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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 ㅣ J 미스터리 클럽 2
슈노 마사유키 지음, 김수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도쿄를 벌벌 떨게 만드는 연쇄살인범 가위남을 둘러싼 이야기. 그는 끝을 날카롭게 간 가위를 들고 시내를 배회하다 노상방뇨를 하는 남자들을 싹둑,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가위남이 노리는 건 한창 때인 여고생들로 끈으로 목을 졸라 죽인 다음 가위를 목에 꽂아 넣는 의식을 펼치는데 이미 두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세번째 희생자를 물색 중이다. 가위남은 다음 희생자를 고르고 공을 들여 등하교길, 평소의 생활 등을 조사하는데, 보람찬 하루의 스토커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공원에서 자신이 점찍은 희생자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한다. 놀랍게도 끈으로 교살된 상태에, 목에는 가위가 꽂혀 있다. 이건 내 방식이잖아. 특허권을 주장할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오고 졸지에 살인마 가위남이 시체 발견자가 됐다. 가위남은 자신의 모방범에 흥미를 느끼고 독자적인 수사를 개시한다.
한편 세번째 희생자가 발생하고 뭇매를 맞던 경찰은 FBI에서 연수를 받은 범죄심리 분석관 호리노우치까지 파견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선다. 경시청 캐리어들이 벌떼같이 몰려들면서 원래 담당인 메구로서 형사들은 힘들고 소득 없는 탐문이나 다니면서 핵심 수사에는 소외되는데 뜻밖에도 호리노우치는 출세한 사람치고는 소탈한 사람이라 메구로서 형사들을 데리고 일종의 유격대를 조직한다. '메구로 스트리트 이레귤러즈'가 바로 그 이름인데(셜록 홈스가 지휘하는 소년 탐정단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즈에서 따왔다고), 그들은 기존 경찰과는 다른 선에서 가위남을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지만 아주 재미있고 무엇보다 트릭이 만족스럽다. 제13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이라는데, 국내에 소개된 이 상의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미스터리에 기반한 엔터테인먼트 작품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독창적인 면이 있는 작품들을 주로 뽑는 것 같더라. 개인적으로는 19회 수상작인 마이조 오타로의 <연기, 흙 혹은 먹이>를 가장 재미있게 봤는데 이번에 바뀌었다. <가위남>이야말로 내겐 베스트 메피스토상 수상작이다.
늘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삶에 애착이 없는 가위남은 일종의 해리성 인격장애를 겪고 있어 자신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박학다식하고 비아냥거리길 좋아하는 의사(아무래도 정신과 의사인 듯)와 혼자서 대화를 한다. <가위남>은 한 몸에 존재하는 기묘하고 이질적인 두 존재, 가위남과 의사가 서로 삐걱대면서도 2인3각의 수사를 펼치는 챕터와 메구로 스트리트 이레귤러즈 형사들의 챕터가 한 장씩 진행되다 나중에 하나로 만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위남도 독특하고 매력적이지만 형사들도 만만치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 형사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소설들도 보고 싶은데 짠돌이에 옛날 사람이지만 성실한 시모카와, 냉소적이고 머리 회전이 비상한 무라키, 줄담배의 민완 마쓰모토, 자기도 형사 하나 몫은 한다고 주장하지만 풋내기에 불과한 이소베와 막내 신도 더구나 냉철한 형사과장 우에이다까지 메구로 스트리트 이레귤러즈가 나오는 장면들은 한 편의 잘 쓴 경찰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가위남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가 가장 놀랍지만, 모방범 역시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책을 끝내자마자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씩 맞춰봐야 하는 그런 트릭을 사용하고 있는데 찬찬히 따져보니 작가가 정말 정교하게 트릭을 짰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재기를 발휘한 부분이 도처에 넘쳐나더라. 물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은 그냥 생략하고 넘어간 경우도 있어 약간의 결격 사유는 있지만. 가위남이 희생자를 물색하고 서서히 살인을 준비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줘 그런 쪽의 어두운 재미도 충분하고, 혼란과 망상에 빠진 가위남의 심리를 파고들어 <양들의 침묵> 같은 사이코 스릴러물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가장 생각나는 작품은 역시 <살육에 이르는 병>. 그래도 그 작품과는 다른 재미도 충분하니 꼭 읽어보시길. 번역자 분이 <가위남>과 독자의 맞선을 중매하는 중매쟁이가 된 기분이라고 후기에서 적었는데, 맞선남 입장에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런 미인(의 작품)이라면 몇 번이고 또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슈노 마사유키의 다른 작품들도 부디 검토해줬으면 좋겠다.
p.s/ 가위남은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일본 출판사와 한국 출판사 풍경이 어찌나 비슷하던지. 어디나 책 만드는 곳은 비슷하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