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문라이트
이재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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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에 <미스터 문라이트>를 읽고 있는데, 어느새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창문을 두드립니다. 읽던 것을 잠시 멈추고 창가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니 묘한 생각이 듭니다. 비라는 것은 원래 땅 위에 흐르는 물이 증발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거쳐 비가 내리면 다시 땅을 적셔주고, 그 물이 또 하늘로 오르고...이렇게 비는 영원한 것,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에 사랑하는 연인의 몸과 마음을 적셔주던 그 빗물이 오늘날의 연인들에게 또 내리는 거고...

 

연애소설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평소에는 무심하던 것들에서 괜히 낭만적인 뭔가를 찾게 되네요. 매일매일 전투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전하는 연애소설의 한 페이지는 일종의 쉬어갈 수 있는 간이역 같은 기분으로 다가옵니다. <미스터 문라이트> 역시 마침표나 느낌표가 아닌 쉼표의 연애소설입니다. 누가 읽어도 편안함과 감동, 다소나마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지요. 

 

대학교 때 한 여자를 짝사랑해서 그녀를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해 결국 사랑을 얻어내지만, 여자의 죽음으로 안타까운 이별을 맞고...그렇습니다. 뻔하디 뻔한 설정의 모음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희생해 사랑하는 법을 알았던 연인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죽은 연인과 꼭 닮은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는 후반부를 보면서 아, 이거 정말 심하게 뻔하네 하고 실망하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아주 말랑한 소설은 아니고, 결말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 혹은 그럴 듯한 국면의 전환이 있어 힘을 받습니다. 아마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는 그런 결말이예요.

 

작가가 현직 음악방송 프로듀서답게 상황에 맞는 노래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건스 앤 로지스부터 엘튼 존, 김현식, 김광석까지 읽으면서 다 한 번씩 들어보고 싶더군요. 글솜씨도 무난하고, 아니 잘 쓰는 수준이구요. <잃어버린 너>부터 <혼자뜨는 달> 까지 국산 연애소설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옛날 생각도 좀 나더군요. 주인공들의 사랑이 맺어진 곳이 대학교라, 저의 예전 풋풋했던 대학생 시절 짝사랑의 기억도 많이 났습니다.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의 끝물에 대학을 다닌 터라 주인공들의 고풍스런 연애담이 아주 낯설게 다가오지 않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요즘 미스터리에만 너무 심취해 연애소설의 이런 재미들을 다 잊고 있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연애소설을 틈틈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스터 문라이트는>는 위에도 지적했듯이 클리쉐의 남발과 대책없는 순애 지상주의 등의 단점이 아쉽지만 더 멋진 다음 작품을 위한 일보 후퇴로 생각하렵니다. 건승하시길!

 

p.s/ 작가가 우연히 들은 실화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실제 있었던 일 같지는 않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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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1 밀리언셀러 클럽 51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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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난생 처음으로 휴대폰을 갖게 된 것은 1999년도였다. 그때쯤 휴대폰 값이 많이 내려(그전에는 대당 100만원도 넘었다) 전 국민의 휴대폰 소지화가 가속화되었고, 지금은 아시다시피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부터 가정주부, 팔순 노인까지 온 가족이 휴대폰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내가 뭐 그다지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살면서 휴대폰 만큼 빠르게 확산된 물건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휴대폰이 널리고 널렸으니 이것에 관계된 에피소드들도 몇 가지씩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공포스런 일이 하나 있었으니 누군가를 뒤에서 씹는 문자를 실수로 그 욕 먹는 당사자에게 보내 버린 적이 있다. 수습하느라 고생 좀 했다.
 
스티븐 킹의 <셀>은 본인의 휴대폰 공포담과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전율과 긴장감을 안겨주는 특급 공포소설이다. 아마도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은 휴대폰이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공중을 가득 메우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맹목적인 고리가 되고 있는 현실에 일말의 공포감을 느꼈던 것 같다. 등장한 지 몇 년 만에 세상을 온통 뒤덮는 데 성공한 이 휴대폰이라는 물건에 대한 생리적인 혐오감과 더불어 60년대 유행했던 <새벽의 저주> 같은 좀비 영화, <나는 전설이다> 같은 좀비 소설을 결합함으로써 스티븐 킹은 고전적인 좀비 호러와 휴대폰이라는 최신 트렌드를 하나로 엮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솜씨다.
 
