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현재 한국 공포소설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김종일 작가의 신작 장편이 나왔다. 아마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1, 2>에 수록된 '일방통행'과 '벽'을 읽어본 독자라면 김종일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과 공포라는 장르를 주무르는 솜씨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 밖에 인체의 여러 부분 즉 눈, 귀, 입 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집 <몸>도 출간되어 있는데 죄다 우수한 단편들임에도 불구하고 10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분명히 무리한 설정이 보여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었다. 하지만 <손톱>은 처음부터 온전한 장편을 구상하고 쓴 작품이라 이번에야말로 김종일 작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겠구나 모두들 기대가 컸을 것이다.

 

아이를 유괴 살해당하고 나서 남편과도 이혼한 채 하루하루 절망 속에서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는 듯한 홍지인이라는 여자가 있다.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애인 세준과 동거하면서 삶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 생기고, 또 호구지책으로 친구 민경과 동업한 네일아트 가게도 그런대로 잘 풀려 이제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구나 싶다. 하지만 홍지인이 낯선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소박한 평화는 깨진다. 꿈 속에서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저 재미로 죽이는 살인귀가 되어 있는데, 그런 그를 노리는 사신이라는 존재가 있다. 사신은 손톱만을 이용해 살인귀(홍지인과 동화된)의 눈을 뽑고 잔인하게 난자하는데 비록 꿈이라지만 고통이 생생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보니 손톱 하나가 빠져 있는데 빠진 손톱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

 

그날 이후 홍지인은 매일같이 꿈 속에서 고문기술자나 퍽치기범 등 죽어 마땅한 인간이 되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손톱으로 살해당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물론 꿈에서 깰 때마다 손톱 하나씩이 빠지고 사라지는 것도 변치 않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악인이 되어 살해당하는 꿈을 꾸는 걸까, 그리고 손톱은 왜 빠지고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홍지인은 꿈에서 얻은 단서를 토대로 나름의 조사를 벌이는데, 정말로 꿈 속에서 자신이 되어 있었던 고문기술자 등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꿈과 달리 고문기술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앞으로 고문기술자가 죽게 될 걸 암시하는 예지몽을 꾼 것일까? 의문은 정체불명의 노숙자가 홍지인 앞에 등장해 '라만고'라는 말을 전하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는데, 인도네시아 전설에 등장하는 라만고는 손톱을 먹는 자를 뜻한다.

 

손톱이 부러졌거나 아예 빠져본 사람이라면 그 머리끝까지 온통 곤두서는 듯한 통증을 기억할 수 있을 텐데, <손톱>은 말 그대로 신경 하나하나까지 날카롭게 찌르는 손톱이 빠질 때의 아픔과 불쾌감이 살아 있는 공포소설이다. 페이지마다 홍지인의 불안과 혼돈스런 심리가 생생해 독자 역시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녀가 공포를 느끼는 배경이 꿈 속이라는 것도 탁월한데, 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악몽과 손톱이 빠지는 이유를 홍지인과 그녀의 지인들이 밝혀나가는 미스터리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어 뒤가 궁금해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하이라이트는 홍지인의 유일한 버팀목들인 세준과 민경에게서 어두운 그늘을 발견하는 후반부.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혼란스런 처지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하지만 잠이 들 때마다 악몽을 꾸고 손톱이 빠져,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홍지인의 마지막 손톱이 빠지면서 모든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 결말 부분은 살짝 아쉽다.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손톱이 다 빠지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알게 될 거라는 정보를 주긴 했지만 홍지인이 정말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공들여 미스터리 플롯을 구축했건만 기다려보면 진상이 나온다는 결말일 줄이야. 그렇다면 홍지인이 애써 찾아다닐 필요없이 처음부터 그냥 손톱이 다 빠지기만 기다리면 됐던 것 아닌가. 공포소설이지만 미스터리 소설의 플롯을 깊이 차용한 작품답게 홍지인이 그녀와 관계된 비밀을 여러 가지 단서 속에서 추리를 통해 밝혀냈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 스즈키 고지의 걸작 중의 걸작 <링>처럼 말이다. 또한 라만고의 실체가 약간 복잡해 홍지인과 그녀의 꿈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에게 각각 달리 작용하는 구석도 있어 뒷맛이 아주 개운치는 않다. 영화로 만들어질 작품이라는데 라만고라는 복잡한 존재를 필연적으로 축약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야심을 다소 버리고 소박하게 각색하는 건 어떨지 싶다.

