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일 창비청소년시선 30
오은 지음 / 창비교육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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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의 마음의 일나는 오늘로 시작해 나는 오늘로 끝난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오늘은 비록 일요일이라도 불행하다, 다만 그런 불행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순간 우리 모두의 불행은 행복으로 피어난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가 해피엔드(happy end)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피 앤드(happy and)가 되어 내내 행복이 이어져가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 ’(oh! always)이다.

 

<밑줄>

 

나는 오늘 일요일 /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오늘 )

 

딴청을 피우면 안 된다 / 딴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 어른들은 말씀하시지만

딴에는 / 딴이 우리를 꿈꾸게 한다고 / 우리를 각기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

 

골목길이 환해졌다 / 넌 참 잘 웃는다 / 사람을 기분 좋아지게 만들어

나도 잘하는 게 있다 / 하나는 / 적어도 하나는

(하나는 )

 

우리에겐 해피엔드(happy end)가 아니라 해피 앤드(happy and)가 필요하네

(해피엔드 )

 

힘이 쪼끔이라도 있을 때는 / 쪼끔이 쪼금이 되고 / 쪼금이 조끔이 되고 / 조끔이 조금이 되는 놀라운 말

(힘내,라는 말 )

 

나는 오늘 불행해

그럼에도

나는 오늘 살아가

나는 오늘 피어나 / 나는 오늘 나야

내내 나일 거야

(나는 오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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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산유고
윤선도 지음, 이형대 외 옮김 / 소명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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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많은 시조 작품을 만들어, 가사 문학의 정철과 함께 수험생을 괴롭히는(?) 작가이다. 정철이든 윤선도이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강직한 (나쁘게 말해 융통성 없는) 성격 탓에 유배를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도시 정치판에서 밀려나 시골 자연 속에 있다 보니 벗할 사람 없으니 자연친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술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 한들 이렇게까지 반가우랴

말도 없고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산중신곡 만흥 )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떠오르니 그 모습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산중신곡 오우가 )

 

어찌보면 오늘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의 원조가 아닐까? 도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돈과 몸을 잃고 자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애잔한 이야기다.

 

참고로 아이를 잃은 아빠의 슬픔을 노래한 한시도 눈길을 끈다. 윤선도에게는 인의, 의미, 예미라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차남과 삼남은 윤선도보다 일찍 죽었다. (심지어 아내도 일찍 죽었다) 서자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막내 서자의 이른 죽음을 두고 남긴 두 작품이 인상적이다.

 

<밑줄>

미아의 죽음을 슬퍼하며 (悼尾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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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달래다 (遣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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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신곡 (山中新曲) 중 만흥, 오우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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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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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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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
강민경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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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이 현대에도 재미와 의미가 있으려면 작가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 주는 게 효과적이다.


천하의 이규보가 과거 시험에 여러번 낙방하고, 급제(꿈에 규성이라는 별이 급제 사실을 알려줬다고 이름도 규성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개명했다고)한 이후도 백수생활을 8년간 하다가 고위관료에게 청탁한 끝에 간신히 관직에 들어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울러 어렵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동료랑 싸워서 해고당하고 9년간 또 백수가 된 점도 동병상련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술 좋아하고 기타 연주 좋아하는 건 오늘날 우리가 공감하기에 좋은 점 아닌가.


이렇게 편하게 이규보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원전을 접하게 해주는 게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밑줄>

 

저는 우둔한 자질로 과거에 합격한 지가 벌써 8년이 지났으나 일명(一命)의 벼슬도 제수받지 못하였더니, 이제 은상(恩相) 각하(閣下)께서 전부(銓部)의 권한을 맡아 선비들의 정감(精鑑)이 되셨음을 듣고 그냥 물러설 수 없어서 감히 진출을 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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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완산(完山)의 서기(書記)로 있었다가 동료에게 중상을 입어 파면을 당하였다. 내가 서울에 온 뒤로도 그 사람은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앉아서 교묘한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9년 동안을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곧 사람이 하늘을 이긴 것이다. 어찌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곧 그해에 한림(翰林)에 보직을 받았고 따라서 여러 요직을 거쳐서 빠르게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이것은 바로 하늘이 사람을 이긴 것이다. 사람이 어찌 끝내 방해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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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마시고 한 곡조 타서 이것으로 가락을 삼으니, 이것 또한 일생을 보내는 한 가지의 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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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한때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이,

임궁(琳宮)에서 범어를 파하니 / 琳宮梵語罷

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 天色凈琉璃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부식(富軾)이 그 시를 좋아한 끝에 그를 구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은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陰鬼)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두고 시를 짓기를,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는냐? ,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桃花點點紅

라고 하지 않는가?”

하매, 부식은 마음속으로 매우 그를 미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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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걷다
김태빈 지음 / 레드우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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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이육사 황혼)”

 

이육사는 1904년생이고, 그의 딸 이옥비는 1941년생이다. ‘육사, 걷다의 작가 김태빈은 197*년생이다.

 

인간은 외로울지 모르지만 육사는 외롭지 않다. 이들이, 우리가 그와 함께 걷기 때문이다.