메인 주(스티븐 킹의 소설은 거의 항상 메인 주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의 만화가 지망생 클레이는 몇 년의 고생 끝에 마침내 보스턴의 유명 출판사에 작품을 팔게 된다. 클레이는 아내와는 별거 중이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고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조니 보이는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눈 앞에 찾아온 성공에 기뻐하며 보스턴에서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오는 중인데, 갑자기 평화로운 공원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휴대폰 통화 중인 여자가 아이스크림 트럭 아저씨를 공격하며, 멀쩡한 신사가 개의 귀를 물어뜯는다. 자동차끼리 서로 부딪쳐 도로는 베이루트처럼 되어버렸으며, 창공을 날던 경비행기가 9.11 때처럼 빌딩으로 추락한다. 클레이는 식칼을 들고 날뛰는 사이코에게서 곁에 있던 톰이라는 남자를 구해주는데, 두 사람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를 추론하다, 사이코들이 모두 휴대폰으로 통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휴대폰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고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리는 전파가 퍼져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클레이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메인 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클레이의 곁에는 톰과 자기 손으로 미친 엄마를 때려 눕히고 탈출한 십대 소녀 엘리스가 있다. 폰 사이코들이 활동하는 낮에는 빈 집에 숨어서 자고, 밤에는 수십 킬로미터를 행군하는 강행군을 펼치는 세 사람. 그러나 폰 사이코들은 맹수 같은 폭력성만을 보였던 초기 몇 일과는 달리 점점 집단 행동을 하고, 텔레파시 같은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하는데...클레이는 진화하는 폰 사이코에게서 살아남아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아들을 만난다 해도 아들 역시 폰 사이코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클레이가 아들에게로 가까워질수록 독자의 심장 역시 거칠게 고동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류를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도구가 휴대폰이라는 것은 부두교 주술이나 죽은 사람들이 공동묘지에서 단체로 깨어나는 옛날 좀비 책들보다는 훨씬 효과적인 설정이다. 전술했다시피 대부분 가지고 있기에 확산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고, 책에도 나오지만 마침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전부 미쳐 날뛰면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 빌어먹을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하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멀쩡하던 사람도 2차로 폰 사이코로 변해버리는 거고. 작디 작은 휴대폰 하나가 온전히 좀비를 양산하는 공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셀>에서는 이 전파를 누가 쏘았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뿐 시원스레 전모를 밝히지 않아 한층 더 궁금하게 만든다.
 
예전에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 <애완동물 공동묘지>와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 중 '안개'라는 작품과도 느낌이 비슷한데, 세 작품이 모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부정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유독 부자관계에 천착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셀>을 잡으면서 뭐야, 또 아버지와 아들이야, 하며 약간 실망하긴 했다. 그러나 그 뻔한 부자간의 사랑 이야기에 이렇게 또 가슴 저린 감동을 담아내는 능력을 보고 다시 한 번 작가에게 케이오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마치 두 번 연속 직구에 당하고, 세번째도 직구라는 걸 알면서도 완벽하게 제압당하는 미련한 타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주말 내내 <셀>을 읽으며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와 감동, 문학성과 오락성의 조화에서 완벽했던 다른 몇몇 걸작들에 비교하면 약간 떨어지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속도감 있는 진행과 아슬아슬한 탈출을 비롯해 재미만은 최고 수준이다. 현재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다른 스티븐 킹의 작품과는 달리 스펙터클한 장면들(대화재, 대폭발 등)이 많아 영화로도 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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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가 돌아왔다 1
방동규.조우석 지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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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이렇다. 어느 때와 같이 근무 시간을 쪼개 하릴없이 직장 선배와 잡담을 하던 중 선배가 12년 만기 적금을 들었다는 말을 꺼냈다.
 
"이야, 선배. 12년 뒤에 애 대학 등록금 마련했네(참고로 내년에 결혼 예정. 잘 풀리면...정말 잘 풀리면)."

"아, 뭔 소리야. 내가 이제 서른 하나인데. 내년에 결혼해서 내후년에 애를 낳으면 서른 셋인데. 보통 스무살 때 대학을 가니까 쉰 넘어서네."

"중요한 건 일단 선배네 애가 대학을 갈 실력이 되느냐지."

"뭐야! 그건 그렇고 그러고 보면 인생 참 별 거 없어."

"왜요?"

"생각해봐. 애 대학 마칠 때까지만 돈을 벌어도 거짐 육십 다 되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느새 황혼이잖아."

"정말 인생 별 것 없네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늘 그냥 그런 하루들의 연속.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가정을 일궈 다음 세대를 지탱할 자녀를 낳고 기르며 소박하게 사는 것도 근사한 인생의 한 목적이리라. 그러나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을 터.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한 세상 호방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요즘 이런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배추가 돌아왔다>의 그 '배추' 방동규 선생의 인터뷰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한 세트를 구입했다.