 

누가 쓴 소설이든 간에 완벽한 만족감을 주기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테고, <손톱> 역시 잘 쓴 부분과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이 공존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됐는데, 악인의 재생과 정화라는 테마에서 김종일 작가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매스컴을 매일매일 장식하는 살인, 강간, 유괴 등 악의 소용돌이를 보며 그저 한숨만 짓고 절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김종일 작가는 반성과 재생을 통해 세상이 새로 태어나길 바라는 희망을 진심으로 노래하고 있다. <손톱>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독자들이 잠시나마 생각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가장 큰 작가의 행복이 아닐런지. 예전에 여동생이랑 싸울 때 여동생이 손톱을 쓰면 엄마가 혼을 냈다. 손톱으로 할퀴면 흉이 평생 간다고. 김종일 작가의 <손톱>도 그렇게 오래오래 남을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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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2-2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죠..^^이 작가 앞으로도 기대하게 될것같아요!!

jedai2000 2008-02-24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한국 공포소설계에서는 확실한 보증수표인 것 같아요. 하이 퀄리티 보장!!!
 
가위남 ㅣ J 미스터리 클럽 2
슈노 마사유키 지음, 김수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도쿄를 벌벌 떨게 만드는 연쇄살인범 가위남을 둘러싼 이야기. 그는 끝을 날카롭게 간 가위를 들고 시내를 배회하다 노상방뇨를 하는 남자들을 싹둑,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가위남이 노리는 건 한창 때인 여고생들로 끈으로 목을 졸라 죽인 다음 가위를 목에 꽂아 넣는 의식을 펼치는데 이미 두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세번째 희생자를 물색 중이다. 가위남은 다음 희생자를 고르고 공을 들여 등하교길, 평소의 생활 등을 조사하는데, 보람찬 하루의 스토커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공원에서 자신이 점찍은 희생자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한다. 놀랍게도 끈으로 교살된 상태에, 목에는 가위가 꽂혀 있다. 이건 내 방식이잖아. 특허권을 주장할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오고 졸지에 살인마 가위남이 시체 발견자가 됐다. 가위남은 자신의 모방범에 흥미를 느끼고 독자적인 수사를 개시한다.

 

한편 세번째 희생자가 발생하고 뭇매를 맞던 경찰은 FBI에서 연수를 받은 범죄심리 분석관 호리노우치까지 파견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선다. 경시청 캐리어들이 벌떼같이 몰려들면서 원래 담당인 메구로서 형사들은 힘들고 소득 없는 탐문이나 다니면서 핵심 수사에는 소외되는데 뜻밖에도 호리노우치는 출세한 사람치고는 소탈한 사람이라 메구로서 형사들을 데리고 일종의 유격대를 조직한다. '메구로 스트리트 이레귤러즈'가 바로 그 이름인데(셜록 홈스가 지휘하는 소년 탐정단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즈에서 따왔다고), 그들은 기존 경찰과는 다른 선에서 가위남을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지만 아주 재미있고 무엇보다 트릭이 만족스럽다. 제13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이라는데, 국내에 소개된 이 상의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미스터리에 기반한 엔터테인먼트 작품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독창적인 면이 있는 작품들을 주로 뽑는 것 같더라. 개인적으로는 19회 수상작인 마이조 오타로의 <연기, 흙 혹은 먹이>를 가장 재미있게 봤는데 이번에 바뀌었다. <가위남>이야말로 내겐 베스트 메피스토상 수상작이다.

