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 동녘문예 6
김산 지음, 조우화 옮김 / 동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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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근혜에게 큰 빚을 졌다. 박근혜가 담배값을 2배로 올린 해 담배를 끊었기 때문이다. 김문수에게도 빚을 졌다. 노동부장관 인사 청문회에서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노안에 이어 노이(?)를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다시 읽은 책이 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는 일제 강점기 당시 손기정의 국적이 뭐냐고 일본인에게 물었는데, 그 일본인은 손기정이 한국인인데 사실대로 얘기하면 한국인들이 건방지게 될까봐 조심스럽게 얘기를 한다.


올해 광복절은 79주년만에 두쪽이 나버렸다. 김산이 이런 상황을 알면 어떤 생각을 할까? 김산이 감옥에서 앞서 다녀간 사람들이 써 놓은 글귀들을 소개한 대목이 있다. 그 중의 한 문장이 아마도 김산의 마음을 대변하리라 본다. “나는 귀신이 되어 돌아와서 한국에 있는 왜놈이란 왜놈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밑줄>

(님 웨일즈)는 주저하지 않고 한국인이 극동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단정하였다. 키가 크고 강인하고 힘이 세며 항상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뛰어난 운동선수들을 배출시키고 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손기정이라는 한국 젊은이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흥분하였으며, 그 뉴우스는 어느 곳에서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모든 신문사에 압력을 넣어서, 마침내 그 사람이 한국 이름을 가지기는 했지만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 성명서를 내게 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의 승리라고 하여 그 공적이 크게 보도되었다.

도대체 그 사람이 한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하고 나는 호텔 서기에게 물어보았다.

아마도 한국인일 겁니다그 일본인 서기는 빙그레 웃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그대로 발표한다면 한국놈들은 엄청나게 건방지게 될 겁니다. 그러면 사고가 일어나겠지요. 한국놈들이 바로 이 자리에서 축하행사를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스물 다섯 명이나 되는 혁명가의 자서전을 썼는데, 김산은 내가 만났던 그 혁명가들에게서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품성을 지니고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한국혁명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

 

삼일운동 이전까지는 나(김산)도 정기적으로 교회에 다녔다. 비록 기도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교회가 한국에서 가장 가장 훌륭한 기구라는 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파멸을 본 이후에는 내 믿음이 깨져버렸다...구라파 전쟁 때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이 서로 살상하였던 것이다.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는 것이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었을 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모조리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들은 미국식 정치방법을 배웠다. 그런 후에 191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중산층 정치집단을 대변했다. 거의 모두가 교사, 학생, 언론인, 변호사, 의사였다.

 

일본, 독일, 소련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당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이런 부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신사이고 좋은 지위와 기독교적행동만을 원한다.

 

1923년의 사건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일본의 중요한 정치가는 이 배반적인 학살이 있은 후에 극동의 어느 민족도 일본적 우호의 진실한 내용에 대하여 속지 않게 된 것을 깨닫고 자기들이 한 짓거리에 놀래버렸다.

 

지금까지도 인간본성에 대한 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진정한 선량함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때면 이 목사님을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두 번 다시 이 안동희 목사나 그의 딸을 보지 못했다...안동희와 그의 부인과 딸은 두 아들이 산 채로 세동강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았다. 그런 후에 노목사는 억지로 맨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고 그 속에 누웠다. 그러자 왜놈 병사들이 산 채로 그를 매장하였다. 세 명의 죽음을 억지로 지켜본 후에 부인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 학창시절의 첫사랑이었던 열네 살짜리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두 부류의 민족주의 그룹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아메리카파 대 시베리아-만주.

아메리카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한국의 독립을 미국와 윌슨대통령이 도움에 의존하여 이루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지도자인,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월슨대통령과 동기동창이었으며 윌슨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온 대부분의 한국인, 특히 기독교인들은 해외에서 돌아온 유학생, 일반지식인과 함께 아메리카파를 추종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신사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설득력있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면 한국이 독립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왜놈들의 사기를 꺾으려는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에 원조마저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아메리카파는 백여명의 의원을 갖는 의정원 내에서는 다수파였다.

시베리아-만주파 의원은 겨우 팔십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일파는 초창기부터 민족운동의 지도자였으며 몇 년 동안이나 왜놈들과 싸웠던 이동휘 장군에 의해 영도되었다. 이 일파는 왜놈들과 정식으로 전쟁을 하기를 원했다...여기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했던 사람들인데, 이곳에서 그들은 한국국경을 따라서 끊임없는 유격전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의정원이 자기의 제안을 부결시키자 장군은 의정원의 신사적인고지식함에 너무도 넌덜머리가 나서 총리직을 사퇴하였으며 다시는 임시정부와 협력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공산당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말하였다...이동희 장군은 러시아의 선례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된 최초의 한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국은 소련과 아주 가까운 사이다. 10월 혁명 때, 수천면의 한국인이 싸웠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극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18년에 장군은 이르쿠츠크 공산당이라는 최초의 한국인 공산당을 조직했으며, 그 일로 모스크바에 갔다...이동휘는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오십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안평산이라는 한국인 변호사가 그 중 삼십만 달러를 소련에서 몽고로 가지고 갔는데, 도중에 비적에게 살해되었고 돈도 강탈당했다...김립이라는 한국인 공산당원이 나머지 이십만달러를 상해에 가지고 왔다...김립은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임시정부측 정적에게 뒤에서 저격을 당했다...그런 후 임시정부는 은행에서 이십만덜러를 꺼내서 사용해 버렸다.