 

의로운 길을 걸을 때 외롭지 않도록

 

: (일본) 육사를 걷던 박정희나, (한국) 육사를 걷던 전두환은 의로운 길을 걷지 않았으니 (저승길이) 외로울 것이다.

 

<밑줄>

육사는 어려서부터 멋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안경알 없는 안경도 멋 때문에 썼단다. 나는 종종 1941년에 촬영해 가족과 친구에게 선물했던 중년의 육사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청년 육사는 영락없는 모던보이였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1940년 육사가 발표한 현주·냉광-나의 대용품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식용품에는 가배에 다분히 딴 놈을 넣는 모양이나 넣을 때 보지 않는 만큼 그냥 마십니다마는, 그도 심하면 아침에 삼월(三越)에 가서 진짜를 한잔합니다.”

여성이란 잡지에 기고했기에 일상생활의 단면을 가볍게 쓴 것으로 보이는 이 글에 따르면, 중일전쟁 이후 부족해진 일용품을 대신한 상품이 널리 팔렸던 것 같다. 대용품이니 질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개중에는 가짜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 같은 기호품은 더 구하기가 어려웠을 테니 모던보이 육사로선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으리라. 그럴 때 육사는 미쓰코시(三越)에 간다고 했다. 육사와 교우했던 김기림은 조지야(丁字屋)에서 캘리포니아산 커피를 마셨다는 글을 남겼다.

 

그때 옥비 여사는 내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했다. 너무 놀란 내가 재차 확인했을 정도였는데, 만약 이육사 선생이 해방을 맞았다면 북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는 말씀이었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의 반공 체제 확립과 친일파의 준동, 그리고 두 동생의 월북까지 모두 이유가 되겠지만, 육사의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는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노선이자 방법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나는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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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저리 아저씨 - 한흑구 제3수필집·유고집
한흑구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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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가 생전에 낸 수필집은 두편인데, 사후에 남은 수필들을 묶어서 낸 세 번째 수필집인 셈이다.

 

나의 이름과 내가 쓴 시가 영문으로 인쇄된 것을 처음부터 바라볼 때에 나는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것보다는 알바는 물론이고, 학보 문예부의 여학생 기자들까지도 나를 큰 시인인 것 같이 대우하고 또한 격려하였다. 나는 용기를 얻어서 밤을 새우면서 영미 시인들의 시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학보에 수십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순정의 학우 알바 )”

 

한흑구는 수필가로 유명했지만 시작은 시인이었다. 그가 밤을 새우면서 시를 쓴 이유는 그가 좋아했던 스웨덴 여학생 알바와 학부 문예부 여학생들 때문이었다. 스물의 흑구는 나라 잃은 설움이나 조국에 두고온 어머니나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아버지 생각은 잠시 잊어도 될 나이였다.

 

중학시설에 나는 새벽마다 모란봉을 산책하는 것으로 새벽 일과를 삼았었다. 두 손에 아령을 쥐고 뛰기도 하고, 대동강 물에 냉수마찰을 하였다. 서문 안에서 살고 있던 나의 산책 코스는 서편 길로 모란봉을 올라가곤 했다. 서문여고, 숭의여고, 정의여고가 서 있는 길 복판을 뚫고, 만수대를 넘어서 서평야에서 들어오는 큰길을 건너 토성을 끼고 칠성문을 지나 을밀대로 오르는 것이었다 (모란봉의 봄 )”

 

실향민 한흑구가 평양 살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남중생 한흑구에게 서문여고, 숭의여고, 정의여고 길은 매일 산책 코스였나 보다. 숭의여고는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서문여고랑 정의여고는 남쪽에 동명이교(?)가 나중에 개교하였다. 

 

정해진 주제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소재의 탐구에 오랜 시간을 보내며 관찰과 이해를 얻기에 노고를 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무를 쓰는 데 5, ‘보리’ 3, ‘석류’ 2, ‘코스모스’ 2년 등의 시간을 경과하며 관찰한 뒤 붓을 들었던 일이 있다 (직관력과 영감 )”

 

수필 한편 쓰기 위해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니, 작가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ㅠ.ㅠ 다만 가난은 부유보다 좋은 글감이니 벌이를 위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게 역설적인가?

 

“70이 다 되어가는 나는 젊어서 나의 집과 땅과 재산과 고향마저 잃어버리고, 타향에서 늘 향수의 서러움 속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잃었던 나의 조국을 되찾은 기쁨과 행복 속에서 더 오래 살고 싶은 희망에 차 있는 것이다. 어서 남북이 통일이 되고,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젊은 날에 뛰어놀던 나의 모란봉 꼭대기에 입을 맞추는 기쁨에 감격하고 싶은 것이다 (노년이 맞이하는 일 년 )

 

조국이 통일되어 평양으로 귀향하여 젊은 날 뛰어 놀던 모란봉에 입 맞추는 기쁨을 소망하며 이 수필을 썼는데, 그로부터 3년만에 별세를 하고 만다. 한흑구 사후 50년이 지난 오늘도 조국은 여전히 분단된 상태이다. 2026년 기준 실향민 생존자 약 3만 명 중 70% 이상이 80대와 90대라서 10년후에는 거의 다 돌아가실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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