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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1 ㅣ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미국 역사의 수도라고 할 만큼 유서깊은 보스턴 시를 차갑게 얼릴 만한 강력 사건이 발발한다. 미모의 독신녀들이 연이어 피살당하는 것인데, 이 정도라면 그다지 사람들을 떨게 만들지 못 하겠지. 그러나 피해자들의 배가 날카로운 메스로 잘리고, 자궁이 도려내져 밖으로 끄집어져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엽기의 끝을 달리는, 피가 얼어붙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그런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을 맡은 것은 강력반의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 형사다. 토마스 무어는 '성 토마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형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사내고, 제인 리졸리는 테스토스테론으로 얼룩진 경찰계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쌈닭 같은 존재다. 두 사람은 비슷한 사건이 다른 주에서 발생했던 것을 발견하고는 당시 사건을 조사해 나간다. 3년 전, 앤드루 캐프라라는 외과 인턴이 4명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하고 자궁을 꺼내 자신만의 변태적인 성욕을 만족시켰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앤드루 캐프라의 비밀스런 범죄 행각은 마지막 희생양이 될 뻔한 외과의 캐서린 코델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간신히 탈출해 그를 쏘아 죽임으로써 종결되고 만다. 앤드루 카프라는 이미 죽었는데 거의 비슷한 방식의 범죄라니 모방범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유령? 두 형사는 캐서린 코델이 보스턴으로 이주한 시점에서 사건이 재개된 걸 깨닫고, 사건의 핵심에는 캐서린 코델이 있다고 생각한다. 메스에 능숙하고, 무리없이 자궁을 꺼내는 등 의학 지식을 갖춘 얼굴 없는 범인을 두고 언론에서는 '외과의사'란 별명을 붙이는데, 외과의사의 범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대담해진다. 연쇄살인이 진행될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캐서린 코델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외과의사의 정체는 과연 누구일까?
중국계 미국인 작가로 알려진 테스 게리첸의 스릴러 '제인 리졸리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이 시리즈는 현재 총 6권이 나와 있다). 내용 설명을 봐서 알겠지만 사건의 배경은 주로 병원이고, 등장인물도 대부분 의사다. 이는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은데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의사로 일했던 적이 있단다. 그래서 책에 등장하는 병원 풍경과 수술 묘사는 굉장히 정교하고 이보다 더 사실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의사로 잘나가던 테스 게리첸은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출산휴가를 이용해 어린 시절의 꿈에 도전한 그녀는 로맨스 소설로 등단에 성공하지만 작풍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릴러로 바꾼 후에는 글만 써도 먹고 살 만큼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현재는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책을 가장 잘 파악하려면 역시 작가이력을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이해할 수 있는 대부분의 열쇠가 거기 숨어 있다. 당연하겠지만 소설은 작가가 쓰는 거니까 소설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잘 살펴보면 소설가의 작품도 보이게 마련이다. 왜 검도한 사람은 싸울 때 몽둥이부터 찾고, 태권도 한 사람은 다리부터 뻗는 것처럼 본인이 의사였으니 가장 잘 아는 세계인 병원을 소재로 메디컬 스릴러를 쓰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그렇지만 의학 쪽으로 깊이 들어가 원인 불명의 병원체의 공포를 그린다거나 하는 하드하고 본격적인 메디컬 스릴러는 아니다. 그녀에게 병원과 의사는 흥미로운 스릴러의 소품과 배경일 뿐이다).
한때 로맨스 소설로 이름을 날렸던 작가답게 <외과의사>는 로맨스의 맛도 충분히 살아 있다. 아내를 잃고 절망한 토마스 무어 형사와 과거의 악몽에서 간신히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유령과 맞닥뜨린 캐서린 코델은 강렬하게 이끌리며, 이 둘을 여성적인 매력이 없는 제인 리졸리가 질투하면서 작품이 거의 삼각관계 드라마처럼 나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스릴러의 팍팍함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위한 양념이다. 하지만 본말전도라고 이 로맨스 때문에도 그녀의 책을 잡는 여성 독자가 꽤 있을 듯하다.
토머스 해리스의 등장 이후 미국의 스릴러는 대부분 사이코 범죄자가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며 경찰과 대결하는 구도가 많으며, 퍼트리샤 콘웰이 히트를 치고 난 후에는 법의학이나 의학에 관련된 전문 지식으로 독자들을 홀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말의 반전 한두 차례는 필수 요소가 되었고.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이지만 읽는 동안은 그렇게 정신없이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미국의 현대 스릴러라는 장르는 이미 독자의 입맛에 딱 맞도록 고도로 특화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스릴러 장르의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여러모로 완성도가 뛰어나다. 범인의 정체를 범인의 독백을 통해 독자에게 뜬금없이 그냥 밝혀버리는 것은 아쉽지만, 독자들만큼 결정적인 단서를 받지 못한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가 어떻게 범인의 흔적을 뒤쫓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가는지를 시종일관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마지막으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형사 제인 리졸리가 겪는 고통이나 무수한 성폭행 피해여성들의 아픔을 공감가게 그리는 것도 <외과의사>만의 장점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사후 피검사를 받으러 다시 왔어요. 정확한 AIDS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노출된 지 6주 후에 검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거야말로 정말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죠. 성폭행을 당한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가해자가 치명적인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았는지 확인까지 해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