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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가 돌아왔다 1
방동규.조우석 지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평점 :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이렇다. 어느 때와 같이 근무 시간을 쪼개 하릴없이 직장 선배와 잡담을 하던 중 선배가 12년 만기 적금을 들었다는 말을 꺼냈다.
"이야, 선배. 12년 뒤에 애 대학 등록금 마련했네(참고로 내년에 결혼 예정. 잘 풀리면...정말 잘 풀리면)."
"아, 뭔 소리야. 내가 이제 서른 하나인데. 내년에 결혼해서 내후년에 애를 낳으면 서른 셋인데. 보통 스무살 때 대학을 가니까 쉰 넘어서네."
"중요한 건 일단 선배네 애가 대학을 갈 실력이 되느냐지."
"뭐야! 그건 그렇고 그러고 보면 인생 참 별 거 없어."
"왜요?"
"생각해봐. 애 대학 마칠 때까지만 돈을 벌어도 거짐 육십 다 되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느새 황혼이잖아."
"정말 인생 별 것 없네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늘 그냥 그런 하루들의 연속.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가정을 일궈 다음 세대를 지탱할 자녀를 낳고 기르며 소박하게 사는 것도 근사한 인생의 한 목적이리라. 그러나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을 터.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한 세상 호방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요즘 이런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배추가 돌아왔다>의 그 '배추' 방동규 선생의 인터뷰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한 세트를 구입했다.
책을 읽는 내내 깔깔거리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며,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단숨에 상하권을 덮고 말았다. 시대의 풍운아이자 천하의 걸물인 방배추 선생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배추냐고? 학교 다닐 때 옷차림새가 추례해 여학생들이 배추장수 같다고 놀렸는데, 네 자는 길다 해서 두 자 배추로 팍 줄였던 것이다. 개성 최고의 부호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왕처럼 자란 유년기를 거쳐, 6.25 전쟁통에 돼지고기 장사로 짭짤한 맛도 보고, 싸움과 말썽으로 고등학교를 5번 퇴학 당하지만 역도 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대를 다니다 당대의 학생 주먹으로 명성을 날린 것이 배추 인생의 서막이다(1950년대 당시에는 학생 주먹이 무척 많았다. 대학을 나와도 할 일이 없었을 정도로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한창 혈기방장할 때 할 일이 없으니 주먹밖에 더 쓰겠는가).
그러다 백기완 선생을 만나면서 치기에서 벗어나 사회와 국가, 민족을 보는 나름의 시각을 세우고, 파독 광부로 3년간 일하며 죽을 고비 넘기기를 수 차례, 독일에서 파리로 건너가 집시처럼 방랑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패션 양품점을 차려 직접 디자인한 옷으로 지금 앙드레 김 못지않은 명성을 날리기도 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공동생산, 공동분배 원칙의 '노느메기 농장'을 만들어 농사일로 땀을 흘리지만 이내 반공법 위반으로 형무소 생활을 하고...그 외에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 근무, 3000명 규모의 회사 CEO, 칠순이 넘은 최근엔 최근엔 경복궁 문화재 안내위원까지 쉴틈없이 멀리도 달려왔다. 하지만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엔 미스터코리아 우승을 목표로 운동 중이니까.
보는 내내 아, 이런 인생도 있구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칠 줄 모르는 배추 선생의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야말로 공동 저자인 조우석 씨 말처럼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추억의 이름이요, 젊은 세대에게는 무엇에든 부딪쳐본다는 도전 정신을 몸으로 직접 가르쳐주는 짱 멋진 할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배추 선생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배추 선생의 흥미진진한 인생 역정을 곁에서 슬쩍 들여다보기만 해도 흐뭇한 대리만족이 되며,어떤 시련에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는 당찬 마음가짐까지 덤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이다.
배추 선생의 눈물나는 군대 탈출기는 기가 막히게 우습고, 파독 광부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이 위로차 찾아와 수천 명의 파독 광부들이 이국땅에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운 풍경이나 배추 선생과 친분이 있는 정치인 이부영 씨 어머님의 누구나 못 살던 그 시절 안타까운 사연들에서는 결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웃다가 울다가 감탄했다가 기가 막혔다가 결국에는 배추 선생에게 '내가 졌습니다' 절할 수밖에 없게 되는 놀라운 책이다. 내 올해 소원은 배추 할아버지와 술 한 잔 나누는 것이다. 배추 선생의 놀라운 '구라'를 직접 듣는다면 3일 꼬박 마셔도 문제없다. 여기 인생이 심심하신 분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p.s/ 배추 선생은 백기완 씨의 부친인 당대의 풍류객 백홍열 선생과 나이를 떠난 지기였다. 이 백홍열 선생의 기가 막힌 멘트 하나. "돈과 권력과 여자는 먼저 빼앗는 놈이 임자. 그러나 세 가지 모두 동냥하거나 구걸해서 얻을 순 없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정말 맞는 말이다.
p.s의 p.s/ 오탈자가 많은 편이다. 무슨 책이나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지은이가 살아 계신데, 책 만드는 사람들이 누를 끼쳐서야 되겠는가.
<실제 배추 할아버지 사진. 저 근육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