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바뀌는 곳에서의 3일
안드레아 데 카를로 지음, 이혜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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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작가 안드레아 데 카를로가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와 함께 영화작업도 했다는 이야기에 다소 호기심이 일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주옥같은 영화들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이 책도 그런 느낌을 줄 거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길>, <유로파> 등 몇 개의 영화만 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여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작가와 감독은 역시 각자의 스타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바람이 바뀌는 곳에서의 3일 동안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밀라노의 제법 성공한 네 명의 친구들은 십여 년 전에 이야기했던 것을 실현하기 위해 또는 쉴 공간을 얻고자 의기투합한다. 도시의 네 남녀는 언제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인의 안내를 받아 다섯 명은 밀라노에서 세 시간여의 거리인 윈드 시프트로 떠난다. 그러나 예기치않은 상황이 발생한다. 윈드 시프트는 이들이 꿈꾸던 우아한 전원주택 대신 원시적인 집과 사람만이 존재했다. 이들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윈드 시프트 부족 간의 갈등까지 더해져 불안함까지 겪어야했다. 이제 이들은 이곳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만을 고대하게 된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상황 자체도 그렇지만 네 명의 친구들뿐 아니라 윈드 시프트에 사는 여러 명까지 더해진 그들의 행동방식이었다. 각기 다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다가섰지만 다른 이는 또 불쾌해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도시생활에 익숙한 네 명과 원시생활로 돌아간 듯한 이들의 충돌과 차이가 눈에 들어왔지만 결국은 도시인 네 명 친구들 간에도 균열은 극대화된다. 어쩌면 이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친구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서로에게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서로 폭로하고 비난하며 신뢰가 깨지기도 한다. 과연 이들이 도시에만 있었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다.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만, 이곳 윈드 시프트에서 더 극명해졌을 뿐이었다. 어디서나 상황이 뒤바뀌면 평정심을 잃게 된다. 그것이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되돌아 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작가는 이들의 이후 행로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대신 독자에게 생각해보도록 했다. 루이자와 라우로가 나누던 대화나 아르투로와 미치로가 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묻는 사람을 마주하면 확신에 찬 대답을 들려줄 이가 몇 명이나 될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는 거 같고 남에게 단점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고하게 살아왔지만, 그것이 행복했었는지 의문을 가진 적은 없었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처음에 길을 잃고 헤매다 들어선 곳이 결국은 찾고 있던 곳이었지만 그들 각자의 파라다이스는 다르다는 기준 때문에 누구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지만 반대로 벗어나고 싶은 곳이 되기도 했다. 물론 다시 현실의 삶으로 돌아가서도 그들은 가끔 윈드 시프트를 떠올리며 살 것이다. 그리하여 변화된 삶을 사는 이도 생길 것이다. 

 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한 게 있는가 하면 잔잔한 호수처럼 이어지는 영화도 있다. 그리고 따분한 거 같지만 그 속에 메시지를 넣어두고 보고 나서 여운이 남게 하는 영화도 있다. <바람이 바뀌는 곳에서의 3일>은 아마도 마지막에 속할 거 같다. 자신이 만든 삶에 만족한다고 생각하지만 뒤집어 보면 자신이 만든 삶이라는 시나리오 속에서 그 역할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는 경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들춰내는 일은 혼란을 수반하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라면 그만둬야 하니까. 인생의 흐름이 있다면 그 흐름을 바꿀 바람도 있는 게 분명하다. 윈드 시프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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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1 - 사랑과 권력을 가슴에 품은 최초의 여왕
한소진 지음 / 해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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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부터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 소설인 팩션이 인기다. 그동안 수면 아래서 잠자고 있던 내용을 끌어내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았는데 선덕여왕도 그렇다. 내일부터 한 방송에서는 동명의 제목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고 요즘 예고편이 간간이 보인다. 물론 관심이 있어서 대략의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책과 드라마는 조금 다르다. 곧 드라마로도 만나게 되면 한소진 작가의 이 책과 비교해봐도 재미있을 거 같다.  

