제군 자신, 그리고 제군 앞에 서서 가르쳐야 될 나에게 늘 엉뚱한 주문을 한 진학 지도 주임과 그 위의 교감·교장, 또 가르침을 주고받아야할 제군과 나의 기분에 영향을 준 학교 밖 구성원들의 계획·실천·음모·실패 등 책임 소재를 정확히 밝히자면 들어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누구입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누가 선생님께 지웁니까?

그들이다.

교사가 말했다.

다른 학생이 일어섰다.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이다. 누가 이 이상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에게는 죽을 때까지 져야할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 듯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제군이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왔고, 또 고등학교에서 갖는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에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별 수가 없어서 수학 과목을 내놓았다. 다음 학기부터는 윤리를 맡으라는 통보를 이미 받았다. 제군도 잘 알다시피 윤리는 실제의 도덕 규범이 되는 원리이다. 제군이 결정자라면 수학을 못 가르쳤다고 책임을 물은 사람에게 윤리를 떠맡길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시간표에서 윤리 과목을 빼버리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제군과 제군의 후배들을 인간자본으로 개발하겠다는 음모이기도 하다. 제군과 나는 목적이 아니라 어느 틈에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 의도를 진작 알아차려야 했는데 제군은 대학에 가기 위해, 나는 제군을 시험에 붙게 하기 위해 뛰다가 노골적인 의도들도 읽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너무 바쁘기만 했다. 그 동안 바빴던 것은 과연 우리의 가치를 위해서였을까?”

 

난쏘공에 등장하는 인물은 두가지 유형이 있다. 장애인, 철거민,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 그리고 건설업자, 사장 같은 사회적 강자들이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착취를 당하는 자가 착취를 하는 자를 죽이고 자신도 사형을 당하고 만다는 결말이다. 그런데 복잡하게 바라보자면 소위 착취계급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안에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있다.

 

내가 약하다는 것을 알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나를 제쳐 놓을 것이다강자들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늘 강해야 하고 강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 약하다는 것을 알면 설령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구조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학교 교육 때문이다, 난쏘공의 수학 교사가 말했 듯.

 

제군과 나는 목적이 아니라 어느 틈에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 의도를 진작 알아차려야 했는데 제군은 대학에 가기 위해, 나는 제군을 시험에 붙게 하기 위해 뛰다가 노골적인 의도들도 읽을 수가 없었다.”

 

<밑줄>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 볼 기회가 온 것 같다.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

 

아들은 벌써 전부터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학교 교사들은 무엇이든 좋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일반 사회에서 인정하는 사고 방식이었다. 그런데 신애의 아들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고, 그 뒤에는 많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저희들도 난쟁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조세희 칼날 )

 

그들 옆에 법이 있다.

 

아버지는 그 동안 충분히 일했다. 고생도 충분히 했다. 아버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아버지보다 더 심한 고생을 했을 수도 있다. (생략) 할아버지의 아버지대에서 노비제는 사라졌다. 증조부 내외분은 아무 것도 몰랐다. 나중에서야 해방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두 분이 한 말은 오히려 저희들을 내쫓지 마십시오였다. 할아버지는 달랐다. 할아버지는 유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늙은 주인은 할아버지에게 집과 땅을 주었다. 그러나 쓸데 없는 일이었다. 모르는 면에서는 할아버지나 증조부나 같았다. 증조부대까지는 선조들이 살아온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나 할아버지대에는 그것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교육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집과 땅을 잃었다.

 

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 한 자로 너무나 엄격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았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

 

네가 할 일을 주지. 말을 잘 들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내쫓을 테야. 사실은 전부터 너를 봤어, 예뻐서.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든 안돼요하는 말을 내 앞에서는 쓸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 그러면 나는 너에게 내가 고용한 어떤 사람보다 많은 돈을 줄 용의가 있어.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난쟁이 아저씨들의 아들딸과 그 어린 동료들이 겪는 일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197*, 한국은 죄인들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화를 쉽게 냈던 무서운 욕심쟁이가 여기 잠들어 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는 죽었다. 평생을 통해 친구 한 사람 갖지 못했던 어른이다. 자신은 우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다고 자랑하고는 있으나 국민 생활의 내실화에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울지 않았다. (조세희 궤도회전 )