 

늘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삶에 애착이 없는 가위남은 일종의 해리성 인격장애를 겪고 있어 자신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박학다식하고 비아냥거리길 좋아하는 의사(아무래도 정신과 의사인 듯)와 혼자서 대화를 한다. <가위남>은 한 몸에 존재하는 기묘하고 이질적인 두 존재, 가위남과 의사가 서로 삐걱대면서도 2인3각의 수사를 펼치는 챕터와 메구로 스트리트 이레귤러즈 형사들의 챕터가 한 장씩 진행되다 나중에 하나로 만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위남도 독특하고 매력적이지만 형사들도 만만치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 형사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소설들도 보고 싶은데 짠돌이에 옛날 사람이지만 성실한 시모카와, 냉소적이고 머리 회전이 비상한 무라키, 줄담배의 민완 마쓰모토, 자기도 형사 하나 몫은 한다고 주장하지만 풋내기에 불과한 이소베와 막내 신도 더구나 냉철한 형사과장 우에이다까지 메구로 스트리트 이레귤러즈가 나오는 장면들은 한 편의 잘 쓴 경찰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가위남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가 가장 놀랍지만, 모방범 역시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책을 끝내자마자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씩 맞춰봐야 하는 그런 트릭을 사용하고 있는데 찬찬히 따져보니 작가가 정말 정교하게 트릭을 짰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재기를 발휘한 부분이 도처에 넘쳐나더라. 물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은 그냥 생략하고 넘어간 경우도 있어 약간의 결격 사유는 있지만. 가위남이 희생자를 물색하고 서서히 살인을 준비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줘 그런 쪽의 어두운 재미도 충분하고, 혼란과 망상에 빠진 가위남의 심리를 파고들어 <양들의 침묵> 같은 사이코 스릴러물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가장 생각나는 작품은 역시 <살육에 이르는 병>. 그래도 그 작품과는 다른 재미도 충분하니 꼭 읽어보시길. 번역자 분이 <가위남>과 독자의 맞선을 중매하는 중매쟁이가 된 기분이라고 후기에서 적었는데, 맞선남 입장에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런 미인(의 작품)이라면 몇 번이고 또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슈노 마사유키의 다른 작품들도 부디 검토해줬으면 좋겠다. 

 

 

p.s/ 가위남은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일본 출판사와 한국 출판사 풍경이 어찌나 비슷하던지. 어디나 책 만드는 곳은 비슷하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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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노 마사유키 다른 책들도 정말 읽고 싶어요...반전도 반전이지만 정말 재밌게 읽었어여~ 제다이님도 출간서적선정에 참여하시나여 부탁드릴게 많은데요^^
불야성은 찾을수가 없네요..인터넷헌책방 서핑중 재고있음으로 찾아냈는데 판매자에게 연락하니 없다는군요..헌책방은 업데이트가 너무 형편없어서ㅠㅠ
영화는 봤는데...경험상 무조건 영화화된 소설은 책부터 읽어야한다는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jedai2000 2008-05-2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노 마사유키는 다른 책들은 엔터테인먼트보다는 추리소설이라는 구조 자체를 파고드는 아카데믹한 느낌의 작품들이 많대요. 그래서 상업성이 별로 없다는군요. <불야성>은 저도 너무 좋아하는 책이고 기회가 된다면 꼭 제가 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도 윗분들 설득이 어렵네요. 이 책이 좀 너무 쎈 책이라서요 -_-;; 어디 용기 있는 출판사 없나요
 
위험한 계약 1 ㅣ 뫼비우스 서재
할런 코벤 지음, 김민혜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세계적인 인기 작가 할런 코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유괴, 살인 등의 범죄에 저도 모르게 말려들어 온갖 고생을 하다 겨우 일상으로 돌아오나 했더니 아찔한 반전 한 방으로 모든 게 뒤집어진다는 설정을 가진 일련의 완성도 높은 서스펜스 스릴러들로 정평이 나 있다. 국내에도 <영원히 사라지다> <밀약> <마지막 기회> <단 한 번의 시선> 같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반응이 괜찮았는데 이 작품들은 각각 다른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독립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서로 이어지는 바는 거의 없다(일부 작품들에서 등장인물을 한두 명 정도 공유하는 정도). 하지만 코벤의 진정한 출세작은 따로 있었으니 스포츠 에이전트인 마이런 볼리타가 매번 주인공으로 등장해 활약하는 8편의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은 독립적인 작품들(보통 스탠드 얼론이라 부른다)에만 몰두하고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는 잘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아무튼 1995년에 발표된 <위험한 계약>은 할런 코벤이 분신과도 같은 마이런 볼리타를 세상에 처음 선 보인 작품이라 제법 의의가 있다 하겠다.

