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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평점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덴마크 소설이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구 유럽은 분명 유럽이면서도 어쩐지 이질적인 느낌이 강하고, 또 괜시리 우울하고 어두운 느낌이 많이 든다. 전에 북구 유럽 신화를 다룬 책에서, 북유럽 신화의 결말은 모든 신들이 죽고,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암울한 내용이라는 걸 읽은 바 있다. 북구 특유의 추위와 쓸쓸함, 어두움이 신화에도 그런 어두운 색채를 가미시키게 한 요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덴마크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작품도 결말은 어두운 면이 강하게 보인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역시 절대로 가볍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읽는내내 끝없는 우울한 정조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읽느라 무척 힘들었던 작품이다. 거의 3주 가까이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작품이 형편없어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이 작품은 개인적인 취향이 크게 작용하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다만 추리소설로 분류되고 있지만 추리물의 요소로만 보자면 평균 정도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그린란드 원주민과 덴마크인의 혼혈인, 스밀라 야스페르센이라는 여성이 자신과 나이를 떠나 깊이 교감하던 이사야라는 소년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쳐낸다는 내용이다. 금방 실체를 드러날 것 같던 비밀은 덴마크의 도시와 북극해를 항해하는 배를 거쳐, 그린란드의 거대한 빙산에서야 마침내 밝혀진다.
은유적이고, 함축적인, 선명한 이미지로 가득찬 문장들이 작품 내내 계속된다. 종래의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순문학(애매한 용어이지만 그냥 사용합니다.)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문장에 익숙해지기 힘들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얼음은 아름다움 속에서 창조되었다. 10월의 어느 날에는 네 시간 만에 30도가 떨어지고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하다. 바다는 천지 창조의 경이를 반영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구름과 바다는 묵직한 잿빛 비단 커튼 속으로 함께 미끄러져 간다. 물은 끈적끈적해지고 야생 딸기로 만든 술처럼 분홍빛으로 물든다. 서리 연기로 된 푸른 안개는 수면 위에서 떨어져나와 거울을 가로질러 간다. 어두운 바다에서부터 나와 위로 올라오는 냉기는 이제 장미 정원, 소금과 언 물방울로 형성된 얼음꽃의 하얀 담요를 끌어낸다."
이 문장은 북극해가 얼어버리는 장관을 스밀라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마치 시같은 느낌을 주는 어휘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데, 이런 멋부린 문장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주 홀려버리실테고, 직접적이고 간결한 문장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읽어내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작품 내내 멋진 문장을 선보이다 보니 조금 물리기도 하고, 또 너무 과도하게 사용될 때가 많다. 또 한 번의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보면 추위 속에서 사람의 숨결-8도 미만의 공기 중에서 형성되는 차갑게 식어버린 물방울의 베일-은 단순히 입에서부터 5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따뜻한 피를 가진 생명체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전면적이고도 구조적인 변형이며, 최소한이지만 확정적인 온도의 이동이 이루어내는 아우라다."
이 문장은 원자로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의 입김에 대한 스밀라의 생각일 뿐이다. 뭐가 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매번 이런 식이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읽기 좀 부담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이 작품은 올 여름에 나온 추리소설 중에 비교적 성공한 작품으로 알고 있다. 몇 년 전에 한 번 출간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큰 사랑을 받는 원인은 무엇일까? 한 번 추측해 보았다.
첫 번째는 무엇보다 작품이 순문학(?)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들은 멋 들어진 문장을 빼고도, 이 작품은 덴마크의 비열한 거리와 원시적인 생명력을 간직한 그린란드의 빙산을 대비하며 현대 사회와 그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비판 등의 순문학적 요소가 추리소설 애호가를 넘어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호감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적은 추리소설 애호가만 가지고는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약간 가슴아픈 진실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두 번째는 스밀라라는 개성강한 여성이 여성 독자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책은 여성분들이 더 많이 사고 많이 보는 편이니까 여성분들이 좋아한다면 그만큼 더성공하기 쉬운 것 같다. 스밀라는 작은 키에 깡말랐지만 정말로 터프하다. 자신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는 남자들을 맞아, 온몸이 깨져가면서도 진실을 캐나가는 스밀라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준다.(정말 처절하게 망가지며 싸워나간다..)
물론 스밀라의 모습에 터프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에 대한 유사모정에 가까운 애정, 사건을 같이 수사하는 수리공 페터에게 느끼는 사랑 같은 감정들도 섬세하게 묘사되는 편이다. 그러나 나의 여성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스밀라라는 여성의 매력에 100%공감하지는 못하겠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나에게 있어 신경질적이고 이해 안 되는 여성의 전형일 뿐이었다.
작품은 총3장(도시-바다-얼음)으로 이뤄져 있는데,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3장 '얼음'편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간 고생스레 주워담았던 모든 단서들이 하나로 합쳐져 진실이 밝혀지는 데, 어느 정도는 고통스럽게 읽었던 1,2장의 고생을 한 번에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2장 '바다'가 특히 읽기 어려운 데, 거대한 배를 탄 스밀라가 배의 비밀을 조사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작가 특유의 집요하고 꼼꼼한 묘사 덕분인 지, 배의 세부 구조 설명이 너무 많다. 내가 무식해서겠지만 상갑판, 하갑판, 마스트, 이물, 고물, 승강대 등의 배 내부 구조물을 이리저리 오가며 활약을 벌이는 스밀라의 동선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배 내부 그림이라도 그려져 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 내용 상 동선이 정확이 그려졌으면 더 재미있을 부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번역을 맡으신 분과 담당 편집자가 얼마나 고생하셨을 줄은 대강 짐작이 간다. 그야말로 만만찮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멋진 표지와 고급스런 외양의 책 외양을 비롯하여 많은 부분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모쪼록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계기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좋은 작품들이 속속 발간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