네 명의 가족을 둔 그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팔만 삼천 사백 팔십 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 이백 삼십 일 원이었다. 그러나 보험료, 국민저축, 상조회비, 노동조합비, 후생비, 식비 등을 제외하고는 어머니 손에 들어온 돈은 육만 이천 삼백 오십 일 원밖에 안 되었다. 이 돈을 벌어오기 위해 우리는 죽어라 일했고 어머니는 늘 불안해 했다. (조세희 -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 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기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런 집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날아들어갈 벌도 없다. 나비도 없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린 세상도 이상사회는 아니었다.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법을 가져야 한다면 이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 내가 그린 세상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운 이성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법률 제정이라는 공식을 빼 버렸다. 교육의 수단을 이용해 누구나 고귀한 사랑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생략)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세희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

 

발육이 좋지 못해 우리보다 작고 약하지만 그 작은 몸속에 모진 생각들만 처넣고 사는, 이런 부류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남다른 노력과 자본·경영·경쟁·독점을 통해 누리는 생존을 공박하고, 저희들은 무서운 독물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간다고 단정했다. 그 중독 물질이 설혹 가난이라고 하고 그들 모두가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도 아버지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저희 자유 의사에 따라 은강 공장에 들어가 일할 기회를 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마음대로 공장 일을 놓고 떠날 수가 있었다. 공장 일을 하면서 생활도 나아졌다. 그런데도 찡그린 얼굴을 펴 본 적이 없다. 머릿속에는 소위 의미 있는 세계, 모든 사람이 함께 웃는 불가능한 이상 사회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늘 욕망을 억누르고, 비판적이며, 향락과 행복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는 했다.

 

아버지는 월례 사장단 회의에서 아무리 제한된 운동밖에 할 수 없게 되어 있고, 또 협조적인 사람이 이끄는 노조라고 해도 그것이 기업에 이익을 줄 리는 없으며, 어느 날 화로의 재 속에서 불씨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 불씨에 불을 붙여 일어나면 기업에 해롭고 우리 모두에게 해로울 게 뻔하기 때문에, 현명한 경영자라면 조금 시끄러운 저항을 지금 받아 해결하지 노동자들에게 그것을 맡겨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생략) 아버지는 늘 노조는 우리 전체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악마의 도구라고 (조세희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

 

수학 담당 교사가 교실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그의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사를 신뢰했다. 오분의 일 정도는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대입 예비고사 수학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교사가 입을 열었다.

제군,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담당한 수학 성적이 예년보다 떨어져 제군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예비고사에서의 수학 성적이 나빠진 책임이 수학 교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제도를 만든 당국자, 그 제도를 받아들인 교육자와 학부모, 네 개의 답안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잡도록 사지 선다형의 문제를 만든 출제자, 문제지 인쇄업자, 불량 수성 사인펜 제조업자, 수험 감독관, 키펀처, 수퍼바이저, 프로그래머, 컴퓨터가 있는 방의 습도 조절 책임자, 판정자 역을 맡은 컴퓨터, 물론 나의 수업을 받은 제군 자신, 그리고 제군 앞에 서서 가르쳐야 될 나에게 늘 엉뚱한 주문을 한 진학 지도 주임과 그 위의 교감·교장, 또 가르침을 주고받아야할 제군과 나의 기분에 영향을 준 학교 밖 구성원들의 계획·실천·음모·실패 등 책임 소재를 정확히 밝히자면 들어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나 혼자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누구입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누가 선생님께 지웁니까?

그들이다.

교사가 말했다.

다른 학생이 일어섰다.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이다. 누가 이 이상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에게는 죽을 때까지 져야할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 듯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제군이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왔고, 또 고등학교에서 갖는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에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별 수가 없어서 수학 과목을 내놓았다. 다음 학기부터는 윤리를 맡으라는 통보를 이미 받았다. 제군도 잘 알다시피 윤리는 실제의 도덕 규범이 되는 원리이다. 제군이 결정자라면 수학을 못 가르쳤다고 책임을 물은 사람에게 윤리를 떠맡길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시간표에서 윤리 과목을 빼버리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제군과 제군의 후배들을 인간자본으로 개발하겠다는 음모이기도 하다. 제군과 나는 목적이 아니라 어느 틈에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 의도를 진작 알아차려야 했는데 제군은 대학에 가기 위해, 나는 제군을 시험에 붙게 하기 위해 뛰다가 노골적인 의도들도 읽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너무 바쁘기만 했다. 그 동안 바빴던 것은 과연 우리의 가치를 위해서였을까? (조세희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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