 

책을 읽는 내내 깔깔거리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며,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단숨에 상하권을 덮고 말았다. 시대의 풍운아이자 천하의 걸물인 방배추 선생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배추냐고? 학교 다닐 때 옷차림새가 추례해 여학생들이 배추장수 같다고 놀렸는데, 네 자는 길다 해서 두 자 배추로 팍 줄였던 것이다. 개성 최고의 부호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왕처럼 자란 유년기를 거쳐, 6.25 전쟁통에 돼지고기 장사로 짭짤한 맛도 보고, 싸움과 말썽으로 고등학교를 5번 퇴학 당하지만 역도 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대를 다니다 당대의 학생 주먹으로 명성을 날린 것이 배추 인생의 서막이다(1950년대 당시에는 학생 주먹이 무척 많았다. 대학을 나와도 할 일이 없었을 정도로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한창 혈기방장할 때 할 일이 없으니 주먹밖에 더 쓰겠는가).

 

그러다 백기완 선생을 만나면서 치기에서 벗어나 사회와 국가, 민족을 보는 나름의 시각을 세우고, 파독 광부로 3년간 일하며 죽을 고비 넘기기를 수 차례, 독일에서 파리로 건너가 집시처럼 방랑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패션 양품점을 차려 직접 디자인한 옷으로 지금 앙드레 김 못지않은 명성을 날리기도 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공동생산, 공동분배 원칙의 '노느메기 농장'을 만들어 농사일로 땀을 흘리지만 이내 반공법 위반으로 형무소 생활을 하고...그 외에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 근무, 3000명 규모의 회사 CEO, 칠순이 넘은 최근엔 최근엔 경복궁 문화재 안내위원까지 쉴틈없이 멀리도 달려왔다. 하지만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엔 미스터코리아 우승을 목표로 운동 중이니까.

 

보는 내내 아, 이런 인생도 있구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칠 줄 모르는 배추 선생의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야말로 공동 저자인 조우석 씨 말처럼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추억의 이름이요, 젊은 세대에게는 무엇에든 부딪쳐본다는 도전 정신을 몸으로 직접 가르쳐주는 짱 멋진 할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배추 선생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배추 선생의 흥미진진한 인생 역정을 곁에서 슬쩍 들여다보기만 해도 흐뭇한 대리만족이 되며,어떤 시련에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는 당찬 마음가짐까지 덤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이다.

 

배추 선생의 눈물나는 군대 탈출기는 기가 막히게 우습고, 파독 광부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이 위로차 찾아와 수천 명의 파독 광부들이 이국땅에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운 풍경이나 배추 선생과 친분이 있는 정치인 이부영 씨 어머님의 누구나 못 살던 그 시절 안타까운 사연들에서는 결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웃다가 울다가 감탄했다가 기가 막혔다가 결국에는 배추 선생에게 '내가 졌습니다' 절할 수밖에 없게 되는 놀라운 책이다. 내 올해 소원은 배추 할아버지와 술 한 잔 나누는 것이다. 배추 선생의 놀라운 '구라'를 직접 듣는다면 3일 꼬박 마셔도 문제없다. 여기 인생이 심심하신 분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p.s/ 배추 선생은 백기완 씨의 부친인 당대의 풍류객 백홍열 선생과 나이를 떠난 지기였다. 이 백홍열 선생의 기가 막힌 멘트 하나. "돈과 권력과 여자는 먼저 빼앗는 놈이 임자. 그러나 세 가지 모두 동냥하거나 구걸해서 얻을 순 없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정말 맞는 말이다.

 

p.s의 p.s/ 오탈자가 많은 편이다. 무슨 책이나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지은이가 살아 계신데, 책 만드는 사람들이 누를 끼쳐서야 되겠는가.     

 

 

  



 

