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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이순원 지음 / 세계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이순원의 자전적 이야기에 살을 입힌 성장기 소설. 19세라는 나이를 지나온지가 언제인지도
르겠다. 예전에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를 읽으며 성장기 소설의 일반적인 느낌을 떠나 ㅡ
그 일반적인 느낌도 좋다 ㅡ 성숙한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성찰적인 모습 그리고 함박웃음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지인에게 이순원의 이 책을 추천받았다.
지나온 내 19세도 함께 돌아본다는 즐거움에 기쁘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다.
아니 이런! 그런데 내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아닌가. 소녀가 아닌 소년의 세계를 보
게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낯선 세계에 웃음이 마구 나왔다. 물론 성의
구별없이 모든 10대가 겪었을 과정과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성(姓)에 눈뜬 소년의 호기심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구나를 생각했다. 영화 <몽정기>를 떠올리면 된
다. 친구 누나를 남몰래 좋아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사춘기 때 소녀들이 선생님을 좋아하던 모습이 떠올
랐다. 엄마의 관점에서 아들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책이 될 거란 생각이다. 이런 점이 책의 장점이지 싶
다. 간접체험을 통한 좋은 방법을 하나 터득해서 그것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소통의 폭이 책
으로 넓어진다는 사실.
「 너, 누나 좋아하니? 」
「 …… 많이요 」
「 감격스럽다. 내가 정수 그 말 가슴속에 간직할게. 정수도 오늘 내게 했던 말 영원히 잊지 말고.
우리는 거기까지야. 지금 정수가 한 말이 아름다운 건 정수가 지금 내게 한 말도 아름답지만, 그 말을
하는 정수의 나이가 아름답기 때문일 거야. 아마 스무 살만 지나가도 그 말이 스스로 아름답게 느껴지
지 않을지도 몰라. (생략) 」ㅡ 229쪽
사춘기의 아릿한 기억을 되뇌어보니 신체적 변화의 적응과 온갖 호기심, 미지의 동경, 날카로운 비판,
맹렬하나 허물어질 거 같은 감성이 동시에 존재했던 시기였다. 소년도 성에 눈을 뜨고 그리고 자아를
찾아간다. 소년은 농사를 기업적으로 경영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리고 사춘기 특유의 행동으로 ㅡ 한
마디로 막무가내 ㅡ 밀고 나간다. 일단 친구와 사는 곳에서 벗어나 일탈을 시도한다. 또래의 뭉침이란
이때가 정점이 아닐가 싶다. 빼놓을 수 없는 일탈도 소년에게는 퇴폐적이거나 단순한 가출이 아닌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족과의 갈등.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소년의 아버지로 끝까지
믿어주는 점이었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그런데도 가만히 타일러 보고 결국 묵묵히 기다려 준 아버지.
소년이 농사일을 하면서 학교는 다니지 않더라도 책은 읽으라며 약속을 다짐받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
상적이다.
소년은 나와 성적인 개념뿐 아니라 생각도 많이 달랐다. 이건 어쩌면 개인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숨어있던 성장기 때의 한 소녀를 불러내 기억을 환기시킨다. 그 소녀가 좋아하던 시, 선생님,
별, 친구, 의미, 바람 또 증오 조차하던 어른, 어떤 부류의 인간상, 정치. 그때는 그것이 최고의 관심거
리였다. 꽤 진지하고 우울하며 명랑했던 사춘기 소녀. 이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노을이 흩어지던 중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앉아있다 구름 사이로 비춰드는 햇빛과 풍경에서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불새의 날갯짓과 소리를 듣던 시절이다. 그러는 사이, 이 많은 실타래를 꽁꽁 묶어
두고 있었으면서 자주 풀어보지 못했음을 알아버렸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찬란한 시절을, 그때
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추억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리라. 나머지 행복했던 부분은 아
름다운 추억으로 분류해서 쌓아두어야지. 그리고 가끔 꺼내보고 싶다. 그런 추억 하나 없으면 얼마나
삶이 쓸쓸하겠는가.
이순원의 <19세>는 날개 달린 듯 빠르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다. 26개의 각주가 있는데 작가는 본문의
이해를 돕는 주가 오히려 본문을 방해하며 박학다식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주 중독증 환
자를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각주는 모두 재미있고 또한 다소 긴 것도 있지만 편하다. 내가
읽은 어떤 책들은 각주 때문에 다시 책을 찾고 싶지 않은 일도 있었다. 아무튼, 이 책은 유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