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색의 수수께끼 밀리언셀러 클럽 82
아베 요이치 외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청색의 수수께끼]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등용문으로 알려진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하고 등단한 작가들의 중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란포 상은 추리소설 거장 에도가와 란포가 사재로 후원해 1955년에 시작했고, 3회째인 1957년부터는 장편 추리소설 공모를 통해 그중 우수 작품을 시상해 오늘에 이르렀다. 물경 50년이 넘는 동안 많은 추리작가들이 이 상으로 데뷔했는데, 현재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리무라 세이이치, 히가시노 게이고, 기리노 나쓰오 등의 작가들도 이 란포 상이 없었다면 추리작가로서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을 것이다. [청색의 수수께끼] 말고도 [적색]이 동시에 나왔고, [흑색]과 [백색]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1989년 제35회 수상자인 나가사카 슈헤이부터 2003년 제49회의 시라누이 쿄스케, 아카이 미히로까지 그 기간 안에 상을 탄 거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선을 보여 현대 일본 추리소설의 흐름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총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된 [청색의 수수께끼]의 포문은 1990년 수상자인 아베 요이치의 <푸른 침묵>이 연다. 고향에서의 희망 없고 지루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도쿄에 왔건만 햄버거 가게 비정규직으로 근근히 먹고 살며 하루하루 나이만 들어가는 여주인공 나오코에게, 친구지만 자신과 달리 원대한 푸른 꿈을 안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치에는 우상이나 다름없다. 그런 사치에가 애인과 더불어 동반자살한 시체로 발견되고 더구나 몸을 파는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 나오코. 사치에는 그런 애가 아닌데...친구의 불명예를 벗겨내기 위해 나오코는 조사를 결심하게 되고 조사 뒤에는 전 일본을 떠들석하게 만들 비밀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평범한(?) 동반자살 뒤에 커다란 음모가 숨어 있다는 설정은 [점과 선] 이후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라, <푸른 침묵>이 일본 사회파나 하드보일드의 전통 아래 씌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살인사건과 독자적인 조사, 의문의 조력자, 의외의 결말까지 사회파의 클리쉐들이 너무도 도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나열되는 느낌이 강한 데다 일본 유력인사의 비밀스런 엽색 행각, 북한 공작원의 위협, 불법 카지노 등 100페이지 남짓한 분량 안에 너무 많은 사회 고발을 하려 해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기분이다. 원고료를 미리 땡기고 미루고 미루다 마감일 직전에 겨우 써낸 듯한 작품이라고 하면 지나친 실례일까.

 

<다나에>는 반가운 후지와라 이오리의 작품이다. 1995년작 [테러리스트의 파라솔]로 란포 상과 나오키 상을 더블 수상한 초유의 쾌거를 이룬 그는 전공투 세대의 아픈 기억과 회한을 허무하고 하드보일드한 필치로 담아낸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이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다. 제목은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렘브란트의 명화 <다나에>에서 따왔으며, 유명 화가의 그림에 화학 약품을 투척해 그림을 훼손시킨 사건과 그 사건 뒤에 감춰진 가슴 아픈 비밀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역작이 망가진 유명 화가가 왜 내 그림을 노린 걸까 하는 의문을 품고 조사에 나서는 게 기둥 줄거리인데, 진상을 알아내는 과정이 독자들이 추리소설에서 응당 기대하는 것처럼 기발하거나 인상적이지 못해 살짝 밍숭맹숭하다. 다만 성공을 위해 몹시도 큰 것을 버리고 달려온 유명 화가가 자신이 놓친 것이, 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나를 깨닫는 절절한 회한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이다. 후지와라 이오리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지난 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데,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눈물이 줄줄 흐를 듯.