                                                         <실제 배추 할아버지 사진. 저 근육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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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1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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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의 수도라고 할 만큼 유서깊은 보스턴 시를 차갑게 얼릴 만한 강력 사건이 발발한다. 미모의 독신녀들이 연이어 피살당하는 것인데, 이 정도라면 그다지 사람들을 떨게 만들지 못 하겠지. 그러나 피해자들의 배가 날카로운 메스로 잘리고, 자궁이 도려내져 밖으로 끄집어져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엽기의 끝을 달리는, 피가 얼어붙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그런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을 맡은 것은 강력반의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 형사다. 토마스 무어는 '성 토마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형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사내고, 제인 리졸리는 테스토스테론으로 얼룩진 경찰계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쌈닭 같은 존재다. 두 사람은 비슷한 사건이 다른 주에서 발생했던 것을 발견하고는 당시 사건을 조사해 나간다. 3년 전, 앤드루 캐프라라는 외과 인턴이 4명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하고 자궁을 꺼내 자신만의 변태적인 성욕을 만족시켰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앤드루 캐프라의 비밀스런 범죄 행각은 마지막 희생양이 될 뻔한 외과의 캐서린 코델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간신히 탈출해 그를 쏘아 죽임으로써 종결되고 만다. 앤드루 카프라는 이미 죽었는데 거의 비슷한 방식의 범죄라니 모방범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유령? 두 형사는 캐서린 코델이 보스턴으로 이주한 시점에서 사건이 재개된 걸 깨닫고, 사건의 핵심에는 캐서린 코델이 있다고 생각한다. 메스에 능숙하고, 무리없이 자궁을 꺼내는 등 의학 지식을 갖춘 얼굴 없는 범인을 두고 언론에서는 '외과의사'란 별명을 붙이는데, 외과의사의 범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대담해진다. 연쇄살인이 진행될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캐서린 코델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외과의사의 정체는 과연 누구일까?

 

중국계 미국인 작가로 알려진 테스 게리첸의 스릴러 '제인 리졸리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이 시리즈는 현재 총 6권이 나와 있다). 내용 설명을 봐서 알겠지만 사건의 배경은 주로 병원이고, 등장인물도 대부분 의사다. 이는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은데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의사로 일했던 적이 있단다. 그래서 책에 등장하는 병원 풍경과 수술 묘사는 굉장히 정교하고 이보다 더 사실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의사로 잘나가던 테스 게리첸은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출산휴가를 이용해 어린 시절의 꿈에 도전한 그녀는 로맨스 소설로 등단에 성공하지만 작풍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릴러로 바꾼 후에는 글만 써도 먹고 살 만큼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현재는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책을 가장 잘 파악하려면 역시 작가이력을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이해할 수 있는 대부분의 열쇠가 거기 숨어 있다. 당연하겠지만 소설은 작가가 쓰는 거니까 소설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잘 살펴보면 소설가의 작품도 보이게 마련이다. 왜 검도한 사람은 싸울 때 몽둥이부터 찾고, 태권도 한 사람은 다리부터 뻗는 것처럼 본인이 의사였으니 가장 잘 아는 세계인 병원을 소재로 메디컬 스릴러를 쓰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그렇지만 의학 쪽으로 깊이 들어가 원인 불명의 병원체의 공포를 그린다거나 하는 하드하고 본격적인 메디컬 스릴러는 아니다. 그녀에게 병원과 의사는 흥미로운 스릴러의 소품과 배경일 뿐이다).

 

한때 로맨스 소설로 이름을 날렸던 작가답게 <외과의사>는 로맨스의 맛도 충분히 살아 있다. 아내를 잃고 절망한 토마스 무어 형사와 과거의 악몽에서 간신히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유령과 맞닥뜨린 캐서린 코델은 강렬하게 이끌리며, 이 둘을 여성적인 매력이 없는 제인 리졸리가 질투하면서 작품이 거의 삼각관계 드라마처럼 나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스릴러의 팍팍함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위한 양념이다. 하지만 본말전도라고 이 로맨스 때문에도 그녀의 책을 잡는 여성 독자가 꽤 있을 듯하다.  

 

토머스 해리스의 등장 이후 미국의 스릴러는 대부분 사이코 범죄자가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며 경찰과 대결하는 구도가 많으며, 퍼트리샤 콘웰이 히트를 치고 난 후에는 법의학이나 의학에 관련된 전문 지식으로 독자들을 홀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말의 반전 한두 차례는 필수 요소가 되었고.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이지만 읽는 동안은 그렇게 정신없이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미국의 현대 스릴러라는 장르는 이미 독자의 입맛에 딱 맞도록 고도로 특화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스릴러 장르의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여러모로 완성도가 뛰어나다. 범인의 정체를 범인의 독백을 통해 독자에게 뜬금없이 그냥 밝혀버리는 것은 아쉽지만, 독자들만큼 결정적인 단서를 받지 못한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가 어떻게 범인의 흔적을 뒤쫓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가는지를 시종일관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마지막으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형사 제인 리졸리가 겪는 고통이나 무수한 성폭행 피해여성들의 아픔을 공감가게 그리는 것도 <외과의사>만의 장점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사후 피검사를 받으러 다시 왔어요. 정확한 AIDS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노출된 지 6주 후에 검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거야말로 정말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죠. 성폭행을 당한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가해자가 치명적인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았는지 확인까지 해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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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3-1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목중입니다^^

jedai2000 2007-03-16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얼른 <견습의사>도 읽어야겠어요 ^^