 

작가가 아무리 같은 주인공으로 연속되는 시리즈를 쓰고 싶어도 독자들이 환영하지 않으면 제대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을 텐데, 이 작품을 읽어보니 마이런 볼리타는 너무도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라 무려 8편이나 되는 시리즈에서 활약하고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날리던 농구 실력을 가진 그는 백인은 점프를 잘 못한다는 속설과는 달리 점프도 높았고, 투견과도 같은 투지가 있어 발군의 득점력과 리바운드 능력을 자랑하는 포워드였다. NCAA(전미대학농구)에서 우승컵도 거머쥐고, NBA에서도 명문 보스턴 셀틱스에 8위로 지명되지만 시즌 초반에 다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첫 해에 은퇴하는 비운의 선수가 되었다. 올해야 보스턴 셀틱스가 잘나가지만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드래프트 2순위로 뽑은 선수가 약물로 사망하는 등 악재가 무척 많았는데, 만약 마이런 볼리타가 실제 인물이었다면 셀틱스의 저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계속 뛰었어도 크게 빛을 보긴 힘들었을 거라고 보는 게 고작 193센티미터의 백인 포워드가 NBA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NBA팬으로서 순간 흥분해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다. 

 

선수로서는 운이 좋지 못했지만, 다른 스포츠 에이전트와는 달리 직접 스포츠 세계의 한복판에서 뛰었던 경험을 살려 선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마이런 볼리타. 아직까지는 햇병아리 에이전트에 불과하지만 풋볼 계의 대학 최대어 크리스천을 손에 넣은 뒤로 모든 것이 달라질 태세다. 그런데 미남에 에이스 쿼터백에 성격도 좋은 크리스천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으니, 치어리더였던 애인 캐시가 대학 내에서 실종된 채 2년이 지나도록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캐시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 마음은 어디 그럴까. 재미있는 건 지금은 헤어졌지만 마이런과 전에 사귀던 애인이 캐시의 언니 제시카라는 것이다. 제시카가 크리스천에게 마이런을 에이전트로 소개시켜줘 지금의 관계가 맺어졌다고 보면 틀림없을 듯. 캐시는 비록 없지만 관계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 서서히 아픔도 잊혀져갈 무렵 모든 것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다. 죽었다고 생각한 캐시의 누드 사진이 실린 잡지가 크리스천에게 배달되어 오고, 캐시로 추정되는 목소리로부터 전화도 걸려온다. 게다가 캐시 실종 사건을 나름 혼자서 조사하던 제시카와 캐시 자매의 아버지도 거리에서 칼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혼란스러워져만 가는 상황 속에서 제시카는 사건의 재조사를 옛 애인 마이런에게 부탁하는데, 그는 제시카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그리고 고객인 크리스천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미국의 미스터리/스릴러에 등장하는 탐정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필립 말로나 루 아처같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얼싸안은 듯한 우울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탐정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사건의 핵심을 파고들 것인가 보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농담을 구사할 수 있을까만 연구하는 듯한 유쾌한 재치꾼 타입이 또 있는 것 같다. 재치꾼 타입 하면 고전에 해당할 렉스 스타우트의 아치 굿윈 탐정도 있고, 그레고리 맥도널드의 플레치나 로렌스 샌더스의 맥널리가 떠오를 법한데, 마이런 볼리타 역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끝내주는 농담 실력과 확실한 장난기를 보여주는 재간둥이다. 그에게는 캐시의 실종이라는 핵심 사건 말고도 그가 관리하는 선수가 갱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는다는지 하는 온갖 악조건이 넘쳐나는데, 어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농담을 그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시종일관 미소를 띄며 페이지를 넘겼다. 꼬이고 꼬인 난제들을 거침없이 풀어나가는 마이런과 그의 절친한 친구 윈의 활약은 그야말로 시원시원해 적수가 없을 지경. 참고로 윈은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정도로 비중이 큰데, 엄청나게 잘 생긴 얼굴에 적들은 다짜고짜 죽여버리는 냉혹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천을 모든 걸 가진 사나이라고 표현한다면 마이런 역시 마찬가지다. 래리 버드 같은 농구 솜씨에 제리 맥과이어 같은 인간미,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 같은 유머 감각과 터프함, 셜록 홈스 같은 추리력을 한몸에 겸비했으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닐런지. 마이런은 그간의 치밀한 조사를 통해 용의자를 몇 명으로 압축하고는 결말 즈음해서 용의자들에게 함정을 판다. 원래 미스터리/스릴러에서 논리와 추리로 범인을 압축하지 못하고, 함정 수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건 하수의 방법이다. 할런 코벤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낸단 말야, 하고 혀를 찼는데 기우였다. 범인의 정체를 마이런은 미리 알고 있었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도 결말에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추리로 밝혀낸다. 유머와 하드보일드적 세계관, 정통 미스터리가 공존하는 독특한 맛이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 수준이 대단히 높다. 무엇보다 마이런 볼리타는 한번 믿어봐도 괜찮은 놈이라는 걸 보증한다.