 선덕여왕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라는 사실만 알지 여왕의 사생활이나 업적은 사실 잘 몰랐다. 첨성대를 만든 선덕여왕의 동기나 성품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첫째가 아닌 둘째에 여자이기까지 한 덕만공주가 왕이 때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금세 읽은 책이다. 그러나 굳이 두 권으로 나누지 않아도 되었을 거 같다. 

 신라시대도 역시 계급의 시대였다. 골품제도로 성골만이 왕위를 이어가는데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천명공주와 덕만공주뿐이었다. 성골은 양쪽 부모가 전부 성골이어야만 하는 순수세력으로 이를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근친혼은 흔한 일이었다. 선덕여왕 역시도 후사가 없어 첫 번째로 얻은 성골 용춘공 이외에 다른 성골 남편을 들이나 결국 아이는 없었다. 대외적으로 진골 세력의 위협, 당나라의 업신여김을 비롯하여 사적으로는 남편과의 사랑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던 고단한 삶이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깊은 왕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는 미실을 들 수 있다. 이미 미실에 관련된 책도 출판되었을 만큼 그녀는 특징 있는 인물이었다. 팜므파탈적인 미실은 총명했으나 권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3대 왕을 거친 만큼이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여인이며 자신을 거부한 진지왕은 4년 만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럴 수도 밖에 없었던 것이 미실은 아이를 많이 낳았으나 후궁의 몸이었기에 왕위계승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홀로 강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권력에 눈뜬 미실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개의치 않았지만,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미실때문에 힘든 궁중의 여인이 많았으니 그중 한 명이 선덕여왕의 어머니인 마야였다. 그녀도 수많은 날을 자신을 보지 않고 미실 만을 보는 왕 때문에 힘겨워했었다. 이런 어머니의 사정을 알게 된 선덕여왕(공주일 때의 이름은 덕만이었다.)과 미실의 사이가 좋을 리는 없었으나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결구도는 크게 형성되지 않았지만 미실과 선덕여왕이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기에 동시대를 산 그들 각자의 삶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결코, 권위적이지 않았으며 현명했던 덕만공주는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하며 지적 호기심도 많았다. 그런 그녀가 여왕이 되어 동양 최초로 천문대를 만들기까지, 또한 계급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며, 기후관측 등을 예측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이는 모습 등은 세심하면서도 상대뿐 아니라 백성을 배려하는 마음이 컸기에 가능했다. 전쟁에서 이겨 영토를 넓히거나 하는 등의 모습은 없지만, 선덕여왕이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더 많은 역사인물에 대해 찾아 읽어야겠다. 물론 소설이라는 사실은 기억해야겠지만 일반 역사서와 함께 펼쳐보며 새로운 가능성이나 느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책읽기가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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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잭 린치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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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유명하다 보면 유명도 때문에 친근하게 느껴져 막상 접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과 그의 작품도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영국을 뛰어넘어 이미 세계 곳곳에서 찬사를 받는 그의 이름 뒤에는 풀리지 않은 의문 또한 넘쳐난다.  

 작가 셰익스피어의 개인적인 사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작품에 대한 해석과 관계는 아직도 연구 중이며 해마다 관련 책들이 꾸준히 나올 정도이다. 예전에 <셰익스피어는 없다>라는 책을 읽으며 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접했으며 항간의 떠도는 다른 의견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이라는 말, 또 에드워드 드 비어 백작이라는 말까지 다양한 견해도 접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직도 가려지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는 제목부터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책에서 말하는 것은 셰익스피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인 의미로 작가 셰익스피어와 시대가 만들어 지금까지 추앙받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부제가 문화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베일에 가린 인물이기에 수많은 소문과 추측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셰익스피어. 책의 시작은 유명도와 비교하면 지극히 조촐한 작가의 장례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살아생전의 그를 알 수 없기에 죽은 후 만들어진 그에 대한 과정을 조목조목 들려준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화 되었는지 역사적 시공간을 따라가 보자. 