 

의열단원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다른 운동을 함으로써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의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우리 진영에는 의사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부상당한 테러리스트들에게 도움을 준다거나 그들의 입원을 보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부상자와 고통 가운데에서 살아 가리라는 것, 그리고 의학지식 때문에 혁명에 대한 나의 공헌이 높아지리라는 것을 예상하였다. 또한 나는 모든 종류의 과학을 좋아하였다. 더구나 의학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사회적인 과학이고 박애성에 있어서 최대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형과 약속을 하고 중국 굴지의 국립북경의과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톨스토이의 금욕주의와 루소 사이의 어딘가에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톨스토이는 처음에는 여자를 좋아하였지만, 창작을 하기 시작한 뒤에는 일체 여자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첫 번째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내 갈 길을 가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그토록 친절하면서도 적에 대해서는 그토록 잔인하다는 것을 나는 생각하였다... 문제는 누가 죽느냐 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지배계급은 학살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수세대에 걸쳐서 살육을 해왔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내 손이 추위로 얼어붙는 것조차 몰랐다. 나는 젊고 행복했던 때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았고, 이제 다른 별 위에서 새 생활이 시작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인류의 짐을 어깨에 지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열한살 때부터 세계를 변혁시키려고 분망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가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는 민족주의자였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는 이상주의자요 무정부주의자로,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확고한 발판을 찾아다녔다. 이 발판을 나는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가운데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공산당에 들어갔다.

 

1932년 초 나는 보정부에 있는 유명한 제2 사범학교의 학생단체로부터 그곳에 와서 강의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중국경찰이 학교를 둘러싸고 나를 체포하러온 일본 경찰 한놈을 데려왔다... 학생들이 달려나와서 내가 체포되지 않도록 교문을 걸어닫아 버렸다...내가 떠날 때 많은 학생들이 울었다.

 

전향을 거부하는 것은 관념적이고 어리석고 미치광이같은 짓이었을까? 대중 앞에서 전향을 하여 재차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 단 하나의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간단한 일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확고히 결심을 하였다. 자기 자신도, 자기 당도, 또한 다른 어떤 사람도 절대로 배반하지 말자.

 

내가 결혼을 했으며 거의 집안일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그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더니 이윽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이 몇 해를 통털어서 자네와 짝이 될만한 아가씨를 꼭 한 사람 만났지. 지금 그녀는 이곳 상해에 있다네. 무엇 때문에 자네는 타협해버렸나? 이곳에서 세기의 대사랑을 맺어주었으면 했었다네

그녀를 만나고 싶지가 않아요. 내 조그많고 귀여운 마누라를 참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예전에 가졌던 그 모든 덜익은 환상은 모조리 잊어버렸어요. 충성과 관용과 선량함이라는 점에서 나는 도저히 그녀를 따라가지 못해요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어버렸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네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한국, 만주, 시베리아, 일본 및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직접적인 것에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좋은 평가를 계속 유지한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가지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인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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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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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그의 저서 그리고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책, 연극, 드라마 등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눈에 가장 띄는 건 영화들이다. 다만 여기에 추가했으면 하는 목록은 빌리엘리엇, 마진콜, 빅쇼트, 카트, 빵과 장미, 다음 소희,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등이다. 음식재료와 경제를 연결한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처럼 영화와 경제를 연결한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해 본다. 덧: 그런데 장하준은 장준하, 정준하, 장범준이랑 무슨 관계?ㅋ

 

96쪽 브레스드 오프

97쪽 월스트리트

100쪽 트라비에게 갈채를(이건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영화지만 꼭 언급했으면 해서)

195쪽 마이 페어 레이디, 리타 길들이기, 마르셀의 여름

196쪽 트루먼쇼

227쪽 매트릭스

272쪽 메리 포핀스

324쪽 슬럼독 밀리어네어

351쪽 로저와 나

352쪽 풀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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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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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 벼르고 벼르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Great Transformation을 읽었다. 제목이 비슷하다고 하여 영화 트랜스포터나 트랜스포머의 단순 무식한 재미를 기대하면 안된다. 저자의 본문보단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발문, 옮긴이(홍기빈)의 해체가 기억에 남는 건 왜일까?.ㅠ 독자의 무식함 때문이겠지만 역시나 고전읽기는 늘 고전한다ㅋ 그래도 신자유주의자의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할 총알 하나를 더 구한 보람은 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니 나야말로 찐자유주의자. 그러고보니 요즘 뉴라이트(신우익)가 문제던데 찐우익은 어딜가고 짭우익만 판을 치나 뉴라이트가 아니라 노라이트, 또라이트구나.