 

 

 

 

p.s/ TV쇼나 시트콤 등 대중문화에 기반한 농담이 엄청나게 많은데 일일이 역주를 단 번역자, 편집자의 노력 덕분에 한층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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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런 볼리타'가 전 너무 좋네요..페이드 어웨이도 출간되었으니 다음 시리즈도 꼭 나와주길 바래봅니다.

jedai2000 2008-05-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페이드 어웨이> 봐야 하는데 말이죠. 이런 시원한 스릴러 소설이라면 얼마든지 좋아요 ^^
 
가타부츠
사와무라 린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가타부츠'란 생소한 단어는 책의 설명을 따르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 혹은 착실하고 품행이 바른 사람을 뜻한다고 하네요. 비슷하지만 서로 같은 뜻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이 단편집은 무척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고초를 치루는 사람도 나오고, 성실하고 착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 약간의 일탈을 하거나 쉽게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를 만나는 등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흔하고 평범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사람은 특별하다는 말 그대로 적은 수를 차지할 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대범하지 못해 다른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여 잠도 오지 않고,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우리 소박한 사람들 모두에게 경의를 바친다는 마음으로 썼다는 [가타부츠]. 그러나 주인공들은 모두 갑남을녀에 불과해도 6편의 이야기마저 그저 평범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모두 나름의 독특한 맛이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맥이 꾼 꿈>은 불륜남녀가 나옵니다. 첫눈에 반해버린 남녀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둘다 워낙에 심성이 고운 사람들인지라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전전긍긍하죠. 내내 상대에게 끌리는 마음과 망설이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다 두 사람은 차라리 죽기로 결심합니다. 죽어야만 이 관계가 끝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둘의 불륜 관계는 한 사람만 사라져도 지속될 수 없죠. 때문에 서로 자기가 죽겠다고 다투는 모양이 재미있습니다. 결국 의견 통일이 되지 않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알리지 않은 채 각자 있는 곳에서 자살을 시도하는데, 뜻밖의 결말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산뜻한 마무리 느낌이 괜찮지만 너무 소품인지라 그저 가볍게 읽을 만한 작품입니다.

 

<주머니 속의 캥거루>는 철없는 여동생에게 시달리는 오빠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유독 남자 문제에 있어서만은 지나친 소유욕으로 인해 늘 버림받고 상처받고 망가지는 여동생과 그런 그녀를 보듬어주느라 정작 자기 실속은 못 챙기는 오빠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빠에게 이번에야말로 절대 놓치기 싫은 애인이 생기게 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여동생은 오빠에게도 강렬한 독점욕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오빠는 자기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여동생을 물리쳐야 그녀의 삶도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쪽으로 변할 거라 생각합니다만 절대로 끊어질 수 없는 끈적끈적한 끈이 남매 사이에는 있었죠. 보는 내내 오빠의 결단을 강력하게 응원했지만 운명에 휘둘리고 마는 어쩔 수 없는 마무리에 깊은 안타까움이 남았던 작품이예요.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웬만큼 쓰면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이상심리를 다룹니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은 묘한 취미가 있는데 그건 역에서 약속한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즐기는 것입니다. 초조하게 개찰구를 들여다보고, 역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면 기대와 절망이 뒤섞인 눈으로 약속한 사람을 애타게 찾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애잔하고 비탄에 찬 아름다움이 있어 주인공에게는 일종의 감동까지 주죠. 평소와 같이 역에서 취미 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눈을 사로잡는 여인이 있습니다. 몇 시간이고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을 보며 흡족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마침내 여인이 기다리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반갑게 다가가는 여인과 그녀와 전혀 모르는 사람인 듯 행동하는 남자, 기묘한 풍경이죠? 그날 주인공은 남자를 뒤따라가서 죽이고 맙니다. 그 이유가 밝혀지는 마지막 문장이 꽤 소름 끼치는 마무리를 만들어냅니다.

