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도 걷기에 매료된 기억이 있다. 물론, 저자처럼 어마어마한 여정은 아니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운동 부족으로 몸이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2002년, 둘째를 가지고서는 체중과 체력을 관리할 방법을 찾았고, 시간 - 돈 - 몸 상태를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 '걷기'였다.
코스는 편도 2~3km로 추정되는 출퇴근 길. 느릿한 내 걸음으로는 30~40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처음에는 참 지루하고 심심했다. CD나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으면 한 걸음 내딛고 한숨 한 번, 두 걸음 내딛고는 하품 한 번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 두 달이 흐르자....이상하게도 음악이 거추장스러워졌다. 몇 걸음 떼지 않아서 깊은 생각- 대개는 황당한 백일몽이다 -에 빠져들어, '어, 벌써 도착했네?' 하는 일이 많아졌다. 심할 때는 중간에 들르기로 마음 먹은 빵집을 무심히 지나치는 일도 있었다. 운동이라는 목적과는 별개로, 걷는 행위 자체에 포옥 빠져 버린 것이다.
편한 신발이 땅에 닿는 순간의 진동, 가볍게 스쳐가는 바람과 계절에 따라 바뀌는 공기의 냄새가 너무도 좋았다. 퇴근 길에 장 볼 일이라도 생기면 '집을 지나 마트까지, 마트를 휘돌고 다시 집까지...헤헤, 두 시간은 걸을 수 있겠다!'라며 흥분하곤 했다. 배가 봉긋하게 부른 임산부의 과도한 '걷기 욕심'을 주변에서는 어이없어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어쩐지 걷는 동안에는 뱃속의 아기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물론, 가끔 빠른 걸음으로 욕심을 내면 심통이 난 듯 땡땡 뭉치기도 했지만.^^


그 때의 흥분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아마 이 책을 다 읽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소설에는 쉽게 몰입하질 못한다. 게다가 여행이라면 귀성길 교통 체증을 겪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고개를 내두르는 게으름뱅이. 실크로드를 도보로 횡단해 보겠다는 이 퇴직 기자의 욕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이 먹었다는 것을 내세워 인생에 대해 이런 저런 잔소리나 해 대겠지....'
초장부터 빈정대고 있던 터였다. 그런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여행을 준비하고 출발하기까지의 대목은 지루하고 따분해서 넘기기가 힘들었다. 걷는 도중에 무슨 사건이 벌어질까? 도둑? 질병? 사고? 야비한 기대감을 억지로 끌어내며 두꺼운 책의 1/20은 읽었는지, 1/10은 넘어갔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런 확인은 대략 1/5 즈음에서 끝났다.  도둑을 만나지도, 병에 걸리거나 뜻 밖의 사고로 발이 묶이지도 않았는데 책 속에 푸욱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저자는 제목대로 걷는다. 그냥 국도를 따라 걸으면 터키라는 나라의 정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엉터리 지도에 의존하며 작은 마을들을 찾아 걷는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손님에 대한 접대를 중요시하는지라 가는 곳마다 소박하고 정겨운 (열광적인 호기심이 가미된) 환대를 받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머문 작은 마을들,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맛본 음식들이 차분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미안, 터키에 대해 별 사전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나에게는 그 모든 일들이 흐릿하게 뭉뚱그려질 뿐, 각각의 마을이나 사람들을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더 이상 지루해 하지 않고 빠져든 것일까?


이 책은, 이 책을 읽는 행위는 '독서'가 아니라, 마치 '걷기' 같았다.
내딛는 걸음을 헤아리면, 내가 직장까지 1/3을 왔는지 1/2을 왔는지 꼽아보면, 매일 지나는 길에서 뭔가 색다른 구석을 찾아내려 애쓰면 그 길을 즐길 수가 없다. 책도 그랬다. 똑같은 마을, 비슷한 사람들을 구별해내는 것을 포기하고 저자의 문장을 무심히 따라가다 보니, 놓치고 있던 재미를 찾은 것이다. 그가 차를 타지 않고 굳이 걷기로 결심했던 중요한 이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주는 재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빈약한 먹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솔제니친이 무슨 생각으로 망명길에 올랐는지 어느새 공감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옴진리교의 지하철 테러 사건 희생자들의 인터뷰를 모아 낸 <언더그라운드>를 읽을 때도 비슷했다. 자극적일 것도 없는 평범한 인터뷰들을 읽다보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가 얼마나 지독한 짓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일견 무덤덤한 아나톨리아의 길을 저자와 함께 걷다 보면, 그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상념에 젖어드는 것이다. 대낮, 거리를 걸으며 떠오르는 백일몽처럼.


