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휴먼카인드 (리커버 특별판)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평점 :
성선설과 성악설을 두고 논쟁을 하면 예전에 속으론 성악설을 지지하지만 겉으론 성선설을 주장한다. 즉 도덕적으로 접근해서 성선설을 주장해야 남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리부동한 위선적 태도야말로 비도덕적인 행동이니 오히려 남부끄러운 일이다.
요즘엔 성악설을 주장하는 쪽이 많다. 당당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하니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다. 즉 오히려 도덕적이다. 그러나 과학적이지는 않다.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의 문제는 예전의 도덕적 윤리적 철학적 논쟁의 장을 벗어나 과학의 영역이 되었다.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본성은 선할까 악할까? 저자는 어마어마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해내고 있다. 기존에 우리가 알았던 상식들을 모두다 깨버리고 있다. 예를 들어 성악설의 대표적인 근거였던, ‘파리대왕’, ‘이스터섬’, ‘스탠퍼드 교도소’, ‘스탠리 밀그림의 전기 실험’, ‘캐서린 제노비스의 죽음’ 등등이 모두 잘못 알려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축복이다.
<밑줄>
현대 미디어의 광란은 일상에 대한 공격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리는 삶은 예측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좋기는 하지만 지루하다. 따라서 우리는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 훌륭한 이웃을 더 좋아하지만, ‘지루함’은 당신을 주목하게 만들 수 없다. ‘좋다’로는 광고를 팔 수 없다. 그래서 실리콘밸리는 어느 스위스 작가의 재담처럼 “뉴스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설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우리에게 점점 더 선정적인 클릭베이트를 계속 제공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교리는 서구에서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전통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의 목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루키디데스,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홉스, 루터, 칼뱅, 버크, 벤담, 니체, 프로이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은 각각 문명의 껍데기 이론에 대한 그들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침팬지와 오랑우탄은 모든 인지 능력 검사에서 인간의 두 살 아기와 동등한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학습에 관해서는 유아들이 매우 수월하게 이긴다. 대부분의 유아는 100퍼센트, 대부분의 유인원은 0퍼센트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초사회적 학습 기계로, 우리는 배우고 유대감을 형성하며 놀기 위해 태어났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얼굴을 붉히는 능력을 갖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어쨌든 얼굴을 붉히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적 형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신뢰를 증진시키고 협동을 가능케 한다.
우리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인간에게는 또 다른 특이한 특징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눈에 흰자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하면서 우리는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천재와 비슷하다. 개개인의 뇌는 더 컸지만 집단으로서는 똑똑하지 못했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는 개별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똑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피엔스는 더 큰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살았고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더 자주 이주했으며, 아마 모방도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 네안네르탈인이 초고속 컴퓨터였다면 우리는 구식 PC이지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던 셈이다. 우리는 더 느렸지만 더 잘 연결되었다.
우울한 책인 ‘이기적 유전자’는? 이것은 ‘뉴욕’이라는 잡지에서 ‘자기중심시대’로 칭송되던 1970년대 사고방식과 맞아떨어진다. 1990년 후반 리처드 도킨스의 열렬한 팬이 도킨스의 아이디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책은 CEO 제프리 스킬링에게 거대 에너지 기업인 엔론 전체를 탐욕의 메커니즘으로 운영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스킬링은 엔론의 업무 평가를 위해 ‘랭크 앤드 양크(Rank and Yank 등급 매겨 쫓아내기)’를 도입했다. 1등급을 받은 사람은 최고 실적을 달성했으므로 두둑한 보너스를 받았다. 반면 최하위인 5등급을 받은 사람은 시베리아로 유배 가는 집단에 속하게 되고 망신을 당할 뿐 아니라 2주 내로 사내의 다른 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해고되었다. 그 결과 직원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홉스식의 기업 문화가 탄생했다. 2001년 말 엔론이 대규모 회계 부정을 저질렀다는 뉴스가 보고되었다.