 우선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극작가들의 공동집필이 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지금까지도 누가 집필에 참여했는지 밝히려 애쓴다. 즉, 지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순수하게 셰익스피어 혼자만이 쓴 것이 아님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셰익스피어가 혼자 썼건 아니건 간에 이후 그의 작품은 작가(ㅡ혹은 집필가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각색되며 이용된다.  

  유명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화려한 부활을 1장과 2장에서 다루는 방식은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이다. 어떤 의견을 두서없이 내거나 주장하는 게 아니라 독자들에게 사전지식을 챙겨서 알려준다. 영국과 연극이란 조합이 서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서막을 듣게 된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영국 문학사에서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을 짧게나마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들 수 있다. 수필가 찰스 램부터 그의 누이 메리 램, 제인 오스틴이 좋아한 <베네치아의 상인>의 샤일록을 연기한 배우, 시인 바이런이 <리처드 3세>를 연기한 배우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는 사실. 이뿐 아니라 독일 괴테의 열광, 프랑스 빅토르 위고는 "셰익스피어가 곧 연극이다."(152쪽.)라는 말로 찬사를 할 정도였다. 이렇듯 순식간에 책의 처음 부분이 지나갔다. 

 본격적으로 3장부터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돕는다. 영문학을 공부하거나 셰익스피어의 마니아라면 점점 흥미로워진다. 자세한 내용은 넘어가지만(ㅡ직접 읽어보는 게 훨씬 유익하므로.) 하나 확실하게 부러웠던 사실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국인의 진한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비평가뿐 아니라 남녀를 막론하고 셰익스피어를 연구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이러니 실로 완벽한 위대한 작가로 지금까지 사랑받을만하다.  

 우리 작가들 중 세대를 막론하고 사랑받는 작가는 몇 명이나 될 것이며 지속적인 관심으로 한국의 대표작가를 말하라면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이름은 누구일까. 어쩌면 중구난방으로 이름이 거론될지도 모른다. 너무도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만한 문학의 대가를 우리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번역의 어려움이나 기타 여건도 따라갈 수 없는 이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민을 보면서 다시 느꼈지만 역시나 관심과 사랑이었다. 끊임없이 회자되며 거론된다는 것은 수많은 의심과 비판도 동반하지만 이 역시 관심 밖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셰익스피어의 위대함만을 이야기하는가. 그렇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단점인 희극과 비극을 섞어 쓰는 방식이나 제대로 배워서 알고 쓰지 않았다는 것, 욕설과 외설 등 다양한 단점도 말한다. 그래서 작품을 다듬고자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갔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는 작가임에도 분명히 빈 수레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의 특징으로 간주하는 것 중 언어유희를 들 수 있다. 나 또한 그의 언어적 감각과 광대놀음 등에 사로잡혔다.  

 <리어왕>이 많은 작가에 의해 광범위하게 개정된 작품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모르고 읽었을 때와 비교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읽어볼 작품이 많은데 읽었던 작품을 다시 찾아 읽으며 느끼는 감동이 질리지 않게 좋다. 그리고 글을 읽다 가끔은 문맥과 맞지 않다거나 어색한 곳을 만났던 경험이 기억나는데 이유를 다시금 확실하게 알았다. 뜬금없다고 생각한 장면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이유가 있단다, 이유가 있단다 내 영혼아."라고 오셀로에서 말했듯이!  