가끔은 '우월한 서양인'의 관점에서 터키라는 나라를 폄하하는 듯한 어조가 거슬리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몸 안 좋은데 도둑으로 보이는 자에게 쫓기고, 바가지 요금을 받은 호텔 욕실에서는 물이 샌다면....저자 정도면 매우 관대한 편이지...싶기도 하다.
함께 책 한 권 분량을 걷다 보니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짱짱한 아저씨(할아버지라 하기엔 너무 팔팔하다.^^)에게 정이 담뿍 들었나보다. 그와 함께 2~3권, 이란과 중국의 길도 마저 걸어보고 싶어졌다.
걷기는 매우 지적인 일이며, 해탈에 이르는 멋진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으니, 괜찮은 동행이 되지 않을까?


사족 : 해탈의 방법이라고는 확언하지 못해도, 순산의 방법이라는 데는 목청 높여 동의할 수 있다. 진통 오기 직전까지 러닝 머신 위에서 뒤뚱뒤뚱 걸어다닌 덕인지, 둘째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씀풍!' 낳을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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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2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 비소설에 강하지 않다고 하면서 너무 잘 썼잖아요. 거 웬만하면 엄살좀 부리지 맙시다...전 진우맘님 리뷰나 실컷 구경하고 책은 훗날에...^^ 그래도 추천하고 간다구요. 인정할건 인정해야죠 뭐.^^

비로그인 2004-11-2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요오~ 드뎌 읽으셨군요. 오늘 지구본을 유심히 돌려봤어요. 삼순, 이란 이름이 배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이슬람 지역의 한 지명을 가리키더라구요. 저도 부지런히 터키땅을 밟아야겠습니다.

진/우맘 2004-11-2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칫, 여우님이야말로, 알라딘 3대 리뷰어로 공인받으신 이 마당에! 그 머시냐, 알라딘 뉴스레터를 보니까, 리뷰당 평균 추천이 다섯 손가락이 훨씬 넘는담시요!!!! ^^;;

진/우맘 2004-11-2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성님, 저는 다 읽고도 '아나톨리아'가 당최 콕 집어 뭘 말하는지 몰라서는...흑흑, 열심히 검색을 해 봤지 뭡니까.ㅡ.ㅡ;;; 터키땅덩어리 중 아시아 부분에 속하는 고원 이름이더군요. 지리 시간에 졸지 말걸......TT

미완성 2004-11-2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껜 충!성! 대신 씀!풍!이라 인사드리겠사와요 히히.

재밌는 리뷰네요. 왠지 책보다 재밌는 것같은 불길하고도 기분좋은 예감이..

추천입니다 당근!

2004-11-22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4-11-2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복돌성님> ㅋㅋ 걱정마세요, 조만간 그 이름 안 나올겁니다요.

사과님> 불길하고도 기분 좋은...으흐흐흐...^^;;

로드무비 2004-11-2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진우맘님이 이르케 리뷰를 잘 쓰시는지 미처 몰라봤어요.

죄송합니다.

명성과 인기가 달리 있었던 것이 아니로군요.

코를 빠트리고 읽고 갑니다.

(내일 주문한 책이 온다니 기대됩니다요^^)

아영엄마 2004-11-2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저는 이 책 안 읽고, 리뷰 안 쓸라요~. 진/우맘님 리뷰 보니 얼릉 손드는 것이 낫겄소..쩝~ 저도 추천하고 갈께요..

마태우스 2004-11-2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우리 한번 걸어보도록 해요. 추천이 무려 7이라 추천하려다 말려다 글이 너무 좋아서 추천해요. 건필하세요!

진/우맘 2004-11-2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그래도 멀었습니다. 알라딘 대표 리뷰어 best 50 쯤엔 낄 수 있으려나...TT

책엄마님> 반칙!!! 그런게 어디있어요!!!

로드무비님> 명성....과 인기.....쑥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참, 로드무비님, 저도 띄어쓰기 너무 못하거든요? 다 골라내다간 날이 새겠지만...다는 아니어도 눈에 확 띄는 대표 오류 한 두개씩 지적 좀 해주세요.^^

icaru 2004-11-2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으아...!! 벌써...읽으셨네요~

저도 얼른... 저도 지금 주문합니다~

리뷰는 못 쓰더라도 읽어나 보자하고!1

진/우맘 2004-11-2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안녕하세요!!!^^ 좋은 책 권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04-11-27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4-11-28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오마나....많구만요, 뭘! 게다가 띄어쓰기 말고도 틀린 단어가 있다니....부끄러워서 원.^^;;; 앞으로도 종종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