과학은 1970년대 이래 눈부시게 발전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후속판에서 인간의 천성이 이기적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수정했으며, 그 이론은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었다. 투쟁과 경쟁이 생명체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협동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생물학과 1학년이면 누구나 배우게 된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개인을 우상화하는 일은 드물었다. 가장 추운 툰드라에서 가장 뜨거운 사막에 이르는 세계 모든 곳의 수렵채집인들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모든 동물, 식물 그리고 대지와 연결된 휠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고 보았다.
우리의 몸이 음식을 갈망하듯이 우리의 영혼은 유대를 갈망한다. 우리는 적어도 혼자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불평등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결정은 집단의 권한이며 구성원 모두가 발언권을 가지고 오랜 시간 숙고한 끝에 내려졌다. 미국의 한 인류학자가 무려 339건의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확증한 사실에 따르면 “떠돌이 수렵채집인들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관심을 갖는다”
동시에 이 사회는 구성원들을 겸손하게 유지하기 위해 수치심이라는 단순한 무기를 사용했다. 캐나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는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과 함께 생활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수치심이 우리 조상들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쿵족의 일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자랑하는 사람을 거부한다. 언젠가는 그의 자존심이 누군가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가 잡은 고기를 쓸모없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화하게 만든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의 금기사항은 쌓아놓기와 몰래 숨겨놓기였다. 우리는 역사의 대부분 동안 물건이 아니라 우정을 쌓았다. 이에 대해 유럽 탐험가들은 언제나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사람들의 너그러움에 불신을 나타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일지에 “당신이 그들에게 가진 것을 달라고 요구하면 결코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어느 누구와도 나누겠다고 제안한다”라고 기록했다.
과학자들은 남녀평등이 호모 사피엔스를 네안네르탈인과 같은 다른 호미닌보다 우세하게 만들어준 핵심 장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장 연구에 따르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성은 대부분 형제 및 남성 사촌과 어울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권위가 여성과 공유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보다 다양한 사회관계망을 갖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친구가 많을수록 궁극적으로 더 똑똑해진다.
수렵채집인들도 그들의 연애 생활에 대해 꽤 느긋했다는 뚜렷한 징후가 있다. ‘연속적 일부다처제’는 일부 생물학자들이 오늘날의 우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평생 파트너가 평균 2,3명이고 여성이 선택권을 가진 탄자니아의 하드자족을 예로 들어보자. 또는 여성이 평생 동안 평균 12명의 남편을 두는 파라과이의 산에 거주하는 아체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잠재적인 아버지들의 이처럼 거대한 네트워크는 모두 자녀 양육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7세기의 한 선교사가 이누 부족의 일원에게 외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지각이 없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자식만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리 부족의 모든 자녀를 사랑한다”
정착지와 사유재산의 출현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퍼센트가 99퍼센트를 억압하기 시작했고, 달변가는 지휘관에서 장군으로 그리고 족장에서 왕으로 등진했다. 자유, 평등, 형제애의 시대는 끝났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집인들이 일주일에 평균 20시간에서 30시간 일하면서 매우 편안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부들은 들판에서 땀을 흘려야 했다.
사유재산과 농업의 부상은 원시 페미니즘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결혼 적령기의 딸들은 소나 양 같은 물물교환용 상품에 불과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들의 새로운 집안에서 이 신분들은 의심을 받았으며, 아들이라는 선물을 낳은 뒤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지위를 인정받았다. 합법적인 아들을 말이다.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부장제가 탄생한 것이다.
유목민으로서의 우리는 운동도 많이 하고 비타민과 섬유질이 풍부한 다양한 식단을 즐겼다. 그러나 농부로서 우리는 매끼마다 단조로운 곡물 메뉴를 먹기 시작했다.
도한 우리는 더 좁은 구역에서 우리가 버린 쓰레기 근처에서 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와 염소 같은 동물들을 길들여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는 마을을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변이시키는 거대한 배양접시로 만들었다. 우리는 소를 통해 홍역에 걸리고, 독감은 인간과 돼지, 오리 사이의 미생물이 모두 한곳에 사는 삼자 동거에서 발생하며 지금도 새로운 변종이 출현 중이다. 성병도 마찬가지다. 유목시대에는 사실상 없던 질병이 목축을 하면서 만연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가축을 기르면서 수간도 이루어졌다.
