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교고쿠 나츠히코. 원래 광고 회사에 다니다 틈틈이 집필한 원고를 손수 장정까지 해서 출판사로 들고간 책이 바로 그의 전설적인 데뷔작 <우부메의 여름>이었다. 국내에도 출간된 작품으로 '우부메'라는 일본 전통 요괴를 모티브로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남편과 그의 18개월째 임신 중인 아내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음양사 추젠지 아키히코와 그의 친구들을 그리고 있다.



<우부메의 여름>이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2년 후, <망량의 상자>가 발간되었다. 전작을 뛰어넘는 열광적인 독자들의 반응으로 인해 교고쿠 나츠히코는 일약 작품 두 편으로 일본의 국민 작가가 되었다.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미스터리로 볼 수 있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정통 미스터리라고 할 수는 없는 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주로 담는 작가이기에, 아야쓰지 유키토, 노리츠키 린타로 등의 대표적 미스터리 작가들이 교고쿠 나츠히코를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못을 박으며 그들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의 대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이 무엇이길래 일본에서 '교고쿠 현상'이라는 말까지 낳으며 사랑받았을까? 무엇보다 일본색이 강해서였을거다. 요괴에 관심이 많아, 계간 <요괴> 잡지까지 내고 있는 그답게 작품마다 일본의 요괴가 주요 모티브로 쓰인다. (실제로 요괴가 등장해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아직도 요괴가 생활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여전히 친근한 존재로 남아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거대 종교가 없는 일본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전통적인 요괴의 생명력이 그렇게 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그의 작품은 동,서양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그만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1000페이지를 예사로 뛰어넘는 엄청난 볼륨을 자랑하는 그의 작품들은 나름대로 최신 과학의 가설, 요괴와 민속학에 대한 작가의 지식 자랑, 단순한 궤변, 말도 안 되는 요설들까지 넘쳐나 현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주인공 추젠지의 엄청난 (사이비) 지식이 바탕이 된 강론은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100페이지 가까워 듣는 세키구치와 독자들의 눈과 귀를 엄청 피곤하게 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이런 장면들을 제하면 작품의 맛이 살지 않을 것이다. 여러 지식들이 섞이고 비벼지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재미를 낳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란한 지식의 향연도 볼 만하지만, 다른 추리소설들과는 달리 다루고 있는 사건들 또한 현실에서는 접하기 힘든 기이함이 있어 독자들을 홀리는 것이다.



이 작품 <망량의 상자>는 네 개의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가나코라는 소녀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열차사고를 당하며 작품은 출발한다. 가나코는 간신히 살아나지만 망가진 인형처럼 부서지고 만다. 그즈음 일어난 소녀들의 토막난 팔다리가 발견되는 사건이 두 번째다. 최고의 압권은 세 번째 사건이다. 첫 번째 사건에 등장한 열차사고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던 가나코가 여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 침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환상적인 사건을 해결할 사람은 일본에 단 한 명...



고서점을 운영하며 퇴마사도 겸하는 추젠지 아키히코, 그는 친구인 소설가 세키구치, 역시 친구인 다른 이의 기억이 보이는 '장미십자 탐정 사무소'의 에노키즈 등과 함께 <망량의 상자>에 얽힌 비밀을 풀어낸다.



사실 워낙 두껍고, '교고쿠 월드'에 슬슬 질려가던 참이라 읽기는 힘들었다. 나는 책은 많이 읽는 편이지만 집중력이 좀 부족한 편이라 한 호흡에 읽지 못하는 편인데 <우부메의 여름>은 거의 6시간 가까이 아무 것도 안 하고 한번에 읽어내려간 적이 있다.  하지만 <망량의 상자>는 거의 2주가 걸렸다. 분명히 재미를 느낌에도 불구하고 읽기 힘들었던 걸 보니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 세계에 조금 물린 모양이다. 사실 그의 작풍은 금새 싫증나기 쉬운 약점이 있다. 세 번째 작품인 <광골의 꿈>은 지금 나온다해도 별로 읽고 싶지 않을 듯 하다.



그만큼 고전하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모두 읽었는데 마지막 30페이지 정도를 남겨두고는 정말 구토가 몰려왔다. 지옥을 엿본듯한 느낌이다. 그 압도적인 그로테스크에 세키구치처럼 나도 질려 버리고 말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지하철 역에서 잠시 헛구역질을 했다...지옥을 엿본 자는 그 자신, 곧 악마가 된다고 했던가...<망량의 상자>를 엿본 자는 그 자신도, 귀신이 되어야 함을 감수할 자신감이 있는 자는 책을 들어도 좋다.



압도적인 작품이다. 분량도 압도적이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도 압도적이다.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가 교묘하게 짠 사건의 진상은 네 개의 사건이 하나로 모여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낸다. 솔직히 네 개의 사건 중 한 두개는 트릭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하지만, 네 개의 사건이 모두 모이는 결말에서의 느낌은 상상을 초월한다. 새로 읽으실 분의 재미를 위해 자세히 설명드리지 못하는 게 유감일 뿐이다. 추리소설로서의 논리적 정합성 면에서도 합격점을 줄 만하다.



의외로 일본 추리소설의 전통에 기대어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작품의 세계관은 묘하게 요코미조 세이시나 에도가와 람포를 생각나게 한다. 일본적인 그로테스크...무엇이라 설명은 못하겠지만 일본하면 떠오르는 잔인한 어떤 것...이 녹아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 내적으로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우부메의 여름>보다 조금 더 드러난 듯 해 만족스럽다. 분위기도 조금 밝아졌다. 유쾌한 장면도 많고...하지만 그만큼 전편의 비장미(?), 염세미(?) 는 조금 떨어진 듯 해 아쉽다. 이 작품은 마지막 100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전편만큼 우울하지는 않다.



작가의 문장력은 어떨 때는 좋은 것 같고, 어떤 문장은 유치한 면도 보여 필력을 가늠하기 힘들다. 교고쿠만의 특성이라고나 할까...독백 등을 탁탁 끊어 별행 처리하며 문장을 늘이는 데도 명수다. 여러모로 자신의 수입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다..^^;; (문장이 늘어나면 고료가 올라가니까...)



개인적으로 일본 추리소설사에 남을 만한 역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편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그로테스크한 사지 절단 등에 비위가 상할 독자도 많이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마지막 100페이지가 주는 그 압도적인 처절함(?)은 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분명 교고쿠 나츠히코가 현대 일본 추리소설의 한 정점에 올라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작이다.



지금도 나의 눈에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추젠지 아키히코가 인간과 귀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요괴 '망량'을 퇴치하기 위해 출진하는 장면이 보이는 듯 하다. 허름한 고서점 주인이자 매사 시무룩한 수다쟁이가 인간의 마음 속에 잠복해 있는 요괴를 퇴치하는,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음양사로 변신하는 장면은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마음에 강한 흥분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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