 

<유사시>는 남편, 아들과 함께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사는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부는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사고를 당할까봐 늘 걱정하며 꿈에서까지 압박을 받습니다. 처음 낳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는 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하겠지만, 주부의 고민은 조금 다릅니다. 아이에게 사고가 생길 때, 즉 유사시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주부니만큼 운동 신경도 없고, 남들보다 강한 모성을 가진 것도 아닌 것 같아 주부는 거의 강박증에까지 시달립니다. 아들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가 있어도 안절부절못하고, 아들이 혹시 베란다에 매달리게 될 때 즉시 달려가는 동선에 방해될까봐 베란다에 쌓인 물건들도 모두 치워뒀어요. 이렇게 거의 정신에 균형을 잃을 정도로 유사시 강박증에 매몰될 때쯤 진짜로 주부의 가족에게 사고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주부는 그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를 하는 모습을 보여, 마침내 자기를 침몰시키고 있었던 고민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며, 더구나 따스한 심성으로 가족을 배려하는 몇 뼘쯤 성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흐뭇하고 감동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뛰어난 단편입니다.

 

<매리지 블루, 마린 그레이>는 미스터리나 서스펜스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억상실을 소재로 썼습니다. 결혼을 앞둔 남자가 아내될 애인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갑니다. 바닷가 시골이라 여행하는 마음으로 차를 타고 가는데, 애인이 어느 해변에서 잠깐 쉬다 가잡니다. 내려보니 웬지 낯설지가 않네요. 분명히 처음 와보는 곳인데 말입니다. 사실 그 해변에서는 3년 전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정말 공교롭게도 남자는 딱 그 시점에 교통사고를 당해 3일 간의 기억이 없습니다. 혹시 내가 죽인 건 아닐까, 번민하는 남자. 그래서 처음 와보는 해변이 낯익은 건 아닐까? 혹은 결혼 전 우울증(매리지 블루)은 아닐까도 생각해보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자기가 범인인 것만 같습니다. 가장 미스터리 소설 분위기가 나는 작품이고 결말에 반전이 한번 더 있습니다만 작가의 과욕이 낳은 빗나간 반전이 아니었나 싶네요. 왜 남자가 그 해변에 익숙한지도 후반부에 깔끔하게 설명되며, 한결 같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남녀의 모습도 보기 좋은데 또 한번의 반전을 통해 찝찝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게 만듭니다. 한번 더 비틀면 그만큼 충격을 주는 효과는 있지만 그동안 공들여 쌓아온 이야기, 분위기와 맞는지를 작가는 잘 살펴야 했습니다.

 

<무언의 전화 저편>도 굉장히 뛰어나 일상계 미스터리의 수작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 된 친구. 이 친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할 말은 하는 올곧고 성실한 사람입니다만 의외로 주변의 인기는 없습니다. 왜 이 좋은 사람을 몰라줄까 생각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친구가 그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살인범에게 쫓기던 여자가 살려달라고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신고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로 옆집에 살던 친구도 경찰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죠. 다음 날 몰인정한 현대인이라는 비난 여론이 거세게 쏟아져서 친구도 인터뷰를 하지만 '떳떳하지 않은 짓은 하지 않았다'고만 밝힙니다. 그 태도에 친구는 사회 전체에 이지메를 받게 된 것이며, 애인과도 헤어져야 했고, 매주 토요일 새벽 3시 10분에 걸려오는 무언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친구를 비난하려 무언의 전화를 거는 것일까요, 아니면 저승에서 살해당한 여자가? 전화의 정체와 왜 항상 올곧았던 친구가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가 드러나는 결말이 기가 막힙니다. 무책임한 언론의 횡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예요.