모리스는 몇 주 동안 독일군 포로를 한 명씩 차례로 심문했다. 똑같은 답변이 반복되었다. 그들을 이끈 것은 나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들은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세뇌된 적도 없었다. 독일 군대가 신기에 가까운 전투를 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훨씬 더 단순했다. 바로 전우애였다.
수백 명의 제빵사, 정육점 주인, 교사, 재단사 그리고 연합군의 진격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한 모든 독일인들은 서로를 위해 무기를 들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동료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군도 마친가지였다. 1949년 사회학자팀들이 미국의 참전용사 약 5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방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이상주의나 이념은 참전용사들의 주된 동기가 아니었다. 이들이 싸운 것은 조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전우를 위해서였다.
우리는 텔레비전과 영화산업에 속아 넘어갔다. ‘왕좌의 게임’ 같은 시리즈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는 다른 사람을 꼬챙이로 찌르는 것이 식은 죽 먹기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몸을 찌르는 것은 심리적으로 매우어렵다. 그렇다면 지난 1만년 동안 전쟁에서 발생한 수억 명의 사상자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사망 원인을 예로 들어보겠다.
기타 1퍼센트, 화학 2퍼센트, 폭발/압착 2퍼센트, 지뢰/부비트랩 10퍼센트, 총알/대전차 지뢰 10퍼센트, 박격포/수류탄/공중포폭탄 75퍼센트.
이 희생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대부분이 원격으로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적이 너무 가까워지면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일 강제로 소를 도살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 즉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과 같다
어느 시대엥서나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멀리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쏘는 것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15,16세기에 아메리카를 정복한 방법이자 오늘날 미군이 무장 무인기 편대로 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군대는 장거리 무기 외에도 적과의 심리적 거리를 넓히는 수단을 추구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만일 독일 군대가 메스암페타민 알약(일명 크리스탈 메스, 극도의 공격성을 유발할 수 있는 마약) 3500만정을 먹이지 않았다면 1940년 파리가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대는 군인들을 조건화할 수 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신병들은 신병훈련소에서 전우애뿐만이 아니라 가장 잔인한 폭력성도 고취되어 병사들은 ‘죽여! 죽여! 죽여!’라고 목이 쉴 때까지 외쳐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대부분 죽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은 이런 종류의 훈련 이미지를 보여주자 충격을 받았다.
타고난 뿌리 깊은 감정인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현대 군대에서 전우애는 작아졌다. 그 대신 미국의 한 참전용사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만들어진 경멸’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기법으로 훈련을 받은 병사들과 구식 군대를 마주치게 하면 구식 군대는 매번 박살이 나고 만다.
미군은 ‘발사율’을 높이는 데 어렵사리 성공해 총을 쏘는 병사의 비율을 한국전쟁에서는 55퍼센트, 베트남전쟁에서는 95퍼센트까지 높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수백만 명의 젊은 병사들을 훈련 중 세뇌시킨다면 베트남 전쟁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이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다른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때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인가도 함께 죽었다.
적과의 거리를 쉽게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 있다. 바로 지도자들이다. 높은 곳에서 명령을 내리는 군대나 테러 조적의 지휘관은 적에 대한 공감의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테러전문가와 역사학자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권력을 가지 사람들의 심리학적 상태는 독특하다.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 같은 전쟁범죄자들은 권력에 굶주린 편집증적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 사례이다.
1513년 겨울 술집에서 또다시 긴 밤을 보낸 빈털터리의 시청 서기가 ‘군주론’이라고 일컬은 소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군주론’은 프랑스의 황제 샤를 5세, 루이 14세, 구소련의 서기장인 스탈린의 침대 옆 탁자에 놓였으며, 독일 수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처칠, 무솔리니,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 직후 나폴레옹의 마차에서도 발견되었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인간은 배은망덕하고 변덕스러우며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며 비겁하고 탐욕스럽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책은 종종 ‘현실적’이라고 불린다. ‘대부’, ‘하우스 오브 카드’, ‘왕좌의 게임’은 모두 기본적으로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저술한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각주이다.