 셰익스피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그를 변화시켰다. 결과는 상당히 긍정적이어서 영국을 넘어 전 세계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가 되었으며 그를 만든 수많은 사람이 함께 있었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순수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을 텐가. 아마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로 판단된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한 연구결과와 또한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의 유혹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말로 쉽게 쓴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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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 - 우디 앨런 단편소설집
우디 앨런 지음, 성지원.권도희 옮김, 이우일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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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패러디한 제목은 우디 앨런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지은 거 같지만, 제목이 제법 매끈하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의 단편소설집은 과연 어떨까. 예전에도 그의 단편을 읽은 적이 있어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역시 우디 앨런이었다. 사실 그의 단편을 읽지 않았어도 영화에서 느껴지듯 이 영감은 수다쟁이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순이와 결혼한 정체불명의 미국감독이며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우디 앨런식 삶의 철학이 깃든 책으로 블랙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즐겁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중간에 조금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재치있는 이야기는 웃음의 샘이 퐁퐁 솟게 하는데 충분했다. 문학, 건축, 미술, 음악 등 전방위 예술혼을 가진 영혼이라 그런지 이야깃거리가 넘쳐 그의 수다는 끝도 없다. 속사포처럼 빠른 진행은 수다스러움을 분출하는 활화산 같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우디 앨런식 화산의 건재함에 불똥이 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오죽하면 아이디어를 풀어낼 시간이 없을까 봐 우주의 멸망을 겁낸다고 할까. 재빠른 입담은 그의 꺼질 줄 모르는 열정이기도 하지만 결코 빠질 수 없는 특징이 되었다. 이쯤 되면 이 사람 풍자 한 번 맛 들어지게 한다 하겠다. 
 

 명문대학도 아니고 명문 사립유치원에 아이가 떨어지자 이후 삶의 모든 게 변한다는 첫 이야기는 탈락이란 제목이다. 고작 돈 펑펑 쓰는 명문 사립유치원에 못 들어갔다고 사람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가족 또한 뇌물을 써서라도 들어가고자 노력하나 실패한다. 노숙자를 위한 사회복지시설에 들어가셔야 무언가를 깨닫는 마지막 대사를 읽으며 그저 웃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우리 사회를 보자. 명문학교에 들어가고자 밤낮으로 애쓰지 않는가. 게다가 뇌물, 촌지, 인맥. 그리고 노숙자, 사회복지시설 등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소재가 여기서도 통한다는 것은 그가 그리는 세상이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이 세상이기에 거울처럼 현실을 반영한다. 그것도 살짝 비꼬아서. 그래서 약간 굴곡이 있지만, 한층 재미있다. 사회만연에 퍼진 이슈를 가져와 가볍지만 제법 꾹꾹 눌러 짜서 풀어두니 독자는 가볍게 책장만 넘기면 될 뿐이다.
 

 강박증이 떠오르는 우디 앨런. 정신분석학적 혹은 심리학 관점에서 보여지는 그는 어떨까. 내성적이며 강박을 지닌 그의 세계에서 수다를 한 꺼풀 벗겨 내면 고요함이 있다. 그가 계속 풀어낼 자유변주곡을 앞으로도 지켜보고 싶다. 
 

 삽화가 엽서인 줄 알고 처음에 잡아당겼는데 책에 붙어 있었다. 이우일 하면 예전에 <이우일의 그림동화>라는 엽기동화를 낸 사람인데 우디 앨런과의 조합이 정말이지 잘 어울렸다. 요즘처럼 날씨 좋을 때 밖이나 시끄러운 곳에서 읽어도 좋을 책이었다. 몸에 좋다는 저염식의 다소 싱거운 음식을 즐긴다 해도 가끔은 이렇게 톡 쏘아주는 양념을 가득 쳐서 먹어도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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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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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명한 초록색이 예쁜 디자인의 책 <꿀벌의 집>은 낯선 작가의 책이다. 가토 유키코는 농학부를 졸업하고 농업기술연구소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자연주의자라는 작가의 책에서는 자연의 상쾌함과 위대함이 느껴진다. 곳곳에 등장하는 도시와 대비되는 모습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의 품으로 뛰어가고 싶게 유혹한다. 자연은 거대하지만, 또한 소소하다. 그래서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 리에는 동거하던 남자 친구의 떠남과 엄마와의 다툼으로 새로운 환경을 맞는다. 20대 초반의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와의 갈등을 안고 있는 평범한 도시처녀였다. 그러다 거처까지 해결되는 일자리를 찾아 꿀벌의 집으로 오게 된다. 도시에서만 살던 그녀가 처음 만난 풍경은 자칫 지루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예쁜 꽃과 양봉이라는 낯선 세계와 그곳의 사람들에게 흥미를 느낀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듯 구성원들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는 듯 보이지만 누구도 선뜻 말해주지 않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꿀벌이라는 매개체로 연결되어 제법 끈끈한 유대를 유지한다.  