 

<터닝 포인트>는 1992년 [파는 여자, 벗는 여자]로 소설 현대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1996년 [왼손에 고하지 말지어다]로 란포 상을 탄 와타나베 요코의 작품. 개인적으로 [파는 여자, 벗는 여자]는 꼭 읽어보고 싶다^^ 유명 백화점에서 자잘한 절도범들을 잡아내는 '보안사'라는 흥미로운 직업을 소재로 삼은 게 독특하다. 날리던 여성 보안사에서 지금은 후배 보안사들을 교육하는 교관이 된 '나'는 늘 치열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에서의 즐거움을 잊지 못해 지금 일에 불만이 많다. 나와 쌍벽을 이루던 동료 보안사가 부진하자 그녀를 도와 오래간만에 현장에 복귀하게 된 나는 수상한 중국인 여성 3인조를 본능적인 감각으로 뒤쫓는다. 이 작품의 재미있는 점은 작품 전체에 패러디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 실제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보안사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전형적인 경찰소설의 주인공을 통째로 흉내낸 인물 같다. 일선에서 물러나 늘 현장을 그리워하다 우연히 현장에 다시 뛰어들어 혁혁한 전과를 세우는. 그래봐야 좀도둑을 현장에서 잡고 훈계한 후 내보내는(법적인 권한도 일체 없는) 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는 일에 비해 어찌나 비장한지 보면서 계속 미소를 짓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여자들의 얼굴을 보는 즉시 직감했다. 교활한 눈빛. 따발총처럼 끊임없이 지껄이면서 다물지 않는 입. 세 명 다 웃음을 띠고 있지만 그 눈은 명백히 사람의 선의나 배려라는 것을 철저하게 튕겨내고 세상의 질서를 굳게 거부하는 악당의 눈이었다."

겨우 브래지어 도둑에게 세상의 질서를 굳게 거부하는 악당의 눈이라니 거창하기도 하다(나는 처음에 그녀들이 브래지어 도둑이라고만 믿고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재기 있는 패러디적 정서와 무기력, 무감동한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를 발견하는 나와 동료 보안사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로맨스도 흐뭇하지만 추리소설로서 빼어난 작품은 아닌 것 같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고 해결은 결국 다른 사람이 하는데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로 머리 쓸 여지도 없다.

 

<사이버 라디오>는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으로 그럴 듯한 금융 미스터리를 선보인 전직 은행원 출신 이케이도 준의 작품이다.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이 상당히 만족스러워 기대를 많이 했는데 명필도 붓을 가리는지 중편은 장기가 아닌 것 같다. 가끔씩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리는 주인공은 그 초능력(?)을 좋은 데 쓸 것이지 사기에 이용해 먹고 산다. 특수 능력으로 부정한 기업의 비밀에 접근하게 된 주인공은 한 탕 크게 하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를 하고 결국 거사일이 밝아온다. 영화 <오션스 11>이나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 제프리 아처의 소설 [한 푼도 더도 덜도 말고] 같이 기발한 작전으로 돈을 털어내는 작품들을 콘 게임(con game) 혹은 케이퍼(caper)라 부르는 것 같은데 <사이버 라디오>도 비슷하다. 특히 금융에 조예가 깊은 이케이도 준의 돈세탁 강의 같은 건 실전용이라 흥미롭긴 하지만 현실에 강하게 밀착해 있는 금융 사기라는 소재와 텔레파시라는 초능력이 그렇게 조화롭게 융합된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마지막 작전이 별로 통쾌하거나 짜릿하지 않다.

 

무난하고 결점도 별로 없지만 이거다 하고 썩 내세울 만한 작품들도 없어 아쉽던 차에 마지막 작품 <온천 잠입>은 그런 갈증을 어느 정도 사라지게 만든 가작이라 할 만해 만족스러웠다. [매치 메이크]로 2003년 란포 상 수상자가 된 시라누이 교스케의 포복절도할 소동극인데,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면 좀 잔인하지만 실실 웃음이 터져나올 만한 블랙코미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모가 탁월하지만 인맥이 없어 조연으로 머물던 여배우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는다. 프로듀서에게 몸까지 바쳐가며 온천가에서 찍는 사극의 조연을 따낸 것이다. 하지만 여배우의 전 스폰서가 온천까지 쫓아와 같이 죽자고 칼을 들이대니 옷을 홀랑 벗었지만 도망칠 수밖에 없다. 두 남녀의 한밤의 스트립 쇼가 계속되는 가운데 우발적으로 남자가 죽게 되고 여배우는 고뇌에 빠진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놓칠 순 없지. 하지만 이 시체를 어떡한다...시체가 어떻게 되는지는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길. 죽어서 움직일 수도 없는 시체가 매일 밤 장소를 바꿔가며 발견되는 신기하고도 우스운 이야기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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