대커 컬트너 교수는 응용 마키아밸리즘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다. 이 미국인 심리학자는 기숙사에서 여름 캠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지배권을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는 일련의 환경에 잠입했다. 그는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바로 이런 종류의 장소에서 시대를 초월한 마키아벨리의 지혜가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실망했다. ‘군주론’이 처방한 대로 행동한다면 캠프에서 바로 쫓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켈트너의 발견에 따르면 권좌에 오른 것은 가장 친절하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친근한 자의 생존이다.
켈트너는 이미 권력을 갖게 된 뒤에 받게 되는 영향도 연구했다. 세 명의 지원자로 이루어진 소규모 그룹의 한명은 그룹 리더로 무작위 배정되었고 그룹이 함께 나누어 먹을 쿠키 5개가 남긴 접시를 가지고 왔다. 모든 그룹은 접시에 하나의 쿠키를 남겼지만(예절의 황금률) 대부분의 경우 네 번째 쿠키는 리더가 급하게 먹어치웠다.
켈트너와 그의 팀은 값비싼 자동차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또 다른 연구를 수행했다. 이 실험에서 첫 번째 피험자들은 낡은 미쓰비시나 포드 핀토를 횡단보도 방향으로 운전해갔다. 모든 운전자가 자동차를 멈췄다. 연구의 2부에서는 피험자들이 멋진 메르세데스 벤츠를 운전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45퍼센트가 정지하지 않았다. 자동차가 비쌀수록 도로상의 매너는 더 거칠어진다.
운전자의 행동을 관찰한 켈트너는 그것이 무엇을 생각나게 했는지를 깨달았다. ‘후천적 소시오패스’라고 하는데, 19세기에 심리학자들이 처음으로 진단한 유전되지 않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이다. 머리에 타격을 받아 뇌의 주요 부위가 손상되면 발생하는데, 이를 통해 가장 좋은 사람을 최악의 마키아벨리안으로 만들 수 있다. 알고 보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경향을 나타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뇌손상을 입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보통사람보다 더욱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무모하고 오만하며 무례하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속이고 바람을 피울 가능성이 더 높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으며, 그들의 관점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들은 더 뻔뻔스럽고 종종 영장류 사이에서 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하나의 얼굴 현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4년 연구에서 세명의 미국 신경학자는 ‘경두개 자기자극 기계’를 사용해 권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인지 기능을 검사했다.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공감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정신적 과정인 미러링(mirroring)을 방해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항상 미러링을 한다. 누군가 웃으면 당신도 웃는다. 누군가 하품을 하면 당신도 하품을 한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매우 약하다. 이는 마치 플러그가 뽑힌 것처럼 자신들이 더 이상 동료 인간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권력의 영향 중 하나는 타인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으르고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들에게는 감독과 감시, 관리와 규제, 검열과 명령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한 권력은 당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당신이 이 모든 감시를 담당해야 한다고 믿게 될 것이다. 권력을 갖지 못하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힘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감도 훨씬 떨어진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를 주저하고 집단에서 스스로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며 자신의 지능을 과소평가한다.
권력자들에게 이러한 망설임은 편리하다. 자기 의심은 사람들이 반격할 가능성을 낮추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어리석은 것처럼 대하면 그들은 스스로 어리석다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는 통치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추론하게 만든다. ‘대중은 너무 멍청해서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비전과 통찰력을 가진 내가 책임을 맡아야 해’ 하지만 진상은 정확히 그 반대가 아닌가?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액턴경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대커 켈트너는 이를 ‘권력의 역설’이라고 일컫는다.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가장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을 선택해 우리를 이끌도록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상에 이르면 권력은 종종 그들의 가슴이 아닌 머리로 곧장 들어가버린다. 그후 그를 몰아내는 일에 행운이 따르기를.