 20대 중반, 나도 낯선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다. 리에처럼 혼자 도시에서 먼 지방으로 갔고 표준어를 사용하는 나는 어딜 가나 어디서 왔느냐는 말을 듣고는 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직장인들을 만났고 일에 치여 정신없이 보냈었다. 돌아보면 피곤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며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리에도 점차 일에 익숙해지고 사람들과도 익숙해진다. 도시에 있는 어머니와도 관계가 개선되는데 이 소설은 신기하게 물 흐르듯 모든 이야기가 진행된다. 

 잔잔해서 파도 같은 일렁임이 없는 진행이다. 자연과 더불어 그 안에서 성장하는 리에의 모습만이 그려지는데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편안했다. 작가의 자연주의가 잘 깃든 다른 소설도 읽고 싶어질 만큼 말이다. 구체적인 언급과 해석도 없고 꿀벌의 집에서 일하는 모습만 있다. 하다못해 리에의 사랑 이야기조차 정말 간소하게 그린다. 모든 걸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심심한 책은 아니다.  

 자연과 치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플 때 느꼈었다. 리에처럼 대부분의 도시인은 상처받거나 지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마음을 어루만질 곳으로. 그곳은 바로 자연의 품이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처럼 우리도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바라만 보아도 머리가 맑아진다. 자연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우리네 삶과 연결된 아픔보다는 평화로운 마음을 먼저 얻게 된다. 이렇게나 다채로운 자연도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많은 일이 벌어지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살고자, 삶에 대한 열의로 치열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군림하거나 뻐기기 위함이 아니니까. 

 사람과 꿀벌의 교집합은 무엇일까. 집단생활이 아닐까 싶다. 서로 이용하고(ㅡ여기서의 이용은 나쁜 목적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이다.) 일정한 체계가 있으며 누군가는 일하고, 싸우고, 알을 낳는다. 하나의 큰 공간에서 살지만 개개인의 속성이 다르다. 다만, 사람은 여러 가지 변수를 갖고 있으며 원하면 얼마든 바꿀 수 있다. 일벌은 죽을 때까지 일벌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까.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절대로 그래. 사람의 일생이란 말이지, 땅속에서 솟아나온 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마침내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 흐름을 도중에서 의식적으로 멈추려 하다니……, 어떤 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123-124. 조지가 리에에게 하는 말.)

 자연스런 흐름을 의식적으로 멈추는 이유를 타인이 다 이해하기란 어렵다. 나조차도 가끔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한때 모든 것을 멈추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이렇게 살아있으며 속도의 조절을 가끔은 더디게 할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처럼 서서히 그러나 부단하게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지친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소설에는 절정이 있다고 학창시절에 배웠지만 <꿀벌의 집>처럼 절정이 없어도 기억에 남는 소설도 있다. 문학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마음 한구석을 잔잔히 채워서 만족한다.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같은 느낌이다. 얇고 평이한 전개로 가독성이 좋아 오래도록 붙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연과 상처에 대해 돌아본 시간은 읽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았다. 양봉처럼 우리도 달콤한 꿀을 얻으려면 마음을 잘 가꿔야겠다. 지나가는 상처에 깨지거나 조각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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