2007-03-21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03-2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오, 너무 헐리우드 영화 같은 맛 때문에 보는 책인데요 ^^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 인간실격.제로자키 히토시키, Faust Novel 헛소리꾼 시리즈 2
니시오 이신 지음, 현정수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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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는 미스터리 요소를 가미한 라이트노벨 '헛소리 시리즈'로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니시오 이신의 소설로 헛소리 시리즈 제1작 <잘린머리 사이클>에 이은 두번째 작품이다. 헛소리 시리즈가 뭔가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주인공 이짱(헛소리꾼)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떠올리는 온갖 현학(적으로 보이려 애쓰는)과 철학, 상념, 망상, 요설 등 한 마디로 헛소리를 1인칭으로 담아내고 있기에 헛소리 시리즈다.

 

이 작품은 전작 <잘린머리 사이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전작에서 '젖은 까마귀 섬'에 초청된 이짱과 친구이자 세계 최고의 해커인 쿠나기사 토모가 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해결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앞으로의 시리즈에서도 매번 한 달 간격으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주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수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간다니 김전일도 울고 가겠다).  알고 보니 이짱은 로쿠메이칸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이란다. 대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헛소리만 하다니 혼 좀 나야할 듯.

 

아무튼 평소 쿠나기사 말고는 변변한 친구도 없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이짱에게 귀여운 동기 여대생 아오이이 미코코가 찾아온다. 자신의 친구인 에모토 토모에의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자고. 미코코는 웬지 이짱을 좋아하는 눈치인데, 그래 뵈도 거절은 잘 못하는 이짱은 못 이기는 척 생일 파티에 따라간다. 두 사람 말고도 몇 명의 친구가 더 와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짱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토모에의 전화를 받는다. 토모에와 이짱은 묘한 정신세계가 은근히 통했던 것이다. 그러곤 한 잠 푹 자고 깨보니 토모에가 그녀 집에서 목이 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자신(이짱)을 포함해 그날 같이 있었던 친구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있는 상황에 현장에는 기묘한 다잉메시지가. 과연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요즘이야 세일즈 시대라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뭐든지 팔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하필 책 콘셉트를 다소 부정적인 느낌도 주는 헛소리 시리즈로 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일 간단하고 절박한 이유는 말꼬리 잡고 끝없이 반복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다 보면 어느새 책 분량이 늘어나 원고료 상승이라는 흐뭇한 결과가 도출되기 때문이리라. 그 다음은 위에 언급한 대로 그럴싸한 현학(으로 보이려 애쓰는)의 느낌을 주는 헛소리들을 보고 주독자층인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니시오 이신 오빠, 형아는 정말 아는 것도 많구나'하며 감탄할 수 있기 때문이니 작가의 허영심마저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니시오 이신 특유의 헛소리가 작품의 트릭을 완성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인류 최강의 청부업자'니 '살인귀 제로자키'니 하는 만화 같은 인물들이 연이어 튀어 나오고, 헛소리가 쉬지 않고 반복되기에 나중에는 어느 정도 몽환적인 느낌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니시오 이신 미스터리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특징과 심리, 헛소리는 비현실적이라도 사용된 트릭은 비교적 현실적이라는데 있다. 주지한 대로 작품이 주는 몽환적인 느낌 때문에 논리적인 해결을 포기하고 읽게 되는데, 사실은 단서도 공정하게 주어지는 편이며, 이번 작품에서는 트릭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면서 기발해 결말을 보고 나면 제대로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 든다(개인적으로는 <잘린머리 사이클>에 사용된 트릭보다 한층 간단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이번 작품의 트릭이 훨씬 좋았다). 게다가 중요한 단서가 제시되는 순간도 헛소리로 눙치고 넘어갈 수 있으니 '헛소리'는 니시오 이신의 비장의 무기인 셈이다.

 

세상 천지의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 고독하기만 한 이짱의 심리와 헛소리는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사는 십대에겐 공감가는 부분이 많을 거다. 그러나 이미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난 본인 같은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나는 철저하게 미스터리의 관점에서만 이 작품을 보았고, 사용된 트릭에 충분히 만족했다. 사실은 만화 같은 인물들이나 헛소리를 아예 빼고, 250페이지 내외의 콤팩트한 추리소설로 만들어졌으면 더욱 열광하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즐길 만은 하다.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정도의 트릭과 해답이라면 앞으로도 나는 언제든 니시오 이신의 '헛소리 시리즈'를 잡을 것이다.

 

p.s/ 이 작품에서 사용된 알리바이 제조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아주 신선하고 기발했지만, 다잉메시지는 완전히 독자 우롱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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