호모 퍼피는 타고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약간의 불평등도 인정한다고 강조한다. 겉으로 공정해 보이는 한 그렇다. 대중에게 당신이 더 똑똑하거나 더 낫거나 더 신성하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책임자의 자리가 타당하며 반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착 생활이 시작되고 불평등이 심화됨에 따라 족장과 왕은 자신이 신민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이유를 정당화해야 했다. 유목민족의 족장들이 모두 겸손했던 것과 달리 이제 지도자들은 잘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왕은 자신이 신성한 권리에 의해 다스리고 있다거나 그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장점(merit)’ 논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가 큰 장점이 있는지 어떻게 결정할까? 은행가 아니면 청소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만들어낼수록 자신의 몫은 더 커진다. 사실 문명의 진화 전체를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이론을 지속적으로 고안해 낸 통치자들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일주일에 40시간 동안 금속이나 종이조각 혹은 은행 계좌에 숫자 몇 개를 추가하는 대가로 우리가 ‘사무실’이라고 부르는 우리에 숨죽이고 갇혀 있을까? 청구서를 무시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벌금이 나오거나 수감된다.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국은 당신을 뒤쫓을 것이다. 돈은 허구일 수 있지만 매우 실제적인 폭력의 위협이라는 강제력을 갖는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뻔뻔함은 매우 유리한 속성이다. 수치심에 개의치 않는 정치인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담한 행동은 대중매체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현대사회에서 보상으로 돌아온다. 뉴스는 비정상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을 집중 조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세상에서 정상에 오르는 것은 가장 친절하고 공감력이 큰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인 사람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가장 뻔뻔한 자가 살아 남는다.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은 당근과 채찍 두가지 뿐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당근(돈이라고 읽는다)에 의존한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채찍(처벌이라고 읽는다)에 의존했다.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한 가지 기본 전제는 사람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 최초의 비즈니스 컨설턴트 중 한 명인 프레더릭 테일러는 약 100년 전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높은 임금이다”라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공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가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성과를 최대한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개념을 전제로 한 과학적 경영기법의 창안자로 명성을 떨쳤다.
프레더릭 테일러 이후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서로의 내재적 동기를 대거 훼손하느라 바쁘다. 142개국에서 23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직장에서 업무에 ‘참여’한다고 느끼는 비율은 13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네덜란드 가정건강돌보미 조직 뤼트트조르흐 창립자 요스 드 블록)의 견해에 따르면 직원은 자신의 업무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내재적 동기를 가지고 있는 전문직이자 전문가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대체로 관리자들은 아이디어가 거의 없다. 그들은 지시를 잘 따르고 시스템에 스스로를 맞추기 때문에 일자리를 얻는다. 대단한 비전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높은 성과 리더십’과정을 수강한 뒤 갑자기 자신이 대단한 혁신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회사 인력은 100명에서 500명으로 늘어났고, 변속기 포크 시장의 5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핵심 부품의 평균 생산시간은 11일에서 단 1일로 단축되었다. 경쟁사들이 저임금 국가로 사업장을 이전할 때 파비(프랑스 자동차 부품 생산사) 공장은 유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동안 조브리스트(파비 CEO)의 철학은 아주 단순했다. 직원을 책임감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하면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것에 관한 책도 저술했는데, 책의 부제는 ‘사람들이 선량하다고 믿는 회사’이다.
10개국의 부모 1만2,000명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야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시간대학의 연구원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1981년에서 1997년까지 18퍼센트 증가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숙제를 하느라 보낸 시간은 145퍼센트 증가했다.
오늘날 네덜란드에서 육아에 투자하는 시간이 1980년대보다 15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일하는 엄마는 1970년대의 전업주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낸다. 교육정책 입안자들이 순위와 성장을 압박하기 시작하면서 학부모와 학교는 시험과 그 결과에 집중하게 되었다.
교실이나 수업이 없는 학교를 상상해보라. 숙제나 성적 평가도 없다. 교감과 팀 리더들이라는 계층 구조가 없으며, 자율적인 교사로 구성된 팀들만 존재한다. 사실 책임은 학생들의 몫이다. 이 학교에서 교장은 아이들에게 회의 공간을 내줘야 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사무실에서 쫓겨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모두 받아주는 이 학교의 이름은 아고라이다.