 

이상 6편의 수록작을 살펴보았습니다. 뒤표지 문구에 "소박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위한 오마주, 다채로운 레파토리,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맛의 단편집"이라 되어 있는데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평범해 역시 평범한 제가 읽기에 한창 더 몰입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이야기들은 비슷한 내용이 하나도 없어 다양한 요리를 한 상 쫙 펼쳐두고 먹는 기분이었어요. 아주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절대로 심심하지 않은 이야기들. 사와무라 린이라는 작가와의 첫 대면은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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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8-01-2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jedai2000 2008-01-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만족스러웠어요 ^^

그린브라운 2008-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멋져보입니다 ^^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jedai2000 2008-01-22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저는 아주 좋게 읽었는데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네요 ^^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07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 이사카 고타로 

 





 

 

 

 

 

대학 신입생이 된 나는 난생 처음 자취를 시작한다. 이삿짐을 힘겹게 옮기고 자, 이제부터 옆방에 인사를 가자고 결심한 나는 옆방에서 잘 생긴 청년을 만난다. 어쩌다 보니 이 청년과 친해져서 서로 마실도 오가는 사이가 됐는데, 어느 날 청년이 기묘한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저 끝방에 사는 부탄 남자 도르지에게 사전을 선물하고 싶다며 서점을 털잔다. 사전이 얼마나 한다고 도둑질까지 해야 하지, 고민하다가도 어느새 청년의 박력에 말려들어 서점 뒷문을 모델 건을 들고 지키는 나. 이 작품에는 두 개의 시간 축이 있는데, 여기서부터가 현재의 이야기고 또 하나는 2년 전의 이야기다. 2년 전의 이야기는 애완동물을 취미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3인조 인간쓰레기와 엮이게 되는 몇 명의 청춘들이 주인공이다. 이 두 이야기는 한 챕터마다 번갈아가며 진행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하나로 만난다. 이런 구성의 대가였던 빌 벨린저의 수법을 고스란히 흉내 낸 이 작품의 결말에서야 우리는 왜 사전 하나 때문에 서점을 털어야 했는지, 뒷문은 왜 꼭 지켜야 하는지의 이유를 알게 된다. 늘 독특한 구조와 신선한 이야기, 청량한 뒷맛으로 이름 높은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으로 전작들의 장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전작들과 달리 우울하고 가슴 아린 마무리를 보여준다.

 

 

4위.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 와카타케 나나미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미스터리 요소를 뽑아내 흥미와 몰입감을 돋우는 '일상의 미스터리' 계열 작품. 건설회사의 사보 편집장이 된 와카타케 나나미(작가와 동명으로 설정했다)는 매월 한 편씩 들어갈 소설을 선배인 소설가에게 의뢰한다. 하지만 선배는 집필을 고사하고 익명 작가 한 명을 소개시켜주는데 다행히 익명 작가는 펑크도 없이 매달 소설 하나씩을 보내준다. 4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총 12편의 이야기는 2월에는 발렌타인 데이, 4월에는 벚꽃놀이 등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미스터리를 소재로 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흐뭇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모든 연재가 종료되고 익명 작가와 편집장 나나미가 조우하는 결말에서는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면 소소한 우리네 일상에도 보석 같은 미스터리가 얼마든지 숨어 있다는 걸 흥미롭게 보여주는 단편집으로 몇몇 단편은 한국인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짜내려가 인상적인 결말을 만들어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3위. ZOO - 오츠 이치 

 




열일곱 살에 데뷔한 천재 작가 오츠 이치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단편집. 총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호러, 유머 미스터리, SF, 일종의 잔혹 동화를 비롯해 수록작들 모두가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준다. 전편이 약간은 어두운 색깔로 채색된 듯한 느낌이라 다 읽고 나면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들을 거의 다 매끈하게 뽑아낸 오츠 이치의 재기와 역량만큼은 인정받아야 할 것 같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매가 영문도 모르고 철창으로 막힌 독방에 갇히면서 시작하는 'Seven Rooms'. 아직 어린 꼬마인 남동생은 몸이 작아 배수구를 통해 옆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역시나 일곱 개의 방에는 잡혀온 사람들이 하나씩 감금되어 있다. 매일 한 명씩 희생자들을 전기톱으로 해체하는 살인마의 손에서 남매의 운명은 어떻게 될런지 지켜보시라. 그밖에 부자 노인이 잠을 깨보니 칼을 맞아 피를 한바탕 흘리고 있었다는 '혈액을 찾아라'라는 작품은 읽는 내내 폭소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기지만 범인의 정체는 완벽한 본격 미스터리의 방법으로 드러난다. 수록작 모두 독특한 맛을 가진 재미를 보장한다. 