<밑줄>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의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주 씨를 말려 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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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과 의열단 - 김원봉의 항일 투쟁 암살 보고서
박태원 지음 / 깊은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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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이 쓴 의열단 이야기이다.

첩보영화를 보면 첩보원은 애인이나 배우자 등 가족을 둘 수 없다. 가족이 있으면 가족을 지킬 수도 없고, 가족을 지키려다 조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영화 같은 삶이 바로 의열단의 이야기였다.

또한 의열단원은 대부분 2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이다. 인생의 황금기에 의혈단으로 활동하다가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한다. 영화 보다 더 슬픈 사연이다.

가끔 이런 비장한 삶을 읽으면 내 삶의 흐트러짐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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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이생에서는 다시 못 볼 사람을 보기라도 한 듯 놀라고 반가워하였다. 김익상, 그는 아내 얼굴을 대하는 것이 반갑지 않을 것은 없었다. 그러나 큰일을 앞둔 그는 사랑하는 아내마저 속여야만 하였다. 이번에 자기가 띠고 온 중대 사명에 대하여는 일체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폭탄과 권총이 들어 있는 보퉁이는 그날 밤 자기가 머리에 베고 잤다.

20, 인생의 가장 유익한 시기를 옥중에서 보내고, 30 전 청년은 어느덧 50객 중노인이 되어 김익상은 다시 이 사바세계로 나왔다. 21년 만에 돌아와 본 집안에 아내는 있지 않았다. 김익상의 최후는 분명치 않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형기가 결정되었다.

김시현 4212

황옥 3812

유석현 2410

홍종우 318

박기홍 227

백영무 316

조황 425

남영득 275

유시태 335

유병하 273

조동근 283

이경희 4416개월

 

이 사건에 희생된 의열단 투사들은 다음과 같다.

구여순 32

오세덕 28

문시환 26

강홍렬 22

김정현 22

배치문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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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이 전 세계 역사를 바꿨다고? - 요즘도 과거시험을 보면서 살고 있는 아이들 특서 청소년 인문교양 2
이상권 지음 / 특별한서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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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국가든 기업이든 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 채용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왜냐면 핏줄이나 돈줄로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시험은 공정한 제도일까? 이 시험이란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소설가의 입담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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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돈이 시험의 합격 여부를 결정했단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한양에도 일찌감치 집을 구해놓고 끊임없이 본가를 오가면서 먹거리를 조달해주었지. 아예 한양에 시험 보는 캠프를 차린 셈이지. 한번 한양에 올라가면 최소 6개월 이상은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거야.

 

왕이 내는 시험문제가 어떤 유형이었는지 알아볼까?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여라.”

이것은 세종이 냈던 문제란다.

또한 광해군은 지금 당장 가장 시급한 국정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라는 시험문제를 냈어.

그걸 본 임숙영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썼어.

나라가 도탄에 빠지고 외척들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왜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으십니까?”

그런 식으로 학생이 왕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고 든 거야. 그러고는 국정 혼란의 원인이 왕에게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했단다.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우리나라 공무원 시험 중에도 마지막 단계에서 면접시험을 보는 일들이 더러 있는데, 그때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하면 모두 다 탈락하게 되지 않을까. 교원임용고시에서는 전교조를 옹호하거나 정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해서도 안 되고, 사법고시에서도 사법제도를 비판하면 안 되지.

왕 앞에서 보는 시험은 수험생들이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어. 왕은 문제를 낼 수 있지만 채점하는 권한은 없었어. 채점하는 사람들은 수험생들이 논리적이면서도 자기의 생각을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어.

 

과거장에 응시생이 수만 명씩 몰리게 되면 통제가 불가능해졌고 결국은 양반집 수험생들이 고용한 힘셈 무인과 노비들까지 들어와서 부정 시험을 공모했어.

 

이익은 25세 때 응시한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뽑혔으나 이름을 쓰는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락되었어. 그러자 이익의 형이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매를 맞고 죽는 일이 생겼단다. 이익은 그 충격으로 과거 공부를 접게 된단다. “과거시험이라는 것은 출세를 탐하는 무리들을 사방에서 모아놓고 오직 한 가닥 요행의 길을 터놓은 다음 사람들더러 뚫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세상에 실제로 쓸모 있는 것과는 이미 정반대의 것이다이익은 과거가 계속되면 학풍은 날로 쇠퇴하여 진정한 선비가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어.

 

과거제도의 핵심은 공평한 인재 등용이었고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공부에 역점을 뒀다. 즉 옛날 공부의 기본은 철학과 글쓰기였다. 그러니까 요즘처럼 영어 수학만 잘해도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과는 다르다.

철학이란 대부분이 유교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고 글쓰기란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하지 못하면 절대 좋은 직장도 얻을 수 없었고 고위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요즘 우리나라에 치러지는 고시보다도 과거시험이 훨씬 더 좋은 제도였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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