영국 서퍽에 있는 서머힐스쿨은 1921년부터 아이들에게 많은 자유를 믿고 맡길 수 있음을 입증해왔다. 매사추세츠의 서드베리밸리스쿨도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 이후 수천 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했다.
문제는 우리 아이들이 자유를 관리할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자유를 부여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의 여부이다.
오늘날에도 토레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민 참여 예산을 운영하고 있다. 약 1만5,000명의 시민이 의견을 제시하고, 매년 초 시 전역 560곳의 장소에서 위원회가 열린다. 누구에게나 제안서를 제출하고 대표를 선출할 기회가 주어진다. 시민들은 세수입 수백만 달러를 어느 곳에 배정할 것인가를 함께 결정한다.
이보다 더 큰 일화는 1989년 브라질의 대도시 포트투알레그리라는 도시에서 예산의 4분의 1을 대중에게 맡기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10년 뒤 브라질 전역 100여 곳 이상의 도시에서 따라했으며, 다시 세계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2016년까지 뉴욕시에서 세비야, 함부르크에서 멕시코시티에 이르는 1,500여곳의 도시가 참여 예산을 제정했다.
공산주의는 적어도 공식적인 정의에 따르면 수백년 동안 성공적인 체제였으며, 구소련과 유사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연습한다. 당신은 식탁에 앉아 있고 소금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다. “소금 좀 건네주세요”라고 말하면 누군가 무료로 소금을 건네준다.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일상적 공산주의라고 일컫는다. 인류는 공원과 광장, 음악과 이야기, 해변과 침대를 공유하면서 이런 종류의 공산주의에 열광한다. 아마도 이런 관대함의 가장 좋은 예는 가정일 것이다. 전 세계의 수십억 가정이 공산주의 원칙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부모는 자신의 소유물을 아이와 공유하고 능력껏 기여한다.
오늘날까지 알래스카 영구 기금 배당금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이다. 이는 특권이 아니라 권리이다. 그 덕분에 알래스카 모델을 구식 복지국가의 정반대가 된다. 일반적으로 당신은 먼저 자신이 아프거나 장애가 있거나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충분히 궁핍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증빙하는 수십 개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시스템은 사람들을 슬피고 무기력하며 타인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반면, 무조건적인 배당금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신뢰를 키워준다.
대부분의 알래스카 사람들은 배당금을 교육과 아이들에게 투자했다. 기금은 고용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빈곤을 크게 감소시켰다.
노르웨이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교도소 중 하나가 있다. 감방이나 철장을 볼 수 없으며, 권총이나 수갑으로 무장한 교도관도 볼 수 없다. 할렌 교도소의 수감자에게는 바닥 난방을 갖춘 개인 전용 방이 주어진다. 텔레비전과 욕실, 주방이 있다. 도서관, 암벽등반 연습용 벽, 음악 스튜디오까지 완비하고 있다. 바스퇴위 일부 수감자들은 직장으로 출퇴근하기도 한다. 할렌과 바스퇴위는 평온한 공동체이다. 바스퇴위의 소장인 톰 에버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을 쓰레기처럼 대하면 그들은 쓰레기가 될 것이다. 인간처럼 대하면 그들은 인간처럼 행동할 것이다”
노르웨이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재범률을 자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의 교도소는 가장 높은 재범률을 보이는 시스템 중 하나다. 미국에서는 수감자의 60퍼센트가 2년 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지만 노르웨이의 경우는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노르웨이 교도소의 수용비용은 유죄판결 건당 평균 6만151달러나 된다. 이는 미국의 약 2배에 이른다. 그러나 전과자들의 범죄 횟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노르웨이 법 집행기관은 1건당 7만1,226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더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구하므로 정부의 지원이 필요 없고, 이들이 납부한 세금으로 정부는 6만7,086달러를 추가를 절약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희생자 수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노르웨이 교도소 시스템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의 2배 이상을 절약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당신이 가끔 속임수에 넘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녀(마리아 코니코바)는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평생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사치에 지불하는 조그마한 대가이다.
우리가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음식이 없으면 굶어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돕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가 없으면 우리는 말라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일을 하면 기분이 좋은 것은 그것이 실제로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