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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현재 한국 공포소설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김종일 작가의 신작 장편이 나왔다. 아마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1, 2>에 수록된 '일방통행'과 '벽'을 읽어본 독자라면 김종일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과 공포라는 장르를 주무르는 솜씨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 밖에 인체의 여러 부분 즉 눈, 귀, 입 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집 <몸>도 출간되어 있는데 죄다 우수한 단편들임에도 불구하고 10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분명히 무리한 설정이 보여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었다. 하지만 <손톱>은 처음부터 온전한 장편을 구상하고 쓴 작품이라 이번에야말로 김종일 작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겠구나 모두들 기대가 컸을 것이다.
아이를 유괴 살해당하고 나서 남편과도 이혼한 채 하루하루 절망 속에서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는 듯한 홍지인이라는 여자가 있다.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애인 세준과 동거하면서 삶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 생기고, 또 호구지책으로 친구 민경과 동업한 네일아트 가게도 그런대로 잘 풀려 이제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구나 싶다. 하지만 홍지인이 낯선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소박한 평화는 깨진다. 꿈 속에서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저 재미로 죽이는 살인귀가 되어 있는데, 그런 그를 노리는 사신이라는 존재가 있다. 사신은 손톱만을 이용해 살인귀(홍지인과 동화된)의 눈을 뽑고 잔인하게 난자하는데 비록 꿈이라지만 고통이 생생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보니 손톱 하나가 빠져 있는데 빠진 손톱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
그날 이후 홍지인은 매일같이 꿈 속에서 고문기술자나 퍽치기범 등 죽어 마땅한 인간이 되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손톱으로 살해당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물론 꿈에서 깰 때마다 손톱 하나씩이 빠지고 사라지는 것도 변치 않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악인이 되어 살해당하는 꿈을 꾸는 걸까, 그리고 손톱은 왜 빠지고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홍지인은 꿈에서 얻은 단서를 토대로 나름의 조사를 벌이는데, 정말로 꿈 속에서 자신이 되어 있었던 고문기술자 등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꿈과 달리 고문기술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앞으로 고문기술자가 죽게 될 걸 암시하는 예지몽을 꾼 것일까? 의문은 정체불명의 노숙자가 홍지인 앞에 등장해 '라만고'라는 말을 전하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는데, 인도네시아 전설에 등장하는 라만고는 손톱을 먹는 자를 뜻한다.
손톱이 부러졌거나 아예 빠져본 사람이라면 그 머리끝까지 온통 곤두서는 듯한 통증을 기억할 수 있을 텐데, <손톱>은 말 그대로 신경 하나하나까지 날카롭게 찌르는 손톱이 빠질 때의 아픔과 불쾌감이 살아 있는 공포소설이다. 페이지마다 홍지인의 불안과 혼돈스런 심리가 생생해 독자 역시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녀가 공포를 느끼는 배경이 꿈 속이라는 것도 탁월한데, 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악몽과 손톱이 빠지는 이유를 홍지인과 그녀의 지인들이 밝혀나가는 미스터리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어 뒤가 궁금해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하이라이트는 홍지인의 유일한 버팀목들인 세준과 민경에게서 어두운 그늘을 발견하는 후반부.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혼란스런 처지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하지만 잠이 들 때마다 악몽을 꾸고 손톱이 빠져,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홍지인의 마지막 손톱이 빠지면서 모든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 결말 부분은 살짝 아쉽다.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손톱이 다 빠지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알게 될 거라는 정보를 주긴 했지만 홍지인이 정말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공들여 미스터리 플롯을 구축했건만 기다려보면 진상이 나온다는 결말일 줄이야. 그렇다면 홍지인이 애써 찾아다닐 필요없이 처음부터 그냥 손톱이 다 빠지기만 기다리면 됐던 것 아닌가. 공포소설이지만 미스터리 소설의 플롯을 깊이 차용한 작품답게 홍지인이 그녀와 관계된 비밀을 여러 가지 단서 속에서 추리를 통해 밝혀냈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 스즈키 고지의 걸작 중의 걸작 <링>처럼 말이다. 또한 라만고의 실체가 약간 복잡해 홍지인과 그녀의 꿈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에게 각각 달리 작용하는 구석도 있어 뒷맛이 아주 개운치는 않다. 영화로 만들어질 작품이라는데 라만고라는 복잡한 존재를 필연적으로 축약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야심을 다소 버리고 소박하게 각색하는 건 어떨지 싶다.
누가 쓴 소설이든 간에 완벽한 만족감을 주기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테고, <손톱> 역시 잘 쓴 부분과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이 공존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됐는데, 악인의 재생과 정화라는 테마에서 김종일 작가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매스컴을 매일매일 장식하는 살인, 강간, 유괴 등 악의 소용돌이를 보며 그저 한숨만 짓고 절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김종일 작가는 반성과 재생을 통해 세상이 새로 태어나길 바라는 희망을 진심으로 노래하고 있다. <손톱>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독자들이 잠시나마 생각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가장 큰 작가의 행복이 아닐런지. 예전에 여동생이랑 싸울 때 여동생이 손톱을 쓰면 엄마가 혼을 냈다. 손톱으로 할퀴면 흉이 평생 간다고. 김종일 작가의 <손톱>도 그렇게 오래오래 남을 작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