 

 

2위.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루 

 




<살육에 이르는 병>은 무언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한 남자가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곧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가 정신에 병이 든 이 남자가 살육에 이끌리게 되는 혼란스런 심리와 여성 희생자들을 천천히 물색해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며, 어딘지 수상한 행동을 일삼는 이 남자를 의심하는 그의 가족 중 한 명의 여성이 나름대로 조사를 벌이는 모습이 교차된다. 마지막으로 은퇴한 형사가 우연히 이 사건에 말려들어 범인을 추격한다. 이 세 명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뒤로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다 충격적인 결말로 매조지된다. 뛰어난 반전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의 가감없는 묘사로 화제를 끈 작품이지만 단순히 눈길을 끌기 위해 처절한 살육 장면을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그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상 이 작품은 현대 일본 사회와 가정이 한 사람의 정상적이고 온전한 성인 남성을 길러내기 힘든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주제의식을 그것과 호응하는 훌륭한 반전을 통해 공감가게 그려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미스터리 소설을 보았지만 주제를 이렇게 잘 살려주는 트릭, 트릭을 이렇게 훌륭하게 뒷받침해주는 주제를 가진 작품은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결코 딱딱한 작품은 아니며 반전의 '깜짝쇼'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만한 작품이다.

 

 

1위. 이름없는 독 - 미야베 미유키 

 




<누군가>에 이은 평범남 탐정 스기야마 사부로 시리즈 제2작. 원래는 도저히 추리소설에 쓸 수 없을 정도로 무난하고 사람 좋은 삼십대 남자에 불과하지만, 다행히(?) 재벌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어느 정도 특별한 설정을 부여받은 스기야마다. 그는 장인이 소유한 거대 그룹 이마다 콘체른의 사보 팀에 편집자로 근무하며 병약하지만 상냥한 아내, 토끼같이 사랑스런 딸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이 행복이 언젠가는 깨질지도 모른다는 고민에 자다가도 한번씩 식은땀을 흘리는 것뿐. 전작 <누군가>에서는 장인의 운전사가 자전거 뺑소니로 죽은 사건과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탐정 일을 하게 되지만 <이름없는 독>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무차별 독살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편의점 음료수병에 독약을 주입해 닥치는 대로 희생자를 늘려나가는 무서운 범죄다. 스기야마의 고생은 이것만이 아니다. 온갖 사악한 독으로 똘똘 뭉쳐 있는 듯한 겐다라는 임시직 여직원과 대결도 펼쳐야 한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미야베 미유키의 끝없는 저력이 또 한번 입증되었다. 현대 사회의 모든 부분을 병들게 만드는 인간이 내뿜는 독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걸작이다.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과 욕심이 독처럼 환경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오염시켜 가고 있는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힘이 있다. 그야말로 독 그 자체인 겐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성공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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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1-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두권밖에....................;;;;

보석 2008-01-2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었습니다!(어쩐지 뿌듯) 근데 페이퍼 제목은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나 '일본'으로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jedai2000 2008-01-2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 기회 되시면 다 읽어보셔요

보석님...-_-;; 그러네요. 얼른 수정했습니다. 바로 밑에 서양 편이 있죠. 근데 서양은 거의 미국이고, 동양은 다 일본이라 좀 그렇기도 하네요 ㅎㅎ

쥬베이 2008-01-2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위 빼놓고는 다 읽었어요^^
<이름없는 독>은 출간되자마자 샀는데, 아직 못 읽었답니다.
제다이님 추천이시니, 엄청 기대 되네요^^

jedai2000 2008-01-22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저도 무척 아꼈다 본 책인데 과연 실망을 시키지 않더군요. 아주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는데 쥬베이님께서도 만족하심 좋겠어요 ^^

bongbong 2008-05-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zoo의SEVEN ROOMS 굉장하지않나요^^

jedai2000 2008-05-2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븐 룸>이 젤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54세이신 저희 어머님도 재